안녕하세요 te verde입니다. 아아 지긋지긋해 궁궐들...  아 아닙니다. 포스팅이 귀찮아서 요즘 계속 옆으로만 돌고 있죠. 그래서 오늘은 궁궐들의 야간개방 편을 쓰려고 합니다. 뭐, 이제 다들 아시겠죠. 서울의 5궁 경복궁, 창덕궁, 창경국, 경희궁, 경운궁  아아.. 하도 많이 읊다 보니 무슨 마법소녀물 주인공이 주문 외우는 기분이야... 

    이렇게 구질구질한 날씨에도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난 의지천재^^ 스스로에게 박수를 드려요 ^^ (...) 아무튼, 포스팅 시작하겠습니다.

1. 어디가 야간개장을 할까

    서울의 5궁 중에서 야간 개장을 하는 궁궐은 어디어디 일까요? 복수정답 인정.


1. 경복궁 2. 창덕궁 3. 창경궁 4. 경희궁 5. 경운궁


 답은 1,2,3,5 입니다. 경희궁 빼고 모두 합니다. 

우왕. 거의 다 야간개장을 하네요?! 이번 주말에 애인이랑 궁궐로 심야 데이트 가야지 ♡

조까ㅗ

<아무때나 여는게 아니란다>

    그래요. 궁궐 야간개장은 아무 때나 하는게 아니에요. 염장질도 아무때나 하다간 저한테 쳐맞아요<3

    일반적으로 궁궐들은 봄, 여름엔 여섯시 반까지, 가을, 겨울엔 다섯 시 or 다섯 시 반까지 개장을 합니다. 경운궁(덕수궁)의 경우만 항상 아홉 시까지 야간개장하고 있지요. 개방하는 궁궐 중 나머지 세 곳(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특별 개방 시에만 야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하나 대충 뜯어볼까요.

2. 경복궁

  

  조선 전기의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입니다. 임진왜란 때 한 번 다 날려먹고, 흥선대원군이 300년만에 중건했지만 일제시대 때 10% 전각만 남기고 싹 다 헐려버렸지요. 현재 수 천억을 때려부어 20%정도로 복원이 되었습니다. 경복궁의 야간 개장시기는 문화재청이 꼴릴 때(...) 합니다.  광복 이후로는 2010년 11월에 처음으로 야간 개장을 했습니다.[각주:1]  경복궁 야간 개장은 경복궁의 앞부분인 근정전 + 경회루 권역까지만 개방합니다. 그 뒤로 넘어가면 사람들이 숨어 들어갈 공간이 너무 많아서 통제가 안될 것 같다고 생각한 듯...?

    진짜 개장시기 : 앞에서 말한 꼴릴 때 한다는 건 좀 농담이고(농담 아님)  2011년부터는 5월 중순 무렵에 일주일, 10월 무렵에 일주일 간 개방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듯 합니다. 2011년, 2012년에는 모두 5월 15일을 전후해서 5일 가량 개방했으니까요. 이 때 되면 남녀노소를 가지리않고 대포와 지지대 카메라와 삼각대를 가지고 오신 많은 분들이 근정전 회랑과 경회루 연못가 앞에서 셔터를 눌러대고 계시지요. 이쁜 사진을 인터넷을 통해 많은 이들이 보고 하는건 다 좋은데, 다른 사람들도 관람할 수 있도록 적당히 찍고 치워주셨으면 한다능...

    경복궁 야간개장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 봄이되어 자경전(대비전) 앞에 있는 살구나무들이 꽃을 피우면 참 아름답습니다, 자경전 꽃 담 앞에 피어난 분홍색 살구 꽃들이 야간 조명을 받아 하늘하늘 거리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3. 창경궁

    창경궁 또한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에 야간개장을 합니다. 창경궁은 나무들이 많아서 낙엽이 질 무렵에 단풍이 참 예쁩니다. 고로 가을이 훨씬 좋지요. 일반적인 개방 범위는 명정전, 춘당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권역입니다. 

    창경궁은 일제시대에 동물원으로 조성되었던 흑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전각이 헐렸다가 후대에 복원된 것들입니다. 창경궁의 경우 대학로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으니 대학로에서 밥 한 끼 먹고 슬렁슬렁 걸어가서 바람쐬기에 좋습니다. 참고로 창경궁 바로 옆에는 서울대병원이 있는데, 여기 건물 고층에서 창경궁, 창덕궁 방향을 보면 경치가 그렇게 좋다고...

4. 창덕궁

    창덕궁 야간 개장은 경복궁, 창경궁 야간개장과는 격이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보름달이 뜨는 밤, 일 년에 단 20일 하루에 100명씩에게만 '달빛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창덕궁을 개방합니다. 


    비용은 1인 당 3만원.  20명 당 한 명씩 해설사가 동행하며 창덕궁을 안내해 줍니다. 전통 등 모양을 한 조명들이 주요 전각과 길을 비추는 가운데 10만평이나 되는 구중궁궐 안에 관람객은 단 100명, 아주 쾌적한 관람을 보장합니다. (재수없게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들이 오지만 않으면요 )

    하지만 주요 전각과 후원을 살펴보는 것에서만 그치면 3만원이 아깝죠, 후원의 연경당에서 20-30분간의 전통공연을 감상하며 다과를 즐기는 시간도 있습니다. 저 처럼 궁궐 덕ㅎ 궁궐에 애정이 깊은 사람은 꼭 가고 싶은 프로그램이긔.  알음알음 사람들에게 알려지다보니 인기가 하도 좋아서 예매 시작 5분 만에 전일 전석 매진될 정도에요. 얼마전에 인터파크에서 하반기 달빛기행 예매가 있었지요.  



 그래서 나 예매했슴.


    낄낄낄낄 저 하반기에 창덕궁 달빛기행 가요 이힝. 이거 말하고 싶어서 포스팅했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같이 갈 사람이 없네.... 또르르... 아무튼 여기까지 읽어줘서 고마워용.

번외 : 왜 덕수궁은 항상 야간개장을 하죠? 경희궁은 어떻게 된거고?

    경운궁(덕수궁)은 코딱지만해서요 가 아니라. 저한테 자세한 사정은 묻지 마세요... 난 문화재청 근무자가 아니란 말이야, 아마 안에 미술관도 있고 바로 옆이 시청이고 하니까...?

    경희궁은...  경희궁은 뭐 남아있는 게 없어서 야간개장을 하나 마나 무의미 함 ㅠㅠㅠㅠ  경희궁에 있는 궁궐 건물이 몇 안되는데, 정문인 흥화문 하나 빼곤 죄다 복원인데다가 본래 경희궁 부지는 지하벙커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시교육청 + 서울시립미술관 등등의 건물이 빽빽히 차있어서 뭐 어디 담장을 칠 수도 없습니다. 고로 


‘야간개장을 안 해도 그냥 돌아 걸어가면 들어갈 수 있슴‘  물론 편전인 숭정전 이쪽엔 못들어가겠지만 말이에요


 그럼 오늘은 짤막하게 여기까지만 쓸게요, 병원가야함 ㅠㅠㅠ 여러분 안뇽~ 뷰온 꾹꾹 눌러줘용


  1. ‘문화재청이 꼴릴 때’ 라고 쓴 이유 : 2010년 경복궁 최초 개방 이유가 G20정상회의 기념이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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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5궁 이전 포스팅 :  건축에 관한 무언가4. 서울의 궁궐들 5궁 (上) 건축에 관한 무언가5. 서울의 궁궐들 5궁 (中)

안녕하세요 te verde입니다.

 오늘은 드디어 끝날거에요, 와아 끝났다 끝났어 조선의 궁궐 시리즈 하(下)편  아아... 내가 미쳤지 ㅠㅠㅠ 이런 패기로운 주제를 잡는 게 아니었어....  보름 만에 쓰는데도 그저께 쓰고 오늘 쓰는 것과 같은 피곤함. 아 아닙니다...  

1. 임진왜란 : 하얗게 불태워 버렸어... 궁궐을

    저번 포스팅에서 보셨다시피,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양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세 궁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임금은 선조. 11대 중종부터 14대 선조까지의 가족관계를 알기 위해, 잠시 왕실 가계도를 보겠습니다. 

<중종의 가계도, 여인천하의 소재제공자 답네요. 글씨 더럽게 못써>

    선조는 원래 왕이 될 짬밥. 아니, 서열이 아니었습니다. 중종의 수많은 서자들 중 7남인 덕흥군(임금의 적자는 대군이라는 칭호가 붙지요)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죠. 


그냥 아들이어도 일곱째면 왕위를 잇기가 힘든 순번인데 심지어 7남의 아들...  

 

<헐 대박>

    그러니 선조가 왕이 됬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운 빨인거죠. 중종의 적자로 왕이 된 사람은 인종, 명종 두 임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종은 비실비실대다가 재위 1년 만에 사망하고 명종은 유일한 아들이 일찍 죽어 후사가 없었죠. 게다가 명종의 재위 기간이 20년이 넘었으니 명종의 형제들은 대부분 50줄에 접어들어 왕위보단 웰빙(..)을 생각할 나이가 됩니다.[각주:1] 

    결국 명종의 조카들(중종의 손자들) 중에서 후대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덕흥군의 아들인 하성군(선조)이 명종의 눈에 들어서 후사로 책정되지요. 여기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만, 다음 기회에 이야기 하도록 하죠. 분량이 많아서 귀찮아염.

   아무튼 선조 명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5년 간 (궁궐 건물에는) 별 일 없이 시간이 흐르지요. 그런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도로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됩니다. 네, 임진왜란이요 ㅇㅇ 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은 팍삭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그렇다면 임진왜란으로 인해 한양의 궁궐들은.....? 


관청이 무너지고, 궁궐이 무너지고


선조수정실록 25년(1592 임진) 4월 14일 28번째기사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나다

    도성의 궁성(宮省) 에 불이 났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 세자빈의 찬궁 이 있는 곳이었다. 역대의 보완(寶玩)과 문무루(文武樓)·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 춘추관의 각조 실록,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의 사초(史草),【《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의 초고이다.】 《승정원일기》가 모두 남김없이 타버렸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아 먼저 불탔다.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임금이 없을 때 도성을 수비하는 직책 (각주)이 몇 사람을 참(斬)하여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어머나 씨발>

홀랑 다 태워먹었어요.    

{1592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전소(全燒)}  +종묘도 당연히 소실

부록 : 그 많은 궁궐은 누가 다 (태워)먹었을까

<일본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궁궐>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노비문서를 태우기 위한 노비들 + 보물을 노린 난민들이 궁궐과 관청에 불을 질러서 세 궁궐이 모두 타버린 것처럼 기술되어 있습니다.  흠.....  진짜 백성이 불지른걸까요.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 중 하나이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인 오오제키(大關)의 전기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의 일부를 봅시다.

 ‘5월3일 술시. 조선의 도읍 동대문 안으로 진입했다. 거기서 황궁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 (玉樓金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시황의 궁궐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 있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 장군도 천자의 옥좌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


음.............????? 너 궁궐을 본거니? 

    그 다음날인 5월 4일, 또 다른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가 한양에 입성합니다.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종군승 제타쿠(釋是琢)가 오타쿠같애 남긴 <조선일기> 중 ‘경복궁관람기’도 살펴볼까요.


‘북산 아래 자궁이 남향하여 있는데, 돌을 깎아 사방으로 벽을 둘렀다. 진정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는데, 행랑을 둘렀으며 처마가 높다. (중략) 천장 사방 벽에는 오색팔채로 그린 기린・봉황・공작・난・학・용・호랑이가 있다. 계단 가운데는 돌로 새긴 봉황이, 그 좌우에는 붉은 학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이곳이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으로선 분간할 수 없다.’


...............?!?!?!?!?  이게 뭐시여....? 왜군들이 궁궐을 봤다는데?

사실 정리를 해봅시다.

1. 선조는 1592년 4월 30일에 한양을 벗어나 몽진(피난)을 갑니다.(어려운 용어의 뜻을 알려주다니... 상냥해)

2. 앞선 글에 있던 유도대장은 한강 방어선이 뚫리자 왜군과 싸우지 않고 바로 도주. 

3. 그 후 왜군들이 5월 3일에 한양에 입성.  

-> 고로, 왜군은 한강을 건넌 이후 한양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조선군, 관료들과 마주친 적이 음슴. 

    실록의 기록에 근거하면, 왜군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인  1-2번에서 세 궁궐이 전소되어 있어야 합니다. 근데 3번 순서에 있는 왜군들이 궁궐을 봤긔??? 심지어 화려한 궁궐을 보고는 감동해서 눈물까지 질질...?[각주:2] 아무튼, 왜군이 한양에 들어가기 전까지(5월 3일 전까지) 도성 내의 궁궐 건물들은 멀쩡했습니다. 

    그런데 고니시 군의 종군승 덴카이(天荊)가 저술한 <서정일기> 5월 7일 자 기록에는 ‘궁전은 모두 초토로 변했다. (중략) 누원이 남아 있는데, 실로 불탄 뒤의 한 떨기 풀이라 하겠다’ 라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선조가 북쪽으로 튀던 4월 30일은 큰 비가 내렸습니다. 장대한 규모의 세 궁궐 모두가 불타기엔 힘든 날씨죠. 고로 왜군이 입성한 5월 3일~5월 7일 사이에 궁궐의 방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이러나 저러나 1592년 5월, 조선 전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던 세 궁궐은 쌍큼하게 사라졌습니다.

2.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개시된지 약 1년 후, 수도 한양이 수복됩니다. 신하들은 선조에게 어서 수도로 환도하자고 건의를 하지요. 하지만 발발당시 백생들을 쌩까고 개성->평양->의주까지 도망간것도 모자라 요동반도로까지 튀려고 했던 선조는 쉽게 한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한테 쳐먹을 욕이 무서웠거든요.

    나라를 버린 왕이라고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피난을 갔던 선조입니다. 피난 당시 평양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은 왕비가 탄 말을 걷어차고, 왜군들에게 임금의 행선지를 알려주기 위해 임금의 임시거처 담벼락에 ‘왕은 의주로 도망간다'라는 낙서까지 써 놓았었을 지경으로 욕을 먹었습니다.  아... 선조의 찌질함이 너무 짜증나서 이야기가 다른길로...ㅠㅠㅠ    

    아무튼 임진왜란이 시작된 지 1년 3개월 만에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옵니다.  (1593년 10월)


근데 궁궐이 없ㅋ엉ㅋ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다 타서 법궁이고 이궁이고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음ㅋㅋㅋㅠㅠㅠㅠㅠ 

당시 궁궐터들의 꼬락서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 : 

    하는 수 없이 그나마 멀쩡하던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그 주변의 고관들의 집을 임시 세자궁과 종묘로 사용합니다. 이 때 이 곳 일대를 정릉동 행궁이라고 부르게 되지요.[각주:3]  정식으로 돌담을 두를 돈이 없어서 나무로 적당히 울타리를 치고, 대문도 동쪽에 하나 서쪽에 하나 대충 짓습니다. 이후 몇 번 궁궐을 재건하고자 했으나 재정이 시망이라[각주:4] 결국 선조 생전에는 짓지 못하고, 선조는 1608년 정릉동 행궁 석어당 에서 사망합니다. 아... 안습... 

    그리고 맏아들인 (그러나 서자인) 광해군이 석어당에서 임금으로 즉위합니다.  광해군은 즉위와 동시에 궁궐을 수리할 재원을 마련, 공사에 착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산이 모자라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한 번에 복구할 수는 없고...  그 중 창덕궁을 골라 법궁(法宮)으로 삼아  수리 -실은 거의 신축-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1609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1609년 창덕궁 중건)

왜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을 법궁으로 중건했는가

 뭐...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1. 경복궁은 지금까지 임금 두 명이 폐위 당한 곳이라 기분이 좋지 않다. (단종, 연산군)  

2. 원래 경복궁 터 자체가 화기가 세다고 하여 풍수지리상 최고 명당은 아니다. 

3. 경복궁이 면적이 훨씬 넓어서 복구 비용이 더 많이 든다. 

등등이 있지요. 

    선조, 광해군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러 군왕들이 경복궁을 다시 세울 계획을 가졌습니다....만, 경복궁의 부지가 워낙에 넓다보니 막대한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30년 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발생(...)   국가 재정이 더 이상 굴러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망조가 들어서 도저히 시도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조 시기인 1700년대 말이 되어야 간신히 임진왜란 이전 수준으로 인구로 복구가 되었습니다, 200년 걸렸죠.)


 라는 건 실은 핑계임 ㅇㅇ,

 -광해군이 경복궁은 중건하지 않았지만 다른 궁궐은 다 중건했고, 새 궁궐도 지었슴-

1609년 창덕궁 중건, 

1611년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으로 개칭, 

1616년 창경궁 중건, 

1616년 자수궁 중건, 

1623년 경덕궁(경희궁) 창건,

1623년 인경궁 (완공 직전에 광해군 폐위)

  실은 광해군이 풍수지리사상 신봉자였긔.

 ..........?!?!?!?!?! 이게 무슨 무슨소리...  

부록 : 서자출신 왕.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트라우마 

     왜 그랬을까요?  광해군의 ‘정통성'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서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통성에 있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1. ‘아 ㅅㅂ 내가 차지해도 되는 자리인가' 하는 자격지심의 문제도 있고, 

2. ‘서자인 내가 왕이 되었으니 다른 형제가 반란을 일으키면 어쩔?' 

이라는 걱정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선조는 생각했습니다. ‘ ‘다음 왕은 무조건 적자(嫡子-왕비가 낳은 아들)로!!’  하지만 현실은 줄줄이 후궁에게서만 아들이ㅋ...  그러던 도중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전쟁 중에 왕이 죽으면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아야겠죠? 근데 선조는 적자에 대한 미련 때문에 평양으로 도망갈 때 까지 세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등신...) 평양에 이르러서야 신하들의 갈굼 간청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광해군을 세자로 삼지요.  

    광해군은 열심히 일했어요. 임진왜란 중에 목숨 걸고 임금 역할을 한 사람은 광해군이였지요.  왜군이 평양을 넘어서 진격하고 있는데 남쪽으로 내려가서 전쟁자금을 모으고, 군사를 모집해 전투를 지휘하고, 관료들을 소집하고, 선조는 뭐했냐고요? 선조는 이때 의주에서 대기 타다가 요동으로 도망갈 준비 중 이었긔.

    이렇게 목숨 걸고 전쟁 수습을 했으니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세자 자리는 확실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근데....

<아빠인 선조가 뒷통수 작ㅋ렬ㅋ>

    1606년 인목왕후(후에 인목대비)에게서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납니다.  선조는 눈이 뒤집혀요, 적자적자적자적자.....  꿈에도 그리던 왕비의 아들, 적자가 요기잉네?ㅋ  안 그래도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도 그렇고 전후 수습도 그렇고, 일을 너무 잘해서 자기의 왕위가 위협 받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잘해도 지랄이야 애비가 등신이니 아들이 고생...  

     선조는 30줄에 접어든 세자 광해군 대신 두 살짜리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을 생각을 합니다. 영의정과 의논도 거의 끝났었구요. 광해군은 눈이 캄캄해집니다. 근데 (다행스럽게도) 선조가 갑자기 죽어버려서 그런 개막장은 일어나지 않음.

    하지만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선조가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신하들이 광해군의 왕위를 흔들려고 자꾸 시도를 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초조합니다. 이러다가 인목대비랑 신하 몇몇이 짜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내세워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ㅈ되는 거에요.  그래서 9살 짜리 동생을 강화도로 귀양보낸 후 죽이고, 계모는 냉골에다가 유폐시킴(...)

    이런 일들을 겪다보니 광해군은 자꾸 정통성 문제에 매달리게 됩니다. ‘왕기(王氣)’가 서려있다 라고 소문이 나는 곳에는 유달리 집착을 하게 됐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풍수지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이곳 저곳에 궁궐을 짓게 됩니다.  자수궁의 경우 원래 후궁들을 두는 별궁으로 쓰던 곳인데, 왕기가 서려있다는 말을 듣고 보수, 증축합니다. 경덕궁(경희궁)의 경우 왕족인 정원군의 집이었는데,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흐른다' 라는 말을 듣고서는 뺏아서 경덕궁을 짓습니다. 인경궁 또한 ‘인왕산 자락에 왕기가 있다' 라는 말을 듣고 창덕궁, 창경궁에 버금가는 크기로 엄청나게 공을 들여 짓지요. 

    나중에 정원군의 아들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인조입니다. 경덕궁 자리에 왕기가 서려있던건 사실일지도?[각주:5]


...... 망했어...  

    실은 '조선의 궁궐들 5궁'은 3부작이 아니라 4부작입니다!!! 허허허허 하편이 끝이 아니라 최종편이 남아있긔!!!☆(...)  분량조절 대실패. ㅠㅠㅠ 죽여주시옵소서... 다음편에서 만나요ㅠㅠㅠ


세줄요약

1.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다 태워먹음

2. 근데 백성이 태운건 아니고 왜군이 불싸지름

3. 선조가 찌질해서 광해군이 궁궐을 막 지어댐(응?)

서울의 5궁 시리즈.
건축에 관한 무언가4. 서울의 궁궐들 5궁 (上)

건축에 관한 무언가5. 서울의 궁궐들 5궁 (中)


참고문헌


조선왕조 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1. 명종은 중종의 아들 중 막내입니다. [본문으로]
  2. 근데 눈물까지 흘리면서 불태우는 건 뭐람... ‘가질 수 없다면 부셔버리겠어!?’ [본문으로]
  3. 성북구 정릉동 아님. 당시 정릉동은 중구 정동일대 [본문으로]
  4. 임진왜란 이전, 170만결에 이르던 농지가 임진왜란 이후 54만결로 감소합니다. 1/3토막이 남 [본문으로]
  5. 나중에 경종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르는 연잉군(영조)도 정통성 문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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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te verde입니다. 제가 요즘 게을러터져서 정말 글 쓰기가 힘드네요(...)

    저의 교양을 뽐내기 위해서 시작된 조선의 5궁. 하 편을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하려고 했는데 분량조절 실패로 이번 편은 중으로 갑니다. 다음편에 마무리할게요. 분량조절에 실패하는 이말년작가가 떠오르면서 이해가 가네요 ㅠㅠㅠㅠ  근데 5궁사는 제가 쓰면서도 정말 재미가 없는듯. 다음부턴 그냥 어그로 끄는 저질글이나 쓰려구요. 

1.조선 전기의 5궁

<수선전도 김정호作 1840년>

    저번 시간에 조선의 5궁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이라고 것을 기억하심미까. 기억 못하시더라도 한국의 현대 교양인이면 대충 알아두세요. (교양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런데 이 5궁이 모두 같이 있던 시기는 역사상 별로 없습니다.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춘 채로 5궁이 모두 존재했던 적은 고종 이후 40년 정도...?[각주:1]

Q. '구라치지마. 어디서 약을팔아'

A. '아...아닙니다 ㅠㅠㅠ 뻥 아니라구요'

     그러면 한번 쭊쭊쭊 살펴보세요, 뻥인지 아닌지 ㅠ.

2. 조선 건국초기 (태조~ 세조까지)

14세기

<조선의 아빠. 태조 이성계>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새 나라를 세웁니다. 근데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그대로 ‘고려’로 하고 수도도 개경으로 삼았지요. 그런데 왕씨 고려출신의 귀족들이 떽떽(응..? 떽떽?////) 거려서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한양을 새 수도로 정하고, 왕궁터를 골라 1394년 12월 착공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10개월 뒤 1395년 9월에 경복궁이 1차 개관을 합니다. (1395년 경북궁 준공) 1차 개관이라고 쓴 이유는 창건 당시 경복궁의 전각은 390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조 시절부터 꾸준히 증축을 거듭해 임진왜란 이전에는 수 천 칸에 이르게 되지요.)


15세기

    태조-정종-태종, 즉 세종 이전까지 이 세 왕들은 한양과 개경을 자꾸 스위칭하면서 수도로 사용했습니다. 천도할 때마다 짐싸느라 등골빠졌을 신하들이 너무 불쌍하네요... 먼저 정종이 1398년 즉위하면서 개경으로 다시 환도합니다. 덕분에 경복궁은 근정전에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을 정도로 황량해짐. ㄱ-.... [각주:2] 

    이후, 형인 정종한테서 왕위를 물려받는 태종이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를 합니다.  그런데 태종은 경복궁으로 환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1398년 ‘1차 왕자의 난'때 자신이 직접 동생들과 신하들을 쳐 죽인 곳이 경복궁이거든요. 지가 칼부림해서 피뿌린 곳에서 살면 찝찝하겠어요? 안 찝찝하겠어요?  그래서 1404년에 미리 신하를 보내서 이궁을 짓게 하고 한양으로 옮깁니다. 이 이궁이 창덕궁이지요. (1405년 창덕궁 준공)

    경복궁이 찝찝해서 창덕궁 짓고 살기는 하지만, 경복궁에도 꾸준히 건물을 지어올립니다. 월세로 경복궁 빌려줄 것도 아니고, 뭐하러 꾸역꾸역 건물 채워넣었는지는 모르지만... -실은 아들한테 물려주려고 그랬지요♡ 상속 재테크 쩌는 태종님- 당시 황량했던 한양성을 생각하면 궁궐이라도 지어서 채워나야 간지가 나고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들인 세종한테 양위를 합니다.(1418년, 이 해 2월 태종은 미리 경복궁으로 이사를 옵니다.) 세종은 근정전에서 즉위를 하고 그곳에서 사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 해 9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아빠인 태종을 위해 새로 지은 수강궁(현재의 창경궁)옆에서 아빠랑 같이 살고 싶어서염 뿌우- ‘충녕이의 막내근성'  아버지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수강궁-창경궁의 전신- 1418년 준공) 하지만 상왕 태종은 수강궁에만 살지 않고, 나중에 연화방 신궁(연화방이란 종로1동, 서초2동 과 같은 구역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종묘 근처임) 을 또 지어서 나중에 거기서 임종을 맞이하지요.

     태종이 사망한 후, 세종은 경복궁으로 다시 거처를 옮기고 국사를 살핍니다. 그리고 세종 이후 단종까지 조선 정치의 주 무대는 경복궁이 되지요. 세종 때가 되서야 경복궁에서 임금이 제대로 거주했기 때문에, 세종시절에 많은 전각과 회랑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근데 단종이 숙부인 세조한테 왕위를 뜯기죠. 세조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단종한테 양위 받은 후 근정전으로 이동해서 바로 즉위식을 거행합니다. (참고로 경회루와 근정전의 거리는 보도 1분...) 이후 단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저 멀리 강원도 영월까지 쫓겨갔다가 사약먹고 사망 ㅠㅠㅠ. 하지만 세조는 경복궁에서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런데 죄의식 때문인지 노년에는 각종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수강궁(창경궁)에서 사망.  아들 예종은 수강궁에서 대충 아빠인 세조한테 양위받고 비실비실 살다가 2년 뒤에 경복궁에서 죽습니다.

3. 미소년 연산군찡의 파라다이스

     그리고 우리 마초임금 성종 즉위. (1469년) 성종은 연산군의 아빠죠. 훌륭한 임금이지만 사치스러운거 꽤나 좋아했던 임금입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경복궁 경회루를 청자기와로 덮으려다가, 신하들의 강력 반발로 포기하고 경회루 기둥에 용조각만 새겼슴(응?) 

    성종은 즉위 이후에 왕실의 여러 할머니, 아줌마들 어른들을 모시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러나 국가의 주요행사는 꼬박꼬박 경복궁에서 실시했고, 나중에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지요. 성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세 명의 할머니들 왕실 어른들을 수강궁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1483년 수강궁을 증축하면서 이름을 창경궁으로 고쳐 짓습니다. (1483년 수강궁이 창경궁으로 개칭) 

    이후 조선 환락의 아이콘 연산군이 등극합니다. 연산군의 묘사는 허리 가늘고, 키 크고, 피부 하얗고... 여리여리 미소년이네요 핡...[각주:3] [각주:4] 

<왕의남자에서 연산군이었던 정진영씨. 잘생기셨지만... 아.. 아냐 이런 얼굴이 아니라구!! ㅠㅠㅠ>


<이런 용안이셨겠지....♡>

     연산군은 경복궁을 자신의 즐거운 할렘으로 만드는데 주저함이 없었죠. 특히 경회루에서 사치를 즐겼는데요, 잠시 옆길로 새서 연산군 당시 경회루의 모습을 한 번 읊어보겠습니다.

     경회루 위에서 보이는 위치에 인공섬인 만세산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위에 위에 봉래, 벽운궁, 일궁, 월궁 등의 신선 세계를 표현한 여러 건물을 지어 각종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을 하죠. 그 안에서는 흥청(기생)[각주:5]들이 음악을 연주하게 해, BGM을 깔도록 했습니다.  경회루의 못 위에는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고 등을 띄웁니다. 그리고 화려한 용주(龍舟)를  연못에 띄워서 그 사이를 오가며 뱃놀이를 즐기구요.  

     동시에 경회루 주변에다가는 기러기와 같은 각종 새들을 길러 새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도록합니다.각종 물자절약을 하면서도 새 먹이는 줄이지 말라 지시를 내렸지요. [각주:6]

    경회루 아래 층에서는 전국에서 엄선한 천과흥청(天科興靑 - 최고 등급의 기생)들과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합니다. 위층인 경회루 본전에는 당연히 비단과 구슬장식으로 도배를 해 놓았고, 연극을 할 수 있는 무대인 채봉이 있으며, 연산군은 즐거운 Party time. 


아아아... 이것이야 말로 임금만이 할 수 있는 돈 지랄... 부럽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후, 경복궁은 경회루와 강녕전 등에 있던 화려한 설치물들이 모두 철거되고 다시 성종 때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4. 연산군 이후. 효자돋는 인종 

    중종 38년 (1543년)에 경복궁에 큰 불이 나서 동궁(세자궁)이 다 탑니다. 이 화재는 중종의 부인인 문정왕후(The bitch)가 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당시 세자였던 인종은 문정왕후의 소생이 아닌 전 부인 장경왕후 윤씨(사망했습니다.)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어린 아들(훗날 명종)이 왕위를 차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세자(인종)를 없애기 위해서 세자궁에 불을 지른 것이지요. 근데 이 인종이 엄청난 효자ㄱ-..... 

    인종은 생모인 장경왕후 윤씨가 죽은 후, 새 왕비가 된 문정왕후를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셨습니다. 세자궁 화재 당시 문정왕후가 이미 자신을 죽이기 위해 꾸민 일인 것을 알고는 ‘어머니가 나를 이토록 싫어하시니 자식으로서 죽는게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 라는 심정으로 불난 동궁에서 타죽으려고 그냥 버팀ㅠㅠㅠㅠ 그런데 그 때, 밖에서 자신을 찾는 아버지(중종)의 목소리를 듣고는 ‘이렇게 죽으면 아버지께 불효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뛰어나가 목숨을 건졌다고 전해지지요.  

    암튼 그렇게 경복궁의 세자궁은 한 번 홀라당 탑니다. 이후 중종 사망후 인종이 즉위합니다만, 계모인 문정왕후의 등쌀에 못이겨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고(문정왕후는 참 독한년인듯...), 문정왕후의 친자인 명종이 즉위합니다. 근데 명종 8년(1553년) 경복궁에 대화재가 발생해 근정전, 경회루만을 남기고 주요 침전, 업무공간들이 다 타립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조선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국가 (뻥 아님)

 

   거의 전소되버린 경복궁을 1년 만인 1554년에 대부분 복구합니다. 19세기 후반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하고서 나라 뿌리가 흔들렸던거 생각하면 16세기 임진왜란 전 조선은 정말 잘 살았던 나라 같다능... 아무튼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양에는 5궁 중에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존재하는 상태였습니다. 고로 경희궁과 경운궁(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진 궁궐이죠.

 헉헉....... 조선의 5궁 중편 여기서 마칩니다. 잘 읽었으면 뷰온 좀 눌러주시긔

세줄요약

1. 창경궁은 원래 실버타운(...)

2. 연산군의 주색잡기, 환락의 페스티발 장소는 경복궁 경회루였슴.

3.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만 있었슴

전편 건축에 관한 무언가4. 서울의 궁궐들 5궁 (上)  읽고 싶지 않으십니까. 않으면 말고, 쳇.


참고문헌


조선왕조 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1. 1592년 임진왜란때 타버린 경복궁은 1872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기까지 약 300년 간 빈 터로 남아있었습니다. [본문으로]
  2. 정종 1권 1년 2월 23일 (갑자) 1번째기사 / 까치가 근정전 망새에 집을 지다 정종 1권 1년 3월 4일 (을해) 1번째기사 / 까치가 근정전 취두에 깃들다 정종 2권 1년 8월 8일 (을사) 1번째기사 / 부엉이가 신도의 근정전과 태묘 옆에서 울다 정종 2권 1년 8월 10일 (정미) 1번째기사 / 산올빼미가 신도의 근정전 위에서 울다 정종 2권 1년 8월 15일 (임자) 1번째기사 / 부엉이가 솔개에 쫓겨 근정전 위에 와서 모이자 중들을 모아서 기양하다 [본문으로]
  3. : 이덕형의 문집 ‘죽창한화'에는 연산군을 본 노인의 증언이 있습니다. ‘연산군은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었으며, 수염은 적고, 눈이 충혈되어 붉은기가 돌았다.’ [본문으로]
  4. 연산 52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2월 7일(기해) 의금부(義禁府)의 종 팽손(彭孫)이 고하기를, “전라도 부안현(扶安縣) 기병(騎兵) 최중손(崔仲孫)의 이웃집 사람 김수명(金守明)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번 번(番)들러 올라왔을 때 인정전(仁政殿)에서 시위(侍衛)하며, 위에서 명(明)나라 사신 접견하는 예절을 보니, 명나라 사신은 우뚝 서서 잠시 읍만 하고 주상께서는 몸을 굽혀 예하는데, 허리와 몸이 매우 가늘어 그다지 웅장하고 위대하지 못하더라. [본문으로]
  5. 흥청망청의 유래가 연산군의 엄선한 기생들을 이르는 말인 '흥청'입니다. [본문으로]
  6. 연산 33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4월 18일(정미) 장원서 제조(掌苑署提調) 풍원위(豊原尉) 임숭재(任崇載)가 아뢰기를, “경회루 못에 기르던 야안(野雁)을 일찍이 모화관 못으로 옮겨서 기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요곡(料穀)을 주어야 하나, 지금 모든 물품을 절감할 때에 아울러 절감하여 야안들이 날로 야위어져서 번식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감히 취품(取稟)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마땅히 구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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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te verde입니다.

    제가 원래 좀 뜬금없이 포스팅 하는 건 이미 다들 아실테고... 이번에는 서울의 5궁에 관해서 이야기 할까 합니다. 다른 분들의 글을 읽다보니 제 글이 교양이 없어보여서 고상한 궁궐 좀 다뤄보려구요. 조선 왕조의 계획도시 서울. 하지만 제 글은 계획이 없죠(...) 서울의 5궁이란 어디일까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이죠.  모두 조선시대의 궁궐입니다. 

1. 예로부터 한강은 한반도의 잇플레이스(it place)

<어머! 이 땅은! 질러야해~>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훌륭한 환경을 제공하는 서울은 고대시대부터 이미 한반도인들의 인기 거주지역이었습니다. 수량이 풍부하고, 평야가 넓어서 농사짓기 딱 좋고, 큰 조수의 차이를 이용해 한강 위아래로 수운도 가능한데다, 넓은 강을 통해서 바다로 나가기도 용이하고. 얼마나 좋아요 얼마나. 세계 4대 문명들이 괜히 큰 강을 끼고 생긴게 아니잖아요? 

    백제가 한강을 뺏기고서 부여에 자리잡았던 이유 또한 한강유역과 비슷하기 때문이었죠,  농사짓기 괜찮고, 배 타고 바다로 나가기 좋고. (웅진지역은 쫒겨가면서 수비를 위해 자리잡은 임시수도였죠.) 이렇게 좋은 한강이다보니, 삼국시절부터 한강 유역은 3국의 박터지는 부동산 전쟁  영토 분쟁 지역었습니다.

    아무튼 시간이 흐르고 흘러, 고려시대. 미신 잘 믿는 고려 현종은 ‘삼한회토기’라는 책의 숭구리당당에 혹해서 지금의 서울 자리에 남경을 설치합니다.....만 얼마 안 가서 폐지되지요.[각주:1] 그러나 서울은 후대에도 꾸준히 관심을 받으며, 남경설치, 폐지, 남경설치, 폐지 (고만 좀 해 미친놈들아...) 를 거듭하다 고려 후기에 남경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 성곽을 쌓고 궁실을 축조하여 천도를 하니 1394년 서울이 정식 수도가 됩니다. 

- 부록. '그래도 잇 플레이스라는건 무리수 같은데...?'

'한강 지역이 잇플레이스라니 무슨 헛소리냐'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자, 아래 지도를 보세요.

<부칸!>

<나뫈! 한반도 동쪽의 평야들, 네이버 지도 사랑해요(다음 지도는 후지게 캡쳐됨ㅗㅗ)>

    전통적인 사회에서 대단위 인구 거주에 필요한 평야지대와 풍부한 수량, 그리고 한반도 내에서의 지리적 위치로 수도 후보를 골라볼까요.

(1) 신의주 일대 : 황금평이라는 비옥한 삼각주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중국과 접경지대죠. 탈락

(2)  평안 남,북도 경계 : 평야가 널찍하고 좋아보이나, 이미 저 지역까지 올라가면 상당히 춥습니다. 바로 위가 개마고원이죠. 탈락.

(3) 대동강 일대 : 약간 북쪽에 치우치긴 했지만 큰 강이 내륙까지 길게 들어오면서 평야도 널찍하고 좋죠. 평양입니다. 덕분에 현재 북한의 수도 ㄱ-...

(4) 개성 일대 : 예성강을 통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점을 제외하곤 대규모 인구가 거주하기엔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강 줄기도 길지 않고, 평야도 적고, 왕건의 기반이 송악(개성)이었기 때문에 수도가 되었던 지역이죠. 탈락.

(5) 한강 일대 : 큰 강이 내륙까지 길게 들어오면서 너른 평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반도의 정 가운데지요. 여기가 바로 서울입니다. 

(6) 평택 일대 : 평야는 널찍하고 좋지만 바다가 너무 땅 깊숙히까지 들어옵니다. 지금이야 제방을 쌓아 담수화 되었지만, 옛날에는 소금기있는 바닷물 때문에 농사짓기가 곤란했죠. 탈락

(7) 호남 평야 : 군산, 김제, 익산 등을 아우르는 지역입니다. 물 많고 땅 넓어 예로부터 곡창지대로 유명했지요.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 부여가 여기 코앞입니다. 하지만 남쪽으로 좀 치우쳤습니다. 탈락.

(8) 나주 평아 : 물 많고 땅 넓어 좋지만, 지나치게 남쪽이죠. 탈락.

    결국 고르고 고르면 대동강 일대(평양)와 한강 일대(서울)가 최고의 수도 후보지입니다. 결국 이성계와 정도전은 수도로 삼기에 제일 좋은 땅을 고른겁니다.

2. 5궁의 위치


<수선전도 김정호 作 1840년>

    지도를 보세요 뙇. (이래서 왕조국가는 글러먹었어, 수도의 ¼ 이 궁궐이야...) 

1. 지도 상단부에서 왼쪽에 보이는 凸(죄송합니다...) 모양이 경복궁 

2.3. 상단부 우측에 넓게 표시되어 있는 곳이 창경궁 + 창덕궁 + 종묘 

4. 서쪽 끝에 위치한 것인 경희궁 

5. 그리고 그 바로 밑에 있는 것이 경운궁(덕수궁) 입니다

    이 중에서 경복궁과 경희궁은 풍수지리사상을 따라 지어진 궁궐이고 창덕궁, 창경궁은 은퇴한 상왕, 대비들의 실버타운(...) 으로 지어졌으며, 경운궁은 임진왜란때 정식 궁궐들이 다 타서 임시로 사용하다가 궁궐이 된 곳입니다. 

3. 옛날 지도엔 궁궐이 넓은데 지금은 왜 이따위에요

허허허 오해입니다. 아래를 참조하시지요. 

(1) 경복궁 

원 면적 

현 면적 

64만 3206㎡ (19만 4911평) 

or 

59만 7393㎡ (18만 1028평)   

 34만 3888㎡ (10만 4208평)

    일제시대인 1911년 12월 20일 경성부에서 지정한 광화문 1번지의 대지면적이 19만 4911평이었습니다. 광복 후 세종로 1번지로 변경되면서 6만 9871평으로 조정되었는데요, 광화문 1번지가 경복궁의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청와대 자리는 본디 경복궁 후원 권역이었지요. 따라서 경복궁의 원 면적을 유추하는 방법에는 (1) 광화문 1번지의 부지의 면적 : 64만 3206㎡  (19만 4911평) (2) 현재 경복궁 면적 + 청와대 면적 =  59만 7393㎡(18만 1028평)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경복궁은 광복 당시 원래 건물 중 10%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자세한 이야긴 나중에 경복궁에 관해 따로 포스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2) 창덕궁

원 면적 

현 면적 

 43만 4877㎡ (13만 1780평)

 43만 4877㎡ (13만 1780평)

    창덕궁도 내부 건물은 많이 훼손, 철거 되었으나, 면적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조선의 궁궐 중 그나마 훼손을 덜 겪은 궁궐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었지요. 창덕궁의 훼손 정도가 덜했던 이유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1926년 사망하기 전까지 거주했던 궁궐이기 때문입니다. 

    창덕궁 다음으로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 궁궐은 고종이 1919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거주한 곳인 경운궁(덕수궁)인 것을 보면, 조선왕조의 왕들이 끝까지 살았던 궁궐들만 일부 건물이나마 멀쩡하게 전해 내려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창경궁

원 면적 

현 면적 

 21만 8148㎡ (6만 6105평)

 21만 8148㎡ (6만 6105평)

    창경궁 역시 면적에는 큰 변화가 없었기에 그대로 기재합니다. 단, 건물들은 일제시대에 대부분 헐려 나가고 유원지로 조성되었다가 1980년대가 되고서 일부 복원되었습니다.

(4) 경희궁

원 면적 

현 면적 

약 24만㎡ (약 7만 2800평) 

10만 1221㎡ (3만 673평)

    경희궁은 조선왕조 궁궐 중 가장 수난을 많이 겪은 궁궐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었냐면, 광복당시 경희궁은 ‘없었'어요. 경희궁 부지에 경희궁 건물이 한 채도 남아있지 않았었슴ㅋ  다른 궁궐들은 그나마 정전 (궁궐에서 제일 큰 건물, 왜 그 모두들 사극 보면 임금이 즉위식하거나 큰 행사 치르는 곳 있잖아요. 경복궁 근정전같은) 이라도 남아있던 것에 반해,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팔려나가서 절간으로 쓰이고 있었고, 정문인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ㅠㅠㅠㅠ 

    1922년 전매국 관사부지로 2만 5500평이 떨어져 나가고, 1927년, 1928년 도로에 일부 편입 후  4만 1319평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2만 5500평 + 4만 1319평 + 도로 편입부지 (약  5천 평)의 합으로 약 7만 2800평이 옛 부지라고 하니 약 24만㎡ 가 되는군요. 

(5) 경운궁

원 면적 

현 면적 

13만 4065㎡ (4만 626평)

6만 3069㎡ (1만 9111평)

    실은 5궁 중에서 제일 작았던 궁궐이 경운궁(덕수궁)입니다. 4만 평 정도였지요. 그런데 이것도 다 헐리고 현재 남은 것은 기존의 절반도 안되는 1만 9천여 평입니다. 하지만 광복 당시 기준으로 삼자면 창덕궁 다음으로 궁중 건물이 많이 남아있던 궁궐입니다. 일본이 착해서 건물을 많이 남긴 것은 아니고, 고종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인 덕분입니다. 


헉헉... 자 보세요. 5궁의 면적을 모두 합하면 

약 162만 4483㎡  (약 49만 2267평)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합 계

59만 7393㎡  

43만 4877㎡  

21만 8148㎡  

약 24만㎡  

13만 4065㎡   

약 162만 4483㎡  

<남자는 핫핑크>

이 됩니다.  현재 총 면적은 어떨까요 

약 105만 9982㎡ (약 32만 1206평)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합 계

34만 3888 

43만 4877㎡  

21만 8148㎡  

10만 1221㎡

6만3069㎡ 

약 105만 9982㎡

     그래도 32만평!!! 하지만 원래 규모인 50만평과 비교하면 거의 60% 수준이죠. 게다가 그 땅 위에 있던 건물들이 일제시대에 싹 다 밀려나가서 시망... 네, 원래 우리네 선조들은 분수에 안 맞게 오라지게 큰 장대한 규모의 궁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제 시대를 겪으면서 대부분이 훼손된 것이죠. 오랜만에 산수놀이를 했더니 현기증이 나네요. 

4. 조잘조잘

    원래 서울 5궁 포스팅은 5궁의 유기적인 역사를 서술하려고 작성한 글인데... 대략적으로 면적 소개부터 하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지금 더 쓰기가 뭣하네요 =_=... 고로 5궁 특집을 한 편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줄요약

1. 예로부터 서울은 잇플레이스(...)

2. 조선 시대엔 한양 면적의 25%가 궁궐

3. 원래 5궁 면적은 50만평인데 일제 시대 때 다 박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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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포스팅은 건축에 관한 무언가3. 영등포 백화점 전쟁 롯데 vs 신세계였습니다. 관심이 가신다면 클릭해 주세요~

  1. 고려시대에는 중경인 개경외에도 서경(평양) 동경(경주)가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