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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y Manifesto 2. 퀴어는 어떻게 법을 탐지하는가 (1)에서 이어집니다.




2004스42 결정(과 관련 판례)의 어떤 진보성



성소수자 성정치의 입장이 아닌 법리적으로 볼 때도 2004스42 결정은 엄밀하고 우수하며 깔끔하지 못하다. 당초의 호적법이, 그리고 가족관계등록법이 예정한 호적/등록부 정정의 원인에 포함되지 않은 성전환 수술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포섭하기 위해, 법적으로 근거가 없는 새로운 제도를 하나 만들어버린 것이다. 현대 법치주의 국가에서 이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는 입법권을 사법이 재량으로 침투한 현상으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소위 ‘판례 입법’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이러한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사실 이 사건이다.


기왕의 호적법과,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개정된 가족관계등록법은 두 가지 형태의 호적 수정방법을 예정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원시적인 오류를 바로잡는 정정이며(가족관계등록법 제18조), 후발적으로 행정구역 등의 명칭이 변경되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생긴 경우를 바로잡는 변경 경정이다(동법 제19조). 그런데 이 중 후자, 후발적인 변경에 따른 경정은 법에 그 사유가 행정구역 명칭의 변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성전환자의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대법원의 관점은, 전 항에서 보았듯이 출생시에는 생물학적 성을 타고 났으나 후발적으로 정신적, 심리학적, 사회적인 요인으로 인해 성별이 바뀐다는 쪽에 가깝다. 그러므로 후발적인 변경에 따른 경정이 이 사례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나, 법조문이 후발적 변경 경정에 대해 그 요인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적용하는 것은 유추해석의 범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대법원은 요인이 특별히 법문에 규정되지 않은 원시적 오류를 바로잡는 정정(제18조)을 유추해석하여 적용하고 있다. 후발적인 섹슈얼리티의 변경으로 보면서도 호적 정정 과정은 원시적 오류를 바로잡는 과정을 택하는 논리적 모순이 있는 셈이다.


2004스42 결정이 대법관 전원이 함께 판단하는 전원합의체로 심의되었고, 당시 대법원 분위기상 드물었던 반대의견과 별개의견이 존재하는 치열한 결정례로 남은 것 또한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대법원 반대의견은 그러므로 법적으로 성전환자가 반대의 성으로 호적을 정정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손지열, 박재윤 대법관의 논리는 관련 조문을 아무리 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형태의 변경은 예정된 바 없었으므로, 행복추구권 등의 헌법적 권리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제도를 법관이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입법자의 정책적 디자인이 필요한 사안에 법관이 개입하는 건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반대의견의 법리적으로 옳아 보이는 지적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독수리 오형제’의 일원이자, 이 사건의 주심 대법관이기도 하였던 김지형 대법관은 이것이 소위 말하는 ‘헌법합치적 해석’의 일환이라는 주장까지도 펴고 있지만, 제도가 예정한 바가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할 때 그 중 헌법에 맞는 것을 골라야 한다는 헌법합치적 해석의 정의상 이는 적절하지 않은 논리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대법원의 다수의견은 별다른 논거 없이 법관에 의한 입법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대법원의 과감한 판례 입법은, 주로 가치의 문제인 가족법의 영역에서, 사실상 입법적으로 이 부분이 근시일 내에 개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인식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와 사법구조가 비슷한 독일과 일본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독일의 경우 대한민국 대법원 반대의견과 같은 판결을 내린 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가 ‘윽박질러’ 다수의견과 같은 방향으로 판례를 변경토록 지시한 바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 입법은 그러한 개선의 가능성이 희박하였음을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해 내었다. 2006년 6월 이 사건 결정이 최초로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 신청을 허용하였는데, 그 전인 2005년 2월 이미 헌법재판소에 의해 호적법은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 있었다. 이에 대한 대체입법은 이 사건 결정이 있은 뒤 2008년에 시행된 가족관계등록법이지만, 가족관계등록법에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대한 입법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입법 과정에서 성별정정 신청이 반영될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17대 국회에서 노회찬 의원이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하였으나 이 또한 통과되지 않았고, 현재 19대 국회가 개원하였지만 여전히 관련 입법은 요원하여 보인다.




이는 관련하여 보아야 할 다른 중요한 판례가 있다. 바로 위의 결정에서 별 논란 없이 받아들여진 부분, 즉 ‘사람의 성은 성염색체의 구성을 기본적인 요소로 하여 내부 생식기와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의 외관은 물론이고 심리적•정신적인 성과 이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나 태도 등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한 최초의 판결인 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791 판결이다.




성전환 수술을 받아 여성으로 살고 있는 50대의 트랜스젠더가 강간을 당하였다. 그러나 형법은 강간죄의 대상을 ‘부녀’로 한정하며, 이는 호적상 여성으로 한정되어 해석되어 왔다. 만일 이 트랜스젠더가 남성이라면 이는 강간죄가 아닌 강제추행으로 처벌해야 한다. 형량도 낮아지고, 피해자가 납득할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피고인이 저지른 범죄의 인식과 다르다.


이 상황에서 대법원은 위와 같은 논리로 트랜스젠더 여성을 ‘부녀’의 범위에 포함하는 해석을 시행하였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서 트랜스젠더의 성별이 변경되는 것은 사실상 호적 내지는 가족관계등록부상의 변경절차가 완료되었을 때가 아니라, 성전환 수술을 받아 외성기의 변경이 일어난 시점인 것이다.[각주:1]


이 또한 사실 형법에서 ‘강간’을 부녀를 대상으로 한 것을 입법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해당 입법이 일어날 가능성은, 96년에는 더더욱 요원하였다. 지금까지도 형법 개정에 있어 강간죄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 구성요건에서 부녀를 빼야 한다는 주장은 강력하지만 관철될지 여부는 여전히 안개 속인 이유이다.




대법원이 유독 가족법 영역에서 강력하게 취하곤 하는 사법적극주의, 혹은 판례 입법은 흥미롭게도 국민을 대리하는 입법가들의 수단보다도 더욱 즉각적인 보호를 제공한다. 비록 판결 내부를 관통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법원의 전제는 여전히 한심하기 그지 없을지라도, 대법원이 “그래도 이건 정말 심하지 않냐”고 느끼는, 혹은 변호인단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사안에서 보호에 망설임이 없다는 건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일정한 정도의 진보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진보성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만, 대한민국 퀴어 신에는 아직까지 ‘이것은 저것보다 낫다’고, 심지어 산술적으로 나누어 말할 만한, 기본적인 정의와 진보의 문제가 많이도 산적하여 있기 때문에, 이런 게으른 서술이 용납될 여지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퀴어와 법> 다시 쓰기: ‘법만능주의’ 혹은, 유니콘의 뿔을 찾아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이 글에서는 굳이 서술하지 않았던 지난 겨울의 차별금지법/학생인권조례의 국면에서 핵심은 입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법이 우리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어떤 신성시되는 전제가 목전에 닿았기에 차라리 축제에 가까웠다. 한겨울에 교육청을 점거하는 등의 고생이 있었지만 이 폭발력은 그런 인식 하에서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허나 선언적 입법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차별금지법이 담고 있는 내용은 결국 헌법에 이미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헌법 문언에 의해 합리적으로 해석해낼 수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을 차별금지법이라는 별도의 법안으로 담아낸다는 것은, 물론 도움이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성정체성과 성지향이 명시된 법문이 존재하는 것과 없는 것이 가시적인 차이를 보여줄 영역은 생각보다 꽤 많다.
유치하게도, 그렇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순 없기에 차별금지법은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언적인 입법은 상당히 영미적인 발상으로 보인다. 헌법과 권리장전이 없는 영국이라면야, 인권법(Human Rights Act)이라는 발상이 유효하고 필수적일 것이다.[각주:2] 헌법에 있는 내용을 사안별로 입법하여 관철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는 미국의 사례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미국의회의 유능한 입법과 준법감시기능은 익히 알려진 바 대로다.



기왕에 살펴본 것과 같이 대한민국의 법질서는 입법이 쉽지도 않고, 입법이 된다고 하여 그것이 입법자의 의도가 관철된다는 걸 뜻하는 것도 아니며, 그 입법자의 의도가 완벽하거나 납득할 만큼 정묘하지도 않기에 여러 가지가 중간에 매개를 시도한다. 적극적인 사법이 그 중 하나이며, 그 외에도 의원 한 명 한 명의 재량이 상당히 큰 지경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국회를 구성하면 성소수자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의원이 꼭 한 명 정도는 있다 수준도 아직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계와의 접점이 이토록 특별한 의식, 축제로만 다루어진 것은 결국 퀴어 신의 실책이며 무지일 것이다. 마치 명예훼손소송에 한 번 당해본 진중권이 법 이야기만 나오면 깨갱 하며 법조문과 판례, 실무 경향, 해석 등의 말을 경전처럼 신성시하는 것처럼. 법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민국가의 가장 선진화된 예속 방법이었으며, 이를 가장 선구적으로 관철한 것이 수권법을 통한 나치스의 찬탈이었다.



퀴어 신은 법계에 포착되지 않았기에, 그리고 법이란 것이 언제나 그렇듯,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법은 특별한 이벤트화 되었다. 역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법은 상수화 되어, 특별한 잘못이 없으면 그에 따라 세상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차별금지법이 입법되었다면 퀴어 신에서 이 현상은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너 그거, 차별금지법 위반이야. 포비아? 차별금지법 위반이라니까. 세상에, 벌칙조항 없는 선언적 입법에서 그 정도로 많은 것을 바라다니. 이미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너 그거 헌법 위반이야, 하고. 그리고 대사인적 효력이 제한된 헌법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던가?





여기서 성적 지향이 포함된 차별금지법의 원안 입법 시도가 좌절된 것을 ‘모순된 축복’이라 표현하는 것은 후진 미감의 학자가 쉽사리 택하고 마는 장엄하고자 하는 수사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후퇴였다. 하지만 모두 갈아 엎고 새로 시작할 것이 아닌 바에야, 후퇴가 남긴 잔해에서도 새로운 것을 건지고 얻어내야 한다. 내가 이 글에서 찾아내고자 했던 ‘잔해’는 바로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법만능주의와 그것이 남길 어떤 체념의 문제였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졸라 짱 센 법느님은, 유니콘의 뿔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이벤트적으로 한 번 만들어 두면 나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영구기관/마법이 아니고, 오히려 평소에 꾸준한 유지와 보수가 필요한 결함 많은 화석연료 전동차에 가깝다.

그러니 설령 법이 퀴어를 굽어 살피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찌 퀴어가 법을 탐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Manifesto”로


언제나 뜨거울 것만 같았던 차별금지법/학생인권조례 원안 추진 운동이 지금에 와서는 과거 어느 시점의 맥락으로 한정되어 박제되었고, 심지어 인터넷 상에서도 그 귀추가 어찌 되었는지 추적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자연 소멸한 지금에 이르러서야 말한다. 법을 대하는 퀴어/사회운동의 태도가 이래서는 안 된다. 이벤트성 행사는 폭발적이지만 단발적이며 거품처럼 허무하다. 그리고 그 경험은 퀴어 사회에 결국은 좋지 않은 집단적 경험을 남기게 된다. 한 때 형성되었던 법계와의 특이 교차점이 진정되고 나면, 결국 법계는 움직이지 않으며 격랑이 가라앉으면 다시 상관 없었던 별개의 세계로 돌아갈 뿐이라는 관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법은 유능함에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 법에 대한 특이적 관점은 드물게 법을 언급할 때 이를 만능의 무기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의 사례에서, 혹은 군형법 제92조의 위헌법률제청심판 사건에서 사법이 퀴어의 관점에서 사건을 심리하여 심지어 상처를 위무하는 역할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실제로 이는 법계의 역할일까?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적극적으로 사법과정에 개입하여 권익의식을 표현하고, 사법이 이따금씩 보이는 과감한 진보성을 적극 유도하는 것은 꽤 괜찮은 방법이다. 그리고 이 방법이 이미 시도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부족하지만, 우리 사회의 진보적 사법과정이 자리를 잡을수록 이 방법은 점점 더 과감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퀴어가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의 정정 방법을 법적으로 보장받는 사회가, 그러한 표기방법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보다 우월하다는 논변은 쉽사리 완성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법의 유능함을 말하고, 법을 탐지할 것을 꾸준히 주문하는 것은, 그나마 가장 남을 움직이는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렛대로 작용하는 법의 역할을 고려할 때, 그리고 아직도 부족한 퀴어적 사회지분을 고려할 때 퀴어의 자급자족 사회가 하부구조로 자리잡기란 여전히 요원하여 보인다. 아직도 호모포비아와의 대결이란 두려운 일이고, 남을 설득하고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일은 많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으뜸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 법이기에 이에 침묵하는 것은 어떤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고대 폴리스의 시민이 된 듯한 마음으로라도 법을 다루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 시절 법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럴 것이다. 각종 이야기와 권익과 권리와 의견이, 그리고 연대가 이루어지는 공론장에서 법을 탐지하는 감각은 필요하다.[각주:3]

법을 원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은 퀴어한 이 곳에서 법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일격을 매다 꽂는 과정은 더욱 자주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퀴어가 법을 탐지하는 데서 더 나아가, 법이 퀴어 이슈를 탐지하고, 그를 통해 사회가 퀴어를 탐지하는 과정을 촉진하기에.


  1. 이는, 어떻게 보면, 서류상 변경이 있는 시점을 성별이 변경된 시점으로 보는 관점보다는 훨씬 트랜스젠더-친화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법이 강간죄라는 영역에서는 그 사이의 사실상 여성인 상태 또한 보호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 없으므로. 그럼에도 수술 중심으로 트랜스젠더의 성별변경 시점을 판단하겠다는 외성기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어 각주로 뺀다. [본문으로]
  2. 실제 영국에서는 입법연도별로 꽤 여러 개의 인권법이 있으며, 이들을 통합하여 통일된 권리장전을 제정하려는 노력도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본문으로]
  3. 가령 강간죄의 보호 대상을 부녀에서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는 과정은 모욕적이기 그지 없는 군형법의 ‘계간’ 조항을 폐지하는 데 진일보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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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laimer

이번 글은 퀴어, 성소수자와 관련된 오래된 논의에 대한 배경을 일부 무시합니다. 현실 세계의 맥락에서 이번 글에 한정해 퀴어=성소수자, 그리고 이 개념은 게이인 저를 완벽히 포괄합니다. 별로라고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안 그래도 분량 오바.




무지는 경외의 근원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던 기독교도의 신은 – 실존한다면 – 이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무지는 한계를 베일 속에 가두고 권능은 넓게 펼쳐 혜량할 수 없게 한다. 언제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눈은 언제나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부른다. 그리고 이는 판옵티콘의 숨겨진 전제이기도 하다.


현대의 우리에게 법(法)과 같은 무지의 대상이 또 남아 있을까? 자연과학이 무지의 영역을 극소의 영역으로, 혹은 극대의 영역으로 한정하여 점차 줄여가는 동안 법은 자신들이 이해한 것을, 자신들만 이해하는 방식으로 울타리를 둘러쳤다. 다행이라면 법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굴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법 또한 결국은 군림하고자 한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재작년부터 지난해까지 이어진 차별금지법 제정 국면에서 퀴어 세상 또한 크게 요동쳤던 것은. 불가해한 괴물, 우리 머리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지배자, 그리고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지상 최강의 키보드 워리어 진중권의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는 ‘법’이라는 걸 길들일 필요성을, 세상의 일부로서, 퀴어들 또한 강하게 느꼈다는 반증이었을 테니까.




법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한다. 그러나 정작 퀴어와 법의 교차점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법의 감지는 그 역치가 꽤 높기에, 법에 포착되기 위해서는 퀴어가 충분히 가시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퀴어로서 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또한 생활을 영위하고, 그 생활은, 결국 법의 규율을 폭넓게 받는다. 나를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가 꾸준히 의식하는 과정은 자칫 잘못하면 병적일 수 있다.


대한민국 사법체계가 등장한 이래, 법이 포착한 퀴어 관련 이슈라면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생각난다. 우선, 서두에 언급한 차별금지법. 이는 입법의 영역으로, 어떻게 보면 퀴어 인권 운동의 관점에서는 고전적인 주제가 된다. 그리고, 남성 동성애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모멸감에 시달리게 되는 용어, ‘계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군형법 제92조. 헌법적 문제가 되어 왔다. 마지막으로, MTF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다루고 있는 가족법과 이와 관련된 형법적 문제다. 물론 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역시나 이 정도랄까. 검색을 통해 보아도 여기에 더할 수 있는 것은 인접한 페미니즘의 성폭력과 성적 자기결정권 논의, 그리고 HIV/AIDS의 기본권적 논의 정도이다.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QIS 일각에서 발간하는 자치언론 ‘퀴어 플라이’는 제10호에서 ‘퀴어와 법’을 기획의 일부로 다룬 바[각주:1] 있고, 해당 기획과 관련된 4개의 글 중에서 둘은 차별금지법과 인권조례, 나머지 둘은 군형법에 할애되었다. 굳이 그럴 당위성은 없는 것이지만, 나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대해 퀴어의 관점에서 말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드문 사례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뿐더러 이 사례 자체가 말해주는 바가 다른 두 개의 사례와는 다르면서도 심도 있기에.





사법은 퀴어 이슈를 얼마나 탐지하는가



섹슈얼리티의 형성에 관한 미셸 푸코의 설명으로 돌아가자면, 19세기 서구의 사법은 동성애적 행위를 규제하던 것에서 벗어나 동성애 관계와 해당 성향을 규제하기 시작한다. 입법의 차원에서 동성애자를 처벌하고 규제하는 법이 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법을 적용하고 시행하는 사법 차원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사형 등의 무거운 법정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상 적용되지 않는 죽은 법이었던 동성애 행위 처벌 법규가 강력한 실효성을 가지고 적용되는 사례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각주:2]. 아무튼 블룸즈베리 클럽이 존재했던 영국에서조차 20세기 중반 앨런 튜링의 비극을 막지 못하는 분위기에 이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20세기 초반의 서구 법질서를 일본 민사법을 통해 한 번, 그리고 해방 직후 해외법의 계수[각주:3]를 통해 또 한 번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던 대한민국 법질서는 변방의 것은 중앙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언어학의 어떤 법칙을 따르기라도 한 것인지, 여전히 20세기 초중반 서구 법질서의 모순을 많이도 배태하고 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모순이라면 역시나 혼인의 관념을 전통적인 남-녀의 가족적 결합으로 한정하여 규정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여전히 서구 사회에서도 법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는 마무리단계에 있는 본 논쟁이 결국은 (시민결합의 형태가 아닌) 동성커플의 결혼에 관한 시민사회적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실제 그러한 형태의 입법이 된 사례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논쟁 지점에서는 유독 서구에 이러한 입법형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지 않았다는, 자의적으로 선택된 사실이 동성 커플의 결혼 개념 포섭에 반대하는 측의 하나의 논거로 사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각주:4]




법학과 연계되어 이루어지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각종 진보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법조계는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라는 대중적 인식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는 퀴어 전반 이슈를 대하는 법조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한 법학 교수는 말한다. 법조계에서 이슈로서의 동성애를 언급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호적상 성별 정정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급은 아닐 수도 있지만, 여타의 퀴어 이슈 전반에서 동성애에 비해 훨씬 ‘가시적이지 못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굳이 찾아준 판례법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멈추어진 시계가 하루 두 번은 맞아 떨어지듯, 진보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맞아 떨어지긴 했지만 이는 대한민국 법조계의 실상에 부합하는 설명은 일단 아니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관한 판례 문언을 검토한다면 더욱 명확해진다.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결정례 검토: 대법원의 성전환 인식에 관하여


소위 ‘생물학적’ 성과 심리적, 사회학적, 정신적 의미의 성이 일치하지 않는 트랜스젠더 중에서, 대한민국의 사법이 지금까지 가족관계등록부(옛 호적)의 변경을 허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수술을 통해 외성기의 변형을 이룬 수술 트랜스젠더 뿐이다. 그 중에서도 판례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MTF 수술 트랜스젠더)에 집중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MTF 트랜스젠더의 호적상 성별표기 정정이 처음으로 허용된 사안은 2006년에 있었던 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이다. 이후 호주제가 폐지되어 가족관계등록부가 도입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나 법리의 변화가 있지는 않았으므로 이 결정을 그대로 본다.



당시 성별정정을 인정하는 대법원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1. 기존에 대법원은, ‘사람의 성은 성염색체의 구성을 기본적인 요소로 하여 내부 생식기와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의 외관은 물론이고 심리적•정신적인 성과 이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나 태도 등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었다. (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791 판결 참조)

2. 성별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WHO에서 분류한 국제질병기호상에도 분류가 있는 내용이다. 이를 대법원은 성동일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의 일환인 성전환증(Transexualism)이라는 용어로 포섭한다.

3. 그리고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성별을 호적에 무엇으로 기재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과 설명이 있다. 이 부분은 중요하기에 한 문단을 옮긴다.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도, 남성 또는 여성 중 어느 한쪽의 성염색체를 보유하고 있고 그 염색체와 일치하는 생식기와 성기가 형성•발달되어 출생하지만 출생 당시에는 아직 그 사람의 정신적•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성을 인지할 수 없으므로, 사회통념상 그 출생 당시에는 생물학적인 신체적 성징에 따라 법률적인 성이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출생 후의 성장에 따라 일관되게 출생 당시의 생물학적인 성에 대한 불일치감 및 위화감•혐오감을 갖고 반대의 성에 귀속감을 느끼면서 반대의 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 역시 반대의 성으로서 형성하기를 강력히 원하여, 정신과적으로 성전환증의 진단을 받고 상당기간 정신과적 치료나 호르몬 치료 등을 실시하여도 여전히 위 증세가 치유되지 않고 반대의 성에 대한 정신적•사회적 적응이 이루어짐에 따라 일반적인 의학적 기준에 의하여 성전환수술을 받고 반대 성으로서의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를 갖추고, 나아가 전환된 신체에 따른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만족감을 느끼고 공고한 성정체성의 인식 아래 그 성에 맞춘 의복, 두발 등의 외관을 하고 성관계 등 개인적인 영역 및 직업 등 사회적인 영역에서 모두 전환된 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그 성으로서 인식되고 있으며, 전환된 성을 그 사람의 성이라고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과의 신분관계에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거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아니하여 사회적으로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면, 이러한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앞서 본 사람의 성에 대한 평가 기준에 비추어 사회통념상 신체적으로 전환된 성을 갖추고 있다고 인정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할 것이며, 이와 같은 성전환자(아래에서 말하는 성전환자는 이러한 성전환자를 뜻한다)는 출생시와는 달리 전환된 성이 법률적으로도 그 성전환자의 성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위 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결정문 中

이상에서 보다시피, 대법원의 판단은 일관되게 성전환수술을 받은 사람을 성별정정의 적법한 청구 주체로 파악하고 있고, 그 이외의 부분에는 침묵한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우선 외성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힌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논의는 반대의 경우, 즉 FTM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 FTM 트랜스젠더가 법원에 성별정정을 요청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보이고, 우리와 비슷한 사법체계를 가진 일본에서 – 그러나 일본의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은 입법적 보완이 이루어져 이미 행정적 절차가 구비되어 있다 –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환한 경우 실무적으로 성기 성형 없이 성별 변경을 허가해주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FTM 트랜스젠더의 경우 인공성기와 성기성형의 안전성에 의문이 있다는 점이 반영되었겠지만, 여성기를 남성기의 부재로 보는 전통적 관념을 비판하는 페미니즘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식능력의 완전한 상실을 요건으로 요구하는 점 또한 상당히 후진적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준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남성(FTM)이 불임인 파트너를 대신하여 임신하는 미국과 같은 사례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각주:5]

‘사회통념에 의해’라는 부분에 의해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으로 제한된다는 점 또한 문제 중 하나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관련하여 실제 결정례가 남은 사안인 대법원 2011. 9. 2. 자 2009스117 전원합의체 결정은 자녀과 그 부모 간의 관계가 상당히 극단적인 사안이었으므로 일반화가 어렵지만, 실제 이후 대법원 내규는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전반적으로 위와 같은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판례를 보여주면 심지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하더라도 단박에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위 판결에서 성별을 감지하는 부분이 ‘학계’의 최신 연구결과를 반영했다고는 하나 이는 소위 생물학적, 의학적인 부분에 한정되어 있으며, 인권의 영역에서, 혹은 여타의 인문학적, 사회학적 연구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어휘와 새로운 시도들은 그 존재 자체를 무시당했다는 점이 여실하게 보이는 결정례이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현실에 절망하거나 저항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살아있는 것은 싸우는 것이란 어떤 비문도 있다만, 그래도 품위 있고 조금 더 나은 저항을 택하기 위해서라도 위 판결이 가지는 어떤 외적인 진보성에 대한 분석은 필요해 보인다.

그래,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해보자. 트랜스젠더의/퀴어의 입장에서 분명 모욕적이나, 법원이 퀴어 이슈를 다루는 태도에 있어 저 판결은 보이는 만큼 나쁜 판결은 아니다.





  1. ‘퀴어와 법’에 대해 보자는 국내의 거의 유일한 시도였기에 인용하였지만, 이 ‘기획 의도’ 글은 꽤 심각한 곡해의 지점을 가진다.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 차별금지법을 포섭한다 할지라도 군형법 제92조는 그와 동일한 정도의 역사를, 사실상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도 차별금지 입법보다 더욱 오래된 역사를 가진다. 초반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 신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제기는 모욕적이기까지 한 용어가 사용된 해당 법문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갑자기 빵 터진’ 것으로 묘사한 점은 자의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2. 이를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반동을 배제함으로써 강고한 헤테로섹슈얼리티의 지배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본문으로]
  3. 적당히 번역하고 살짝 고쳐 적용한다는 말을 법학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더라. [본문으로]
  4. 물론 MECO는 동성결혼에 대해 대략 지난 강연 후기에 인용한 Halberstam과 비슷한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할 수조차 없다는 점을 비교형량할 때 동성결혼권을 인정받는 게 옳다고 보는 쪽일 뿐. [본문으로]
  5. 애초에 국가가 개인의 신상기록을 전면적으로 기록하는 시스템이 야경국가적인 후진성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이 점은 논의하지 않기로 하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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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laimer

Homo Surplus 일부 필진의 글은 Team Chatterbox의 공식 입장 내지는 일치된 견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해당 글을 쓴 필진의 개인적 견해일 뿐이므로 문제제기는 그 필진에 대하여 해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나른한 어제 오후였다. 적어도 한가로운 나의 트위터 타임라인에 그 글이 올라온 것은. 그리 길지 않은 글이므로 (기억나는) 그대로 옮겨보자면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가 HIV 감염에 취약한 건 사실”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불어닥친 토론의 소용돌이는 그야말로 광풍과도 같았다. 아, 그 토론의 맥락을 정리하고 내 의견 한 줄을 덧붙여 넣기 위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믿고 싶다). 자신이 논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꽉 막힌 벽과도 같은 다수의 의견을 다시금 누군가의 언어로 번역하여 옮기는 행위란, 그 얼마나 많은 결락과 왜곡을 불러올 것이며, 또한 누군가에게 답답한 벽으로 다가갈 것인가. 그 이전에 정리를 하는 과정이 내 혈압을 보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에서 등장한 전제 몇 가지를, 일반론이라는 당의정을 입혀 그 근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한다.






제국 이태원(Itaewon Empire)이라 하는 건 물론, 식민군(Colonial Army)의 진주를 전제로 한 표현이다. 지금까지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나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조금 젊잖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표현을 하기도 한다. 식별가능한 퀴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동성애자, 혹은 그 중에서도 게이들이 전체 퀴어 인구의 어젠다를 선점하였노라고. 그리고 그건 퀴어 인권운동마저 잠식하여 마치 게이들의 문제가 퀴어 전체의 문제로 둔갑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고. 어제의 토론은 나에게 전형적으로, 이런 경향성이 도드라진 사례로 다가왔다.


게이, 퀴어, 혹은 퀴어-프렌들리한 이성애자이고자 하는 독자들은 인터넷 세계의 변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심 궁금해할 것이다. 그래서 준비한, 개인 블로그에 쓰려 했던 글 두 개 정도를 갈아 넣은, MECO 식의 순도 높은 정황 설명.



토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전제를 잘 정리하는 것일 터다.


우선 문제가 된 트윗은,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가 HIV 감염에 취약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본 문제제기는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남성 동성애자’와 ‘성적 왕성함’의 결부에 대한 불편함의 제기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논한다.



그런데 사태가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 인터넷 상에서 호모포비아와 게이들의(편의상, 이렇게 정의) 오랜 전쟁의 양상 때문인데, 호모포비아들은 “게이는 HIV에 취약하다, 그러므로 게이들은 더럽다/금지되어야 한다/바람직하지 않다/권장할 수 없다”와 같은 일련의 논리구조를 채택하고, 게이들은 이 전제를 흔들기 위해 많은 수단을 택한다.


논리적으로 저 짜증나는 명제를 분석해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될 것이다.



1. 게이들은 애널섹스를 많이 한다. 사실 애널섹스를 하는 사람들 중 절대다수는 게이이다.


2. 애널섹스는 HIV 감염에 취약한 섹스 방식이다.


3. HIV 감염에 취약한 섹스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4. 그 이후의 여러 소모적인 매도들. 게이는 더럽다. 모두 감방에 가둬야 한다. 여자 맛을 못 봐서 그런다 등등.



4번 이후의 매도는 사실 사람 취급해 주기 힘든 애들이나 하는 소리일 것이다. 정작 문제는 3번에 있다. HIV 감염에 취약한 섹스 방식과, 그런 섹스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HIV에 취약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다운그레이드해 보는 왜곡된 관점.


이 관점의 왜곡성을 지적하는 글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게이들의 반박은 1+2번에 치중해 있다. ‘게이는 HIV 감염에 취약하다’는 명제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고,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 이를테면 이런 방식이다.


2번 명제에 관해, 애널섹스를 하는 사람만이 HIV에 감염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한에이즈예방협회는 보통의 성관계에 0.1-1% 정도의 HIV 감염률을, 그리고 애널섹스에 0.3-5% 정도의 감염률을 상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포비아들의 논지는 약간 수정하여, HIV 감염률이 더 높은 섹스 방식과 그 섹스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은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논의의 방향은 자연스레 1번 명제로 가게 된다.


소위 말하는 “나는 게이지만 애널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바로 그런 것. 어떠한 형태를 띠든 결국은 게이=애널섹스의 도식을 파괴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어제 또한 그랬다. 원래의 트윗은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가 HIV 감염에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였으나, 여기서의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 부분에 생략된, 그들이 애널섹스를 더욱 자주 한다는, 그리고 섹스 과정에서 HIV 양성의 파트너를 만날 확률이 높다는 부분에 대한 반론이 있었다.


나 또한 게이=애널섹스의 도식을 100% 인정하지는 않는 편이지만[각주:1], 그와는 별개로 이 파괴에는 어떤 불순한 목적성이 존재한다. 1, 2번 명제와 3번 명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바로 1, 2번 명제는 HIV 감염 취약성을 논증하기 위한 중간다리에 가깝고, 3번 명제는 남성 동성애자가 HIV에 취약하기 때문에, 그들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잘못된 가치판단과 논리비약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의 결락과, 그를 지적하는 공격의 움직임은 당연히 3번 명제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1, 2번 명제에서 근본적인 불편함을 느끼는 일부 게이 및 ‘자칭’ 인권운동가들의 직관은 결국 게이와 HIV가 어떤 식으로든 결부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각주:2]


굳이 HIV 감염인과 게이의 상관계수를 논하지 않더라도 – 그 와중에 ‘변인통제’와 같은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지만, 이는 넘어가고 – 개념적으로도 그렇다. 더 쉽고 취약한 논리적 맹점 대신, 통계의 맹점과 오류를 만들어가며 굳이 1, 2번 명제를 공격하는 것은 결국 1, 2번 명제 자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바로, 동성애와 HIV의 연결고리.


이걸 깨려고 하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결국 이들에겐 HIV가 남의 문제,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 논의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HIV와 동성애자를 결부 짓지 말아야 할 어색한 논거의 각종 변주가. 그런데, 왜 HIV와 동성애자를 결부 짓는 것이 불편한가?[각주:3]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없었고, 당연히 답도 없었다. 아니, 없지는 않았는데 꼰대들의 오독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에이즈포비아인 건 아니에요”라는 말도 많이 보았다. 그런데, 그게 에이즈포비아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게이는 싫지만, 그렇다고 제가 호모포비아인 건 아니에요.”




첨언하자면, 사회적 소수자가 모든 면에서 바람직하며 다른 소수자 인권에 민감해야 한다는 규범적 요청은 어떤 의미의 이중 잣대라고 생각한다.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선해서가 아니라는 나의 옛 주장들과 같은 취지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소수자가 자신의 인권보장을 요구하며 했던 주장과 논리모순, 자가당착에 빠지는 일은 적어도 없어야 한다. 소수자 사회의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s) 현상과도 같을 것이다. 자신들은 같은 취지의 주장으로 어느 정도의 입지를 확보한 후,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신들이 당했던 억압논거로 찍어 누르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또한 AIDS/HIV 문제가 게이의 문제가 아닐까? HIV 양성 감염인은, 게이와 전혀 다른 사람들일까? 심지어 이는 HIV 감염인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인식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게이가 HIV에 감염되었다고 하여 게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HIV에 감염된 게이가 될 뿐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인권을 박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민권이 면탈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조금 더 특수한 형태의 사회적 보호가 필요해질 뿐이다.








많이 돌아왔다. 그래서 이는 제국 이태원 현상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동성애자/퀴어 인권운동 신(scene) 내부에 깊숙이 밀착되지 않은 내 입장에서,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구호는 매우 즉물적이고 직관적이다. 즉물적이고 직관적인 구호는 정서적 공감을 통해 전파되고, 이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문제가 된다.[각주:4]


퀴어, 조금 더 대중적인 용어로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확보한 입지는 게이가 이뻐서, 레즈의 사고방식이 올바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결국은 사회가 소수자를 어떻게 포용하고, 그들이 상처받지 않고 사회 구성원으로 공존할 수 있을지 고민 끝에 찾은 타협점에 가깝다. 그 타협점이 보이는 협상력과 정치력이 결국은 다수를 차지하는 게이들에게 독점되는 현상이 분명 발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부 게이들의 설익은 사고방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류 퀴어 운동의 목소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소위 말하는 퀴어-프렌들리한, ‘인권감수성’[각주:5]을 갖춘 이성애자들 또한 저 목소리를 전사하게 된다. 아웃팅 방지가 퀴어 인권운동의 알파요 오메가며, 거의 제1가치로 평가 받는 이런 현상, 혹은 게이들의 즉물적인 HIV와의 비결부 요구가 마치 인권적으로 선진적인 주장이기라도 한 양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과 공감을 얻어 전파되는 이런 현상들.


이 현상은 결국 즉물적인 게이 어젠다의 한계를 그대로 퀴어 커뮤니티의 문제로 전사한다. 게이 커뮤니티에서 존재할 수 있는 HIV 감염인에 대한 색안경은 그대로 퀴어들의 자가당착이 되며, 나이브하게도 통계자료와 해석방법에 대해 던진 엇나간 문제제기는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너무도 크고 반복적이어서, 내부의 자정작용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혹은 다른 소수자들의 또한 시급한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내부의 자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항상 계도적이고 도덕적으로 완벽할 수는 없다. 평소 운동 신에 훈수를 두는 꼬장한 “올드 스쿨 게이”들이 아니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이기는 수단은 결국 더 철저한 논리가 되어야 한다. 말꼬리를 잡는 건 부끄럽고, 솔직히 뭘 말하는지 이해도 못하는 건 더 부끄러운 일이다. ‘위트’ ‘버튼’과 같은 기믹에 휘둘리지 좀 말고.


상대의 도덕적 미결이 나의 논리적 흠결을 감추어주지는 않는다는 것. 특히나, 들어야 할 사람이 상대방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일 때는 더더욱 말이다.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결국 다른 퀴어들의 합리적이고 심층적인 문제제기를 묻어버리는 이런 답습이 업스트림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사태에 있어 개구리밥 님이 제시했던 여성의 성적 욕망과 같은 부분들.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라는 발언이 이를 위배했다고는 보지 않지만, 확실히 평소 배려가 결여된 부분이란 지적도 피할 수는 없다. 더욱 적극적으로 개구리밥 님이 제시하는 논거들을 보면 레즈비언 섹스에 대한 안내 지침의 부재와 같은 것이 있다.


또한 STD(Sexually Transmitted Disease: 성병)에 있어 어젠다가 나뉘어 설정되어 버렸다는 사실 또한 큰 문제다. HIV는 그야말로 남성 동성애자의 문제가 될 뿐이고, 같은 의미에서 HPV(Human Papilloma Virus, 여성의 자궁경부암을 유발)는 중년 여성, 혹은 고작해야 예방접종의 대상이 되는 젊은 여성들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HIV 감염인 절대 수는 이성애자가 더 많으며(당연한 일이지만, 그리고 비율상 동성애자 HIV 감염인의 비율이 넘사벽이겠지만), HPV 예방 백신인 가다실이 콘딜로마(HIV와 함께 STD계의 양대 공포, 곤지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질병을 하나의 성정체성과 결부하게 되는 방식은 효율적인 방식도 아니며, 위험하기까지 한 결락을 불러오게 된다. 이 또한 업스트림의 목소리에 묻혀, 지적과 개선의 움직임은 요원하기만 하다.




정리하자면, 인권운동의 현장 구호가 즉물적 호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그런데 그 호오는 결국 퀴어 운동현장의 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결정한다는 것. 그러다 보니, 게이 사회 내부에서 정제되지 않은 단순 호오가 표면에 대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이런 어젠다의 잠식을 나는, 퀴어 사회 지분을 다수-소수자가 독점하는 현상을 현현한 ‘제국 이태원’의 전형적인 일례로 본다.


그렇다면 단순히 퀴어 사회의 새로운 독재자로 군림한 게이, 혹은 그에 편승하는 일부 알파-레즈비언들을 척결하면 되는 문제일까? 사태를 그렇게 바라보고 싶어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게이-마초성을 가정하고 죽창으로 이를 해결하려 드는 방식을 우리 모두가 바라지는 않는다고 가정하고,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한다.


누군가를 마초-비마초로 나뉘어 판단하여, 마초를 배격한다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현재의 독점체제를 문제시하는 방법은 너무 단순하다. 그런 판단의 결과로 게이가 퀴어 사회 지분을 잠식하였다는 문제인식에 공감할 마음도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자성에 가까운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해결 또한 그 방향에서 나와야 한다. 게이라면, 그리고 더군다나 메인스트림이라면, 의식적으로 성정체성-성지향의 모든 조합이 가능하다는 가정적인 시뮬레이션을 계속적으로 시도하는 수 밖엔. 그것이 게이에게만 강요되는 것은 물론 아닐진대, 이러한 조합을 당연히 숨쉬듯 할 수밖에 없는 성정체성-성지향의 사람들도 존재하므로, 결국은 그 곳까지 상상력을 뻗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나마, 우리에겐 이러한 상상력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는 점을 새겨보는 것도 좋을 법하다. 누군가에게 이 세상은, 혹은 대한민국은, 게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어야만 하는 청정구역이기도 하다. 그들이 얼마나 무지몽매해 보이는지 다시 한 번 새기면서, 더욱 정진을.






첨언 1. llello 님의 이 글, 그리고 이 글은 지금껏 이 사태에 관해 쓰인 가장 좋은 글이다.


첨언 2. 위와 같은 의미에서 동인련 HIV/AIDS 팀의 인권교육은 좀 가자. 나부터도, 내가 이런 걸 잘 모르고 있다는 판단이 선다면.

  1. 그럼에도 나는 애널섹스를 하는 게이이고, 저러한 형태의 주장이 일종의 선긋기로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배제의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런 나의 주장을 오히려 헉하며 받아들인 사람은 전혀 다른 층위의 주장을 하고 있었던 - 그러므로 애널섹스를 하지 않는 게이들의 주장에 대해 심정적 동조를 하는 것에 가까웠던 - 게이가 아닌 퀴어들이었다. [본문으로]
  2. 또한 나는 일군의 이런 주장에 관해 성엄숙주의에 젖어 있다고 비판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관련성이 덜하여 굳이 논하지 않는다. 하지만, 애널섹스를 하지 않는 게이의 존재를 들어서까지 HIV와의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자신들이 탈출하고 남은 애널섹스를 하는 게이들은 HIV와의 연관성을 그대로 인정하며, 그들에 대한 색안경을 끼게 되는 것인지 조금 더 자아성찰을 요구하게는 된다. [본문으로]
  3. 어느 모로 생각해보나 AIDS/HIV는 악이 아니다. 걸린 사람들의 불행을 연만하고, 나에게 걸릴 가능성이 있음을, 그리고 그 가능성이 항문성교를 상대적으로 덜 하는 듯한 이성애자에 비해 높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러면 어떻냐는 당당한 태도로 임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관리가능한 질병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 [본문으로]
  4. 참고로, 여기서의 인권운동 신이라는 것은 본격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공감공감을 얻기 위해 트위터에 트윗을 하여 그것이 RT를 통해 전파되는 층위까지도 포섭한 개념이다. [본문으로]
  5. 인권+감수성이라는 이 단어는 상당히 웃기다. 인권이 언제부터 감성의 문제였을까? 물론 인권 지표와 관련 토픽에 민감하게 반응하여야 한다는 취지는 이해를 한다만, 이 단어의 사용례는 사실상 인권을 감성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일군의 주류 이데올로기를 놀랍도록 탁월하게 묘사해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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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언제나 그랬다. 내가 열두 시간 전까지 있었던 게이바와 게이클럽에 굳이 비싼 돈을 주고 들어와 춤을 추겠다는 건 양반이고. 게이 카페에 가입하여 소위 '인증'글을 모조리 캡쳐 뜬 블로그가 있었네, 검색 크롤을 통해 들통이 나자 게이들을 조롱하고 자신들끼리의 서로이웃 블로그로 전환을 했네 하는 이야기들. 이미 모든 커뮤니티는 그들에게 뚫려 있었다. 심지어 위치기반 소셜 데이팅 어플리케이션(지오소셜)에 자신의 얼굴 사진을 당당히 걸어둔 여자도 있다. 친구를 만들고 싶다며 왜 말을 걸지 않느냐고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당당한 그들에겐 "faghag"라는 말의 경멸적 어조까지 어울린다.


그런데 아뿔사, 이번엔 심지어 지오소셜을 캡쳐하여 누구나 볼 수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다고 한다. "게이이기 아까운 훈남들"이란 제목으로. 이런 미친! 분노와 경악은 당연하다. 나의, 우리의 입장에서 이는 갑작스레 나의 영역을 침범한 흙 묻은 맨발이기 때문에.





아웃팅 배척의 예외성




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자. 게이인 당신은 사회적으로 핍박받는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그 핍박은 어느 지점에서 오는가? 자신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 사람들의 편견, 손가락질, 과도한 관심과 배척, 불이익, 차별과 같은 지점 아닐까.


게이/퀴어의 목소리 중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아웃팅 방지에 대한 요구이다. 아웃팅은 범죄이며, 심각한 삶의 위협이라는 것이다.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권리인 사생활의 자유를 끌어온다. 누구에게나 사생활을 누릴 자유가 있는 법인데 그 사생활에 대해 남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지만, 헌법은 그런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헌법이 가장 강한 규범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은 국가에 대해 무언갈 요구할 때 뿐이다. 그 이외,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있을 때 헌법은 도덕책보다도 쓸모 없는 수준이다. '친구를 때리면 안 되요. 근데 쟤가 나 때려요' 같은.


조금 더 나아가보자. 아웃팅이 범죄라고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논의는 직관적으로 명예회손명예훼손의 법리를 끌어온다.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성정체성인 게이라는 사실을 남에게 밝히는 것은 나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형법 제307조는 두 항목으로 나뉘어져 있다. (1) 공연히 사실을 적시한 경우와 (2)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경우. 즉 아웃팅을 한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잡아넣기 위해선 그렇다면 "A는 게이다"라는 말이 사실인지, 허위의 사실인지를 검증받아야 하는 과정이 남는다. 게다가 형량을 보면, 게이를 게이라고 말하는 것이 게이가 아닌 사람을 게이라 하는 것보다 죄질이 가볍다. 이게 뭐야?!


명예훼손의 개념으로 들어가봐도 모순과 의문점이 남기는 마찬가지이다. 게이라는 사실이 나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게 이 쪽의 주장이 된다. 그리고 같은 입으로 게이임은, 퀴어임은 잘못된 게 아니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우린 모두 어떤 지점에서 퀴어한 사람들입니다. 남들과 다르지 않아요. 이렇게 태어난 걸요. 교정치료 같은 걸 할 필요 없이, 그냥 이대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아 주세요.


그런데 제가 게이라는 걸 남들에게 말하면 제 명예가 훼손됩니다. (/두둥!)



물론, 대한민국 사회에서 게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통제영역 너머에서 까발려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웃팅 방지 운동은 어디까지나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생긴 것이며, 게이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라는 주장과는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극단적인 이야기이다.[각주:1]


아웃팅이라는 건 우리의, 아니, 나의 생활에 있어 현실적으론 꽤 중요한 문제이긴 해도 게이로서 사회 개선을 꾀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가치일 수는 없다. 그건 '이렇게 해달라'는 요구가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령 게이가 대통령이 되어 퀴어 프렌들리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더라도, 아웃팅이 제1가치라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웃팅을 범죄로 규정하고, 위반하는 자에게 실형을 살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디까지는 아웃팅이며 아웃팅이 아닌지에 대한 혼란이 빚어질 것이고, 더 문제적으로 '너 게이야?'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될 것이다. 심지어는 나 자신이 '나 게이야'라고 선언했다 하더라도, 아웃팅을 극단적으로 염려하자면 내가 혹시 말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남들은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면 안 된다. 이런 금기의 장벽을 쌓는 것이 진정한 퀴어 해방일까.





문제는 그 지독한 타자화




물론 내가 지오소셜 앱에 대한 이러한 침탈,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핍박과 지독히 사물적인 호기심에 대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자'고 주장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이걸 아웃팅이라는 프레임 하나로 단순히 묶어버리는 걸 반대할 뿐이다. "그거 아웃팅이야"라는 말은, 많은 양식 있는 사람들의 입을 즉각 묶어버리는 효과는 있지만 가끔 전가의 보도로써 남용되곤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처럼.


오히려 이번 사건을 터뜨린 년들사람들의 사고를 조금 들여다보면 어떨까. 그들은 왜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일까. 게이에게 선망을 가지는 여성들의 기저심리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만 자신과의 섹슈얼한 텐션이 없다는 것과, 핑크장갑 님과 같은 패션 게이들, 혹은 주변의 보통 남성과는 나눌 수 없는 여러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사는 것 같다. 정도는 다르지만 동인소설에 심취하여 게이에 대한 비이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자들 또한, 결국은 그 근저에는 호감이 베이스된 것 같다.


호감을 베이스로 깔고도 이런 파괴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어긋난 관심, 삐뚤어진 애정이란 것일테다. 나는 문제의 핵심이 그들이 게이를, 다른 퀴어들을 이해하려고 했다기보단 그저 게이라는 사물을 소비하려는 데에 있다고 본다. 아웃팅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어디까지나 문제의 부차적인 층위일 뿐이다. 이것이 아웃팅이라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들이 그토록 선망하는 게이라는 존재가 이러한 소비에 반발할 때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대신 오히려 비아냥거리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 더욱 문제적인 상황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퀴어 운동은 그러한 비아냥을 배척하고 도태시키기 위한 역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비아냥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을지라도.



예를 들어, 이런 글은 어떨까?


아웃팅이 개입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오히려 퀴어들에 대한 공격을 비난하는 어조의 글이지만, 이 글에서도 비슷한 타자화를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문단:



지금껏 내가 ‘배운’ 바로는 퀴어들에게는 오직 사랑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명예와 부, 그리고 그것을 위한 전쟁을 좇는 삶이 무의미하다. 나는 나의 퀴어 친구들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그들이 만든 시이거나 음악이었다. 그들이 왜 총을 들기 싫어서 국가를 버리는지, 왜 전쟁 말고 사랑을 외치는지 나는 이제 조금 알게 되었고 그래서 조금 더 사랑을 존중하게 되었다.


양효실, 서울대 미대 동성애 혐오작품 논란, 시사IN 225호 中



'사랑으로 충만한 퀴어'라는 상을 하나 세워두고 그 상에 근거하여 퀴어를 존중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이 문단은, 히피 문화에 대한 묘한 향수를 가지고 퀴어들을 신인류로서 제시하는 퀴어 낭만문학으로 흠잡을 데 없다. 그렇다면 양효실 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애인 없이 하루하루를 밀리터리 덕후질로 보내는 거함거포주의자 육식 게이는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것인가.

선한 사회적 소수자의 허상이란 게 존재한다. 사회적 소수자는 선하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들이 얼마나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인데, 그저 이 사회적 구조란 것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다며, 그 구조를 걷어 주면 그들은 특유의 선함으로 우리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으므로 공리주의적인 관점에 의거해 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그러한 낭만적 주장. 이러한 주장이 주는 문학적 카타르시스는 인정한다. 하지만 사회적 도움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긍정적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세태는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Faghag 팬덤의 인터넷 아웃팅이든, 물처럼 맑고 순한 게이의 허상이든 결국은 타자화로부터 시작된다. 커밍아웃한 연예인이 TV에 등장해 게이 개그로 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호감을 사는 시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여러 게이들의 얼굴은 모호해진다. 나의 일상 생활 속에 게이가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을 아직 누구나 하지는 못하는 그런 시대이다. 그들에 대한 여러가지 형태의 환상(幻想)이 자리하고, 환상에 들어맞지 않을 때 그들은 당황하고, 더러는 반감을 가진다. 왜 내가 가진 상(像)에 너희는 들어맞지 않느냐며.




그래서 어쩌라고



MECO는 형이상학을 하는 사람이라는 오해가 생길 지경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공부를 해본 적 없는 사람인데. 그래서 독자들이 던질 질문을 나 스스로 던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일단 벌어진 아웃팅을 대체 어쩌자는 건가?

명예훼손은 웃긴 소리다. 이건 전기통신기본법상 전기통신설비를 이용하여 일어난 범죄이므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처벌을 구해야 한다. 법 제49조에 규정된 "정보통신망에 의하여 처리ㆍ보관 또는 전송되는 타인의 정보를 훼손하거나 타인의 비밀을 침해ㆍ도용 또는 누설"에 해당하는지 부분을 입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해당 지오소셜이 누구나 설치하면 볼 수 있다는 점은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지만, Terms of Services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법상 고소에 더하여 민사상 위자료도 해볼 수 있을 것이고.

엇? 이게 전부? 그건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타자화에 대응하는 방식은 누구나 다를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벽장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는지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내가 같은 게이란 이유로 정치적 견해가 일치하리란 것 또한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게이란 점은 일정 부분에서 같은 주장을 공유할 수는 있다. 그 지점에서 연대의 신비가 작용할 것이다.

만일 당신의 포지션이 현재 이 곳의 인권신장을 바라는 과격파라면, 당신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인권 가치에 따라 그걸 보장 받기 위한 길을 걸으면 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다시피 인권신장을 이야기하며 아웃팅을 우선적 가치로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아웃팅으로 오늘도 상처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프지만, 결국 퀴어 인권운동의 방향은 아웃팅의 낙폭, 즉 아웃팅이 있더라도 그 결과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도록 만드는 쪽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지만, 또한 누구나가 완전히 벽장을 나올 수는 없다. 당신이 벽장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결국은 아웃팅 방지는 스스로의 현명한 처신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아웃팅의 낙폭을 줄이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당신의 불안 또한 최대한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타자화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결국 타자화의 문제는 엄밀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답이 ㅇ벗는 faghag타자화된 호의의 표현이라 하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그 정도의 호감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문제이다. 그리고 항상 이론적 정밀함만이 사태를 돌파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보여주었듯이 가족주의 또한 퀴어를 이해하고 포섭할 수 있다. 그것이 부작용을 쫙 뺀 담백한 이해와 포섭은 아닐지라도, 세상은 그렇게 누비어져서도 굴러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에 움츠러들지 않는 것. 퀴어에 대한 반가치를 적극적으로 들고 나온 포비아가 개입되지조차 않은 이번 사안으로 혹시라도 겁을 먹고, 목소리가 수그러들지 않는 것.

오히려 더욱 기갈차게 외쳐주진 못할 망정,"너희 같은 무개념녀들이랑은 내가 이성애자라도 안 놀아." "왜 내 사진은 없냐! 내 사진도 캡쳐 좀 굽신굽신"숨어버리지 않는 것. 




이 글을, 이번 사건이 터진 후 지오소셜에서 수많은 훈나미들이 사라질 것을 가장 먼저 걱정한 Chatterbox 구성원들에게 바칩니다. :)

  1. 실제 지금 우리 사회 수준과 비슷했을 90년대 미국에서 게이 유명인을 아웃팅시키는 Queer Nation이라는 단체가 있었다. 물론 그들이 호모포비아라는 건 아니고, 오히려 게이 인권운동의 한 방향으로써 이를 도입한 것에 가까웠다. [본문으로]
Posted by M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