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Team Chatterbox입니다.


오늘은 외부필진의 투고글로 찾아뵙습니다. 절대로 저희가 글을 조금이라도 덜 쓰고 싶어 이러는 건 아니지만 Chatterbox는 독자 여러분의 투고를 항상 기다리고 있답니다. :) 심지어 연애상담의 대가로 글을 뜯어내기도 합니ㄷ... 혹시라도 관심 있으신 분들은 트위터에서 저희 필진들 혹은, @chatterbox_gays를 찾아주셔요. 아니면 chatterbox.gays@지메일로 이메일을 보내주셔도 됩니다.


아무튼, 각설하고! 오늘 글을 보내주신 분은 트위터의 반바지 님입니다. 해외에서 항상 즐겁게 살고 계신 듯한 분이지요. 가끔 새벽반 트위터에서 멘붕을 하기도 하시지만... 어딘가 특이하지만 정말 흥미로운 연애 이야길 써주신 반바지님께 이 자릴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Homo Surplus의 독자분들도 저희가 이 글을 처음 읽으며 느꼈던 설렘과 즐거움을 느끼시길 빌며, 글을 시작해볼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채터박스 팀은 아니지만 객원 블로거(?)로서 글을 투고하게 된 반바지라고 합니다. 항상 눈팅만 하면서 좋은 글, 유익한 정보가 가득한 글 보다가 갑자기 직접 참여를 하자니 부담도 되고 워낙 지식의 폭이 좁은 사람인지라 많이 고민했었어요. 하지만 잠도 안오는 이 새벽! 소소한 저의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합니다.


저는 2009년에 낯선나라 캐나다로 유학을 오게 되었어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엄청나게 보수적인 국가 싱가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다 온 까닭에 오기전에 혼자 굉장히 떨리면서도 말로만 듣던 서양의 자유를 만끽할 생각에 비행기 타기 전날 잠도 못자고 들떴던게 아직도 생생하네요. 캐나다에 도착한 뒤 첫 한 주는 학교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며 바쁘게 보냈어요.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건 매 년 신입생들을 위해 학교에서 기획하는 “Single and Sexy”라는 뮤지컬. 이 뮤지컬은 대학생활뿐 아니라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어서 다루기 더욱 힘든  강간, 호모포비아, 인종 차별, 자살, 거식증, 식욕부진, 임신, 에이즈와 HIV, 가정폭력 그리고 alcoholism과 마약중독을 두시간 안에 알기 쉽게 풀어냅니다. 거친 토픽을 명쾌하게 다뤄내는 학교 뮤지컬팀의 실력에도 개인적으로 놀랐지만, 극장 안의 그 수많은 신입생들이 모든 문제에 같이 공감하며 박수치는 모습이 저에겐 일종의 컬쳐쇼크였어요. 싱가폴에 있을때는 공공연하게 호모포빅한 발언을 하는 아이들이 태반이였고, 학교에서도 아무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있을 때였거든요. 항상 나만은 누구보다도 오픈마인드인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던 당시 19살의 반바지였지만, 정말 저의 가치관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은 사람을 캐나다에서 만나게 됩니다.


2011년 여름, 저는 캐나다 버프(?)를 듬뿍 받아 지금까지도 가족처럼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그리고 고등학교때 가장 친했던 친구들에게 이미 커밍아웃을 하고 (심지어 부모님한테도 들켰어) 그 어느때보다 숨김없고 당당(하다고 생각했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때 친구집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친구네 집에 있던 룸메이트가 갑자기 저희보고 오늘 밤 게이클럽에 가자고 하는겁니다. 지금 알게 된 거지만 현재 애인이 그때 그 방에서 놀고 있었는데 저랑 엮이려고 친구보고 저 데리고 가자고 한거래요. (부끄) 그렇게 해서 저는 난생 처음 서양게이(?)와 함께 클럽에 가고…. (중략)…. 정확히 1년 뒤부터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어요. (이미 글이 너무 길어져서 확 끊음)


자 그럼 이제부터 제가 백인과 사귀면서 느낀 점들에 대해 글을 써볼게요! 





<여태까지 고작 인트로였다니>




***주의: 이 아래로는 때때로 염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 남자친구 블레이크는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 해밀턴에서 태어나 온타리오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는 캐나다 토박이 촌놈이에요. 그래서 정말 캐나다스러운 관념만이 머리에 박힐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고,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캐나다인의 general한 마인드셋을 대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글의 소재로 삼았어요. (그렇다고 저를 “남자는 ~~~ 여자는 ~~~ A형은 ~~~” 따위의 글이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없기)




1. Acceptance가 아닌 당연함



제가 인복이 많은지라 여태껏 제가 커밍아웃한 친구들은 한명도 빼놓지 않고 저를 응원해주고 사랑해주고 있어요. 물론 이 친구들이 정말 눈물나도록 고맙지만, 상당수의 친구들은 “나는 너가 게이지만 너를 친구로 인정하고 앞으로도 응원할 것이다” 아니면 “나는 너가 고자라도 내 친구임은 변함이 없다” 등의 [내가 이렇게나 좋은 친구인 것이다!!!]하는 뉘앙스가 없지 않아 있는데, 캐나다에서는 그와 다르게 딱히 커밍아웃이 충격적인 소재가 아닌지라 거꾸로 “야, 그얘기 들었냐? xxx가 호모포비아래” “헐 뭐 그런 애가 다 있냐” 하며 극소수의 호모포빅한 사람들이 비웃음과 멸시를 당하는 환경이에요. 


블레이크와 사귀게 된지 고작 두 달만에 블레이크의 할머니 생신파티에 초대를 받게 되어서 매우 떨리는 마음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때 이모 삼촌 안가리고 다 모인 자리여서 왠 처음보는 아시안이 와서 어색하진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원래 알고 지내던 가족처럼 반겨주고, 심지어 초등학생인 블레이크 사촌동생도 새로운 오빠가 생겼다며 좋아해주는 게 정말 신세계였달까.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확실한 성교육과 윤리교육을 받으며 자란 이 나라 사람들에 비해, 제 자신이 얼마나 생각보다 꽉 막힌 사고방식을 여태 가지고 살았는지를 느끼게 되었어요.


예전에 길을 걷다가 남자친구가 갑자기 손을 잡아서 저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누가 볼까 무서워 손을 뺐던 일이 있는데, 그때 저는 단지 한국과 싱가폴에서 숨어살던 (;ㅅ;) 습성이 튀어나와서 그런건데 블레이크는 제가 자기를 별로 안 좋아해서 손을 안 잡은걸로 알고 엄청 상처 받았거든요. 왜냐면 자기한테는 밖에서 숨기고 다니거나 눈치볼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 제가 사람들 시선 때문에 그랬다는 건 생각조차 못한 거에요. 같은 이유로 한국게이들의 통칭 “게이스북”도 여태 블레이크는 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밖에서도 손 꽉꽉 잡고 다녀요 ^.^)




2. 꾸밈없는 사람



제가 여태 사귀었던 애들이 하나같이 가식적이었던 건지, 아니면 블레이크가 유난히 이런건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람이 편할수가 있나? 할 때가 있어요. 저를 실제로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제 성격부터가 우선 가식적인 건 정말 질색하는 타입이여서, 이미지 관리를 안합니다. (사실 관리할 이미지가 없음) 그래서인지 실제로 “너무 애인 같지가 않고 친구 같기만 해”서 차인 적이 있습니다. (진짜) 그 당시 감히 저를 찬 나쁜 놈에게 그때의 의미가 무엇이었느냐 물어보니 제가 자기 앞에서 너무 꾸밈없이 편하게만 해서 자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네요. (사실 아직까지도 그게 무슨 개소리인지는 이해가 안 됨)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 주변에 있는 한국 애들은 한결같이 저보고 “이미지 관리 좀 해라” “피부관리좀 해라” 등 별 듣기 싫은 소릴…. 실제로 얼마 전 아는 게이동생에게 “형은 남자친구 앞에서 그렇게 막 놔버려도 남친이 괜찮아 해?” 라는 말을 들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 질문 한 동생 포함 제 친구들은 목소리 톤 낮추기부터 시작해서 걷는 포즈 신경 쓰고, 배나와 보일까봐 배에 힘주고 다니고, 심지어 아침에 얼굴 부은거 못 보인다고 일어나자마자 집에 간다던지….


(쓰면서 혼자 생각해 보는 건데, 이것도 일종의 peer pressure가 아닐까 싶음. 한명이 갑자기 심하게 자기 관리하고 그러니까 옆에 있는 애들도 덩달아서 안 뒤쳐지려고, 응?) 라고는 하지만 사실 내가 그렇게 관리할 성품과 인물이 못됨.


저는 원래도 뭐 그렇지만, 남자친구가 저에게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고 또 저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니까, 그런 종류의 스트레스(예를 들면 방구참기)가 사라진 것 같아서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제 나름 한국 살때 주워먹은 습관이 아예 없지는 않은지라(예를 들면 거울만 보면 앞머리 옆으로 샥샥 넘긴다든가, 구레나룻 정리를 한다든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직까지도 완벽히 제 자신에게 편해지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저런 짓 할때마다 블레이크가 옆에서 “니가 아무리 그렇게 머리 정리하고 해도 밖에 나가면 다 모르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니 앞머리가 5대5든 앞머리가 없든 신경 하나도 안 쓴다”라고 하면서 비웃습니다…. 얘는 머리도 안말리고 나가요.


(게다가 특히 제가 사는 곳이 대학가라서 새벽이 되면 잠옷만 걸쳐 입고 맥도날드 사먹으러 나오는 애들도 허다함….)



아무튼 저는 그러한 이유들로 머리칼 한 가닥 한 가닥 정리할 시간을 아껴서 데이트를 1분이라도 일찍 나가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거에요.



3. 야! 내가 자연인이다!



제가 외국물 좀 먹었다고 훈계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커플들, 아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도가 과할 정도로 높은 것 같아요. 작년 이맘때 저랑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 사이인 여자동창이 캐나다에 놀러왔었어요. 저 보러 돈 모아서 비행기까지 타고 왔다는 생각에 너무 기쁘고 들떠서 친구가 오면 어디를 데리고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엄청 고민하고 고민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당시 캐나다에 도착한 친구에게 많이 실망했었어요. 도착하자마자 첫 질문이 “여기 와이파이 비밀번호 뭐야” 였기도 하고, 어디를 데리고 가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를 못하고 지금 현재 옆에 있는 저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카톡 친구들과 대화하기 바빴으니까요. (이러니까 되게 뒷담화 같지만 아직도 제가 정말 아끼는 친구에요 친구야 미안ㅋㅋㅋ 사랑해) 그 당시에는 저보다도 블레이크가 많이 언짢아해서 저도 못마땅한 와중에 친구 커버해준다고 땀 뻘뻘 흘리고…. 아무튼 그래서 그때는 친구가 너무 미웠는데. 한국에 부모님 뵈러 잠깐 들렀는데 길거리에 제 친구 판박이가 수백명이 돌아다니는 거에요.


한국이 워낙 기술이 빨리 발전하는 나라라 제가 1~2년에 한번 돌아올 때마다 많이 놀라긴 하지만, 저번에 갔을 때의 놀람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좋지 않은 광경이었어요. 사람 대 사람의 교류가 거의 사라지고 커피집에 마주앉아서 서로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기괴한 모습. 핸드폰과 인터넷을 이 사람들에게서 빼앗아버리면 서로 무슨 얘기를 할까요?


캐나다는 땅덩이가 워낙 넓은 탓에 사람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은 곳을 찾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덕분에 그 동안 블레이크와 바닷가 조용한 별장에도 가보고 깜깜한 숲 속에 텐트치고 캠핑도 가봤어요. 바닷가에 횟집, 조개구이집과 시끌시끌한 밤문화가 주인 한국 문화도 물론 정말 즐겁지만, 이렇게 그저 “쉬는 것”이 목적인 여행은 너무나 오랜만에 와보는 기분이라 감회가 남달랐어요.


같이 처음 캠핑을 간 게 사귄지 아직 2달정도 밖에 안 되었을 때라(심지어 그중 3주는 제가 한국에 들르느라 같이 있지도 못함), 서로의 비밀을 다 알지도 못했고, 지금만큼 편한 사이도 아니었어요.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가 캠핑 가기 1주일 전부터 이유 모르게 블레이크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소리도 지르고 집에서 내쫓기까지 하고 (블레이크 말로는 그때 정말 헤어지려고 마음까지 먹은 상태였다고) 서로 관계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상태였는데, 해가 지고나니 하늘에 별빛과 작은 모닥불 주변 말고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둘만의 공간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서로 heart to heart의 대화를 할 수 있었어요. 일과 학교에 쫓기지 않는, 서로 말고는 신경 쓸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숲 속에서 밤새 대화를 하고 나니 “아 내가 이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알 수 있겠다” 하는 안정감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아마 그때 그 대화가 없었다면, 지금 저는 이 글을 쓰고 있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재미있는 영화, 공연을 보러 다니고 맛집도 함께 찾아 다니고 하는 것도 정말! 정말! 멋지고 달콤할테지만, 가끔 정말 쉬고 싶을 때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애인도 좋다고 생각해요.





처음에 쓰고자 한 글이 어쩌다 보니 반 애인자랑, 반 연애팁으로 진화해 버렸지만,

여기까지 쓸데 없는 제 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블로그 글에 비해 제 글이 수준미달이라 알비노호랑이 형의 심의(?)에 통과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상 저와 코쟁이와의 소박한 연애담이었습니다. 모두들 굉장한 사랑 꾸며 나가시길 바라요 ^o^



- 반바지의 칼럼 끄ㅌ -




추! 천! 버! 튼!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이 금언을 적용하기에 이 결혼만큼 적절한 사례도 잘 없을 것이다. ‘어느 멋진 날, 당연한 결혼식’이란 캣치프레이즈 아래 준비되어가는 이 결혼은 – 적어도 준비위원들에게는 – 단순히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다는 사건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모양이다. LGBT 사회 전체의 축제이면서 지난 1-20년간 부침을 겪어온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태세를 정비하여, 새 일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야심이 읽힌다.


역시 부침을 겪으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게이가, 적어도 그 중 한 사람이 된 김조광수 감독과 그의 오랜 연인 김승환 대표가 결혼한다. 이 간단한 사실에 관하여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까? 몇 가지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이들의 결혼은 꾸준히 ‘낭만적인’ 일로 회자되고, 그들 또한 그러길 원한다. 우리 - 성소수자들을 에워싼 강고한 제도권에 머물고 있는 이성애자들의 결혼을 보자. 결혼은 항상 낭만적인가. 아마도 지금쯤 어떤 게시판[각주:1]의 사람들이 조소할 준비를 끝마쳤을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결혼(식)은 현실”이라고.



이 아름다운 결혼사진조차 피눈물을 머금은 ‘스드메[각주:2]’ 견적의 산물 아닌가. 사람과 사람의 결합이 아닌 가족을 구성하는 제도적 수단 중 하나인 결혼. 그 과정에서 깨지는 예비부부가 얼마나 많은지는, 예의 게시판에서 이미 충분히 보이니 줄이자. 결국 결혼식은 상당한 돈을 쓰게 되는 행사다. 누가 돈을 쓰고, 부부의 생활근거를 합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기여하였는지가 여실히 반영된 파워게임이기도 하다.


물론 김조-김 커플이 예단비를 고민하고 있진 않겠지만, 요컨대 결혼은 경제력, 사회적 위치, 사는 나라, 문화, 혹은 인종 및 성별과 같은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측면이 크단 것이다. 여기에 ‘당연한’ 결혼식이란 네이밍이 주는 불편함을 중첩해본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나(MECO)는 당연히 결혼해야 하는 걸까? 그 결혼이 이성결혼이라면 동성애자인 나에겐 이미 논외다. (나는 위장결혼/계약결혼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동성결혼이 법제화된 몇 십 년 후의 대한민국에서라면? 그런 나라에서 결혼하지 못한 결혼적령기의 나는 ‘반편이’거나,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각주:3] 혼인이 아닌, 나름의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한 수많은 사람들에까지 이 질문을 확장해본다면, ‘당연하다’는 말은 더 쉽지 않을 게다. 독거노인 비혼자가 아니라, ‘1인 가구’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공동주거나, 그 외 다양한 형태로 가족을 형성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각주:4]




누군가의 결혼이 모든 성소수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일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 커플에겐 당연한’ 결혼이란 표제를 걸고 오래된 커플인데도 여전히 낭만적인 두 사람을 강조하는, 개인적인 결혼이라면.


동성결혼 법제화, 혹은 혼인평등(Marriage Equality) 운동을 벌여 미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소기의 성과를 거둔(이전 글 링크) 바다 건너 미국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층위는 완전히 분화되어 있다. 복지가 성기기 그지없어 특정 집단의 생존을 위해선 사회적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가장 효율적인 지원방법을 궁리해야만 하는 그 곳에서, 당장 생존의 위협을 받는 사회적 약자인 LGBT의 인권을 보장하자는 운동과, 오질나게 비싼 연방대법원 변론비용을 부담할 수 있을 정도인 탄탄한 중산층 백인 알파 게이/레즈비언들의 혼인권을 주장하는 운동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후자는 안티-게이 로비에 맞설 정도의 금전적 파워를 자랑한다고는 하지만, 대표적인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이 상근활동가 몇 명 늘리기도 빠듯한 대한민국에선 먼 나라 이야기다. 뭐, 그렇다고 한다. (말 나온 김에 성소수자 인권단체를 후원하기 위해 CMS를 쓰고 싶으시다면, 여기로: 무지개행동(hot! help needed), 동성애자인권연대, 친구사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 후원은 퀴어, 플라이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결혼 난 반댈세? 물론 그건 아니다. 한심할 정도로 아둔한 자들의 ‘이 결혼 반대’시위를 보고 있자면 절로 한소리 나오지 않는가. “왜 남이 결혼하는 데 지들이 하라마라야. 당신들이 혼주임?” 그렇다면 혹시, 김조-김의 결혼은 그들 일이니 괜히 나까지 동참하라 들지 말고 결혼은 조용히 알아서 하시라?




(결혼 홍보가 시끄럽다면서 위와 같은 논조로 시비 걸던 트윗이 있었는데 못 찾았다. 그래서 시비는 아니지만 비슷한 관점에서 결혼을 지지하는 다른 트윗으로 대체한다.)




아까 끌려나온 비트겐슈타인, 그가 침묵을 요구했던 ‘말할 수 없는 것’들은 기실 그 자신에게도 진정으로 중요한 주제들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 결혼엔 침묵이 가장 안전해 보일지라도, 나는 침묵과 판단유보 이상 나아갈 필요가, 혹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결혼은 조금 더 활발하게 언급되어야만 한다. 왤까?



혼인평등 운동이 성소수자 모두의 의제가 될 수 없다는 관점에는 인권운동의 맥락에 대한 어떤 전제가 존재한다. 이미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고도로 분화되어, 폭력과 가난에 직면한 LGBT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운동과 연대지점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전제가. 그럼 과연, 대한민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 또한 그토록 고도로 분화되었는가? 아직 우리는 전반적으로 한국 성소수자 전반의 권익을 옹호하는 운동단계에 머물러 있다.[각주:5] 이성애적 결혼 테두리의 바깥에 있어 야기되는 차별이 한국 성소수자들을 옭아매는 빈도도 광범위하다. 혼인평등 운동은 성소수자 모두의 최우선 과제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 성소수자들의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하기에도 의문이 있다.






그리고 비록 로맨틱을 강조할지언정, 이 결혼이 두 사람의 낭만적인 이벤트를 공사구분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 ‘귀찮게’하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아직까지 성소수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계속 성소수자들이 언론에 언급되고 평등의 가치가 언론 인터뷰에 등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이목을 끌기 위해 이런저런 이벤트를 벌이는 것은 인권운동의 기본이기도 할 것이고. 물론 이 결혼은, 우리 안에서도 꾸준히 이야기될 화제이기도 하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꾸준히 보여주는 것 역시 중요한 역할이다. 말로만 듣던 그 사람들이 바로 여기, 당신 근처에, 만만찮은 수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운동전략 아닐까. 성소수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못지않게, 성소수자의 낭만화 또한 경계할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돈두댓’의 슬럿워크가 대비한 아름다운 몸을 가진 서양 게이들의 퍼레이드와 한국의 퀴어퍼레이드, 그리고 그에 대한 네티즌들의 차이나는 반응은 무엇을 의미할까? 성소수자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관점을 가지도록 하는 데 이 결혼식 홍보는 확실히 기여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이쯤 되면 결혼 이야기에서 벗어나는 일이지만, ‘당신들이 알아서 하세요. 개인사니까.’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낙인과 차별에 적극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성소수자들에 대해 ‘당신들 일이니 난 알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국 차별상황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되는 오지랖을 당하고 있자면 ‘신경 좀 끄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태도가 성소수자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인식이 고착화된다면 이 역시 걱정스러울 것이다. 역시나 ‘신경 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조금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결혼은 그 동안 한국에서 혼인평등 운동이 경시하고 있었던 법적 해결책을 적극 도모하려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고, 예상가능하다시피 신고의 수리가 반려되면 법적인 절차를 통해 이를 싸워볼 생각이 있는 것이다. 아직 한 번도 법적으로 이 절차를 다투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놀라운 일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별도의 입법 없이 사법적으로 동성결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야 희박하지만, 법이 가진 논리의 안에서 성소수자의 논리를 펼치는 것은 비단 동성결혼이 아니라 성소수자 인권의 현장에서도 중요한 일이다. 법은 모르는 것에 대한 상상력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긴 글을 쓰며 너무도 당연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이미 많은 이들이 깊게 생각한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이 무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할 뿐이니까. 김조광수-김승환 커플과 결혼준비위원들 또한 그럴 것이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기 방식으로 성소수자 인권을 말하는 것뿐이라고.

이 결혼이 당연한 결혼이기 때문에 지지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두 사람의 개인사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내가 동의하는 부분이 있으면 참여하고 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역시나 이 결혼에 대해서는 침묵과 판단유보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아둔한 자들이 동성애를 찬성하니 반대하니 주술호응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빈도에 비해, 정작 이 결혼에 대해 성소수자들이 내는 - 이 방식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 다양한 목소리가 턱없이 부족하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없는 상황이 부조리한 것도 사실이다. 내가 결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할 수 없단 점을 사회가 강조하겠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할 수 있어버리고 말겠다는 오기도 생긴다. 그러니까.

김조광수-김승환 예비부부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멋진 결혼식을 바라고, 두 사람의 삶에 앞으로도 축복이 가득하길. 그리고 Team Chatterbox는 이 결혼을 지지한다.



2013. 9. 2.

MECO, of Team Chatterbox

  1. 결시친: 네이트 판의 결혼/시댁/친정 게시판. 결혼 및 시댁/친정에 관한 온갖 막장 스토리와 공분을 사는 서스펜스의 향연이라고들 한다. [본문으로]
  2. 스튜디오촬영, 드레스, 메이크업, 결혼식 준비의 3종 신기. [본문으로]
  3. 이들은 물론, 지금까지 수많은 비혼자들에게 유구한 시간 동안 가해진 폭압의 내용이다. [본문으로]
  4. 이들을 가리키는 어떤 어휘인 ‘대안’가족이란 말은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5. 지역적인 퀴어단체는 일부 있으나, 계급/계층에 기반한 성소수자 단체의 출범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ME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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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아니오, 결단코 아니오. 하지만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허약함, 부패, 우리 육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 거꾸로 된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 놓고 법열을 경험한들 무슨 의미가 있답디까? 이런 행위는 거대한 집단의 움직임으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 내가 알기로 웃음은 범부를 악마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왜? 바보의 잔치에서는 악마 또한 하찮은 바보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서책에 이르면 문제는 달라져요. 이 서책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을 <지혜>라고 부르고 있어요. 술로 목젖을 가르랑거리듯이 웃으면서 범부는 제가 주인이라도 된 듯이 뽐내는 법이오. 왜? 취하면 스스로를 주인으로 어김으로써 그 주종관계를 역전시킬 수도 있는 것이니까. 한데 이 서책은 바로 그 순간부터, 머리 좋은 식자들에게 이 역전을 합리화할 책략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로써 범부가 다행히도 몸에 한정되어 있던 그러한 역전을, 머리로도 하게 될 테지요. 웃음이 인간 고유의 특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인인 우리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서책을 읽다 보면, 그대같이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삼단 논법으로 비약시키게 함으로써 웃음을 인간의 목적인 양 오인하게 합니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1980/1993) 中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모든 ‘게이 드립’이란 호모포비아의 차별발언일까? 게이 드립에 자주 웃고, 스스로 그런 ‘드립’을 치기도 하는 게이인 나에겐 복잡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상대가 내 성적 지향을 아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잘 친 게이 드립은 웃기다. 물론 그 근간에는 몇 가지 불편한 가정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긴 하다. 예를 들어,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은 ‘정상적’인 ‘이성애자’로, 이 ‘드립’의 대상이 될 리가 없다던가.

그럼에도 모든 게이 드립을, 나의 존재 자체를 차단하는 심각한 위협인 호모포비아의 행동으로 취급하여 배척할 수 있을까?

위에 인용한 <장미의 이름> 중 호르헤 수도사의 논지를 따른다면 그러한 금제를 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웃음과 해학적 역전을 죄악으로 보는 그의 사상에 의하면 ‘게이 드립’을 친 자는, 게이의 원죄에 그러한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전복의 죄를 더한 이중의 죄를 범한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호르헤 수도사가 살던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웃음을 인간 원죄의 증거로 삼는 그러한 세상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세상에서 게이로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결국은 어떤 ‘드립’은 웃긴지, 어떤 것은 모욕인지, 차별인지,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 등, 생각하길 멈추지 않아야 한다.

최근 대안적 매체를 표방하고 있는 ㅍㅍㅅㅅ에서는 이러한 글을 실었다. 9GAG에 올라온, 한 아버지의 ‘감동적’인 동성애옹호(Homophile) 짤방을 페이스북에 올려본 후 댓글 반응에 대해 쓴 글이다.




(물론 저러한 가족적이며 관용과 인정의 가치에 기반한 미국식 동성애옹호 프로파간다가 ‘감동적’이라는 말에 의문을 표하고 싶은 게이도 있을 것이다. 가족주의와 관용, 무지의 베일에 근거한 정의론적 관점에 대해 이성애자들이 보이는 관점이 다양한 만큼, 동성애자들도 그러하다.)

분명 동성애자로서 나는, 누군가가 동성애 담론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자청하였다면 환영한다. 동성애자 인권에 대한 부족한 사회적 인식은 종종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확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ㅍㅍㅅㅅ의 글을 ‘하나의 생각’이란 차원에서 환영하고, 넘어갈 것인가? 나에게는 그럴 수만은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2. 어떤 타자화



일면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저 정도면 소위 말하는 ‘개념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글쓴이인 ㅍㅍㅅㅅ 두목은 해당 동성애옹호 짤방 아래에 달린 댓글 가운데 일부에 주목한다. 페이스북의 ‘태그’ 기능을 활용해 일부 댓글러들이 친구에게 ‘게이 드립’을 친 것. 이 ‘게이 드립’이 괜찮은가, 불편하진 않은가의 결벽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분위기로 이야기를 옮겨간다.

표면적으로는 홍석천이 자주 TV에 출연하는 등 관용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였지만 여전히 통계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동성애에 관용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사회이다. 개그의 본질에 있어 마이너에 대한 개그는 당사자가 하지 않으면 민감할 수 있는 문제임을 지적하고, 대한민국 사회가 성소수자에 대한 개그와 ‘드립’을 양심의 가책 없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열린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글을 끝맺고 있다.

모범적인 전개이지만, 여전히 뭔가 불편하다. 문제는 아마도 ‘게이 드립’과 모욕의 지점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글쓴이는 이미 PC의 정도를 흠잡을 데 없이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편함은 이 글이 그려내고 있는 도식에 있다. 그리고 내 감에 의하면, 이 도식은 최근 문제가 되었던 마레연 현수막의 도식과도 닮아 있다.

마레연이 마포구청에서 반려처분을 받기 이전 종로구에는 비슷한 현수막이 게첨되었다. 다만 차이가 있었다면 종로의 현수막은 ‘서울시민 중 ‘누군가’는 성소수자’라고 지칭하였다면 마포에선 ‘이 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라고 지칭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이 문구의 차이가 게첨 여부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나도 안다.

그렇지만 이 문구의 차이는 무언가를 상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성애자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아니면 사랑의 대상이 동성일 뿐인데 부당하게 차별 받고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불쌍한 동성애자들을 옹호한다. 그럼에도 ‘찬성’ 혹은 ‘반대’하는 측 모두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동성애자들을 자기 주변의 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자리를 지나고 있는 ‘당신들’ 중 동성애자가 있다는 지적이, ‘서울시민’ 중 동성애자가 있다는 지적보다 민감한 반응을 불러 일으킨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의 상상력이 동성애자의 존재에까진 미쳤을지언정, 더 가까이에 존재하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의 동성애자를 가정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최근 레즈비언 로맨스 웹툰을 표방하는 <모두에게 완자가>에서는, ‘현재와 같이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이 높은 사회였다면 우리 어머니도 레즈비언적 관계를 첫사랑으로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을 게재하였다가 여론의 집단적인 포화를 맞았다.

평소 말이 많던 웹툰이기는 했지만 평점도 나름대로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집중포화는 의외였다. 실제로 해당 화(69화)의 평점은 눈에 뜨일 정도로 낮다. 반발심은 결국, ‘어떻게 어머니를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느냐’라는 지점에서 왔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평소 동정적이던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에게도 동성애자라는 것은 비칭일 수밖에 없을까? 적어도 해당 화의 댓글란은 평소와는 압도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보인다.

ㅍㅍㅅㅅ의 해당 글이 불편한 것도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다면 훌륭한 PC의 베일을 쓴 글이었지만, 해당 글에서 동성애자는 진정 ‘나와는 다른 누군가’일 뿐이다. 왜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 훌륭하신’ 분들이 불쌍한 성소수자의 권리를 챙겨주고 계신다는 ‘시혜적 인권’ 개념이 생각날까? 애초에 이 글은 동성애자를 독자로 상정하지 않은 채 쓰여진 글이다. ㅍㅍㅅㅅ의 가열찬 독자이기도 한 나 자신이 이 글을 읽는 포지션이 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기존에 ㅍㅍㅅㅅ가 시도하고자 했던 관점과는 조금 다른 듯해 보인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어 보이는 관점으로부터 탈피해 별도로 생각해볼 만한 지점을 짚어온 편집방향, 혹은 옛날 딴지 남로당을 보는 듯한 느낌과는 매우 다른 ‘모범적’인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편한 지점을 많이 제공하는 글이기도 하다.



3. '게이 드립'의 금기시



동성애자는 본인이 드러내기 전에 확연히 알 수 있는 표징으로 차별 받는 것이 아니다. 여성 혹은 소수인종과 같은 소수자와 가장 큰 차이를 불러오는 지점이다. 동성애자 인권운동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드러내는 ‘커밍아웃’과, 그 반-테제로서 원하지 않는 ‘아웃팅’ 상황을 배제하는 데에 모순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이 특성에서 기인한다.

커밍아웃이 의미를 가지는 것과, 아웃팅이 방지해야 할 ‘사고’로 평가 받게 되는 것은 동성애자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를 둘러싼 사회적 인식이 더 큰 문제다. 사회적 인식 개선을 추구해야 할 문제인 것이지, 아웃팅 방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취해서는 안 될 방향이라고 이미 몇 차례 말했던 바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아웃팅의 방지는 동성애자의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옹호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옹호가 동성애라는 사실 자체의 언급을 금기시하는 방향으로 가기 쉽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으로 동성애자의 해방과 차별 철폐에 도움이 될까? 최근의 KSCRC 강좌에서 언급한 적 있는데, 클로짓 게이들의 경우 직장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은 감지된다. 그러나 이는 직장이라는 환경의 특수성을 반영한 선호로, 이 선호를 사회 일반 내지는 개인적 영역으로 끌고 가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게이 드립’을 ㅍㅍㅅㅅ의 관점과 같이 불관용의 위험징후로 해석하거나, 당사자가 개입되지 않으면 하기 힘든 개그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일반화 할 때 비슷한 무리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서는, ‘게이 드립’을 게이만의 것으로 전유하였을 때 이는 커밍아웃한 오픈리 게이만의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커밍아웃한 오픈리 게이와 클로짓 게이가 공존하고 있는 커뮤니티의 양상까지 생각할 때, PC의 베일을 쓴 채로 우리가 게이 드립으로 누군가를 웃길 수 있는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만다.

나에겐 그 드립이 정말로 웃긴데도 말이다. 흑인이 흑인 비하 개그를 한다거나, 전라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전라도 비하 개그를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4. 과소담론, 담론의 독점



결국 게이와 관련된 개그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게이에게만 부여한다는 인식은,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게 된다. 성소수자 담론을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수를 현저하게 줄이게 된다. 결국 이 담론 자체를 축소하고 마는 것이다.

일례로, 최근 김혜나 작가의 <정크>라는 작품이 그 참을 수 없는 저급함으로 – 나의 관점이다 – 회자되는 동안, 손아람 작가는 트위터에서 ‘루저 중의 루저’라는 말을 자신은 소수자성에 대한 예민한 이해로 생각한다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당사자들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다를 것이다.”라고.

<정크>는 동성애자를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소설작품이다. 소설작품에 대해 소설가가 이야기 하다가 소재인 동성애자의 당사자성에 의해 발언을 멈추거나 수정하는 것은 어떤 사고의 발로일까? ㅍㅍㅅ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는 정중한 PC의 베일을 의도한 것일 테나, 기실 판단하기를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성애 논쟁 국면에서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 자체로 ‘논쟁이 종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제공하는 정보의 신뢰도가 올라가거나 토론의 층위가 다양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성이 확보된 순간 논쟁을 멈추고, 모두 당사자의 말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정중할 지는 모를지언정, 진정한 이해라고 할 수는 없다.

결국 지금까지 계속 지적해온 바와 같이, 일종의 선긋기가 일어나는 것이다. 일전에는 커밍아웃한 연예인을 방송계에서 퇴출하는 것으로 그 선이 그어졌다면, 이제는 그 연예인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우리 모두 합의한 후,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저런 촌극이 벌어지고 있으리라. “나는 동성애는 이해하는데, 내 주변에 있다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동성애는 이해하지만 나에게 들이대면 안 된다.” 와 같은, 수 많은 모순어법이 구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퀴어는 존재한다. 당신이 어느 선에서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하였든지 상관 없이. 그 존재가 저지선을 넘어 흐를 때,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다시 한 번 걸림돌로 작용하고 만다. 그나마 오버그라운드에서 담론이 형성될 때, 그 성소수자 담론은 극히 일부의 존재에 의해 과대대표되는 문제를 빚고야 만다.

KBS의 케이블 채널에서 트랜스젠더 토크쇼를 만든다고 했을 때, 일단 제목부터 – XY 그녀 – 이것은 트랜스 여성에 대한 여성-억압의 일환이란 점을 민감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진행을 맡은 것이 기왕에 존재하는 트랜스 여성 연예인도 아닌 홍석천이란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라는 카테고리 전부가 과대대표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을 계기가 되었다.

홍석천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소재이다. 그가 방송에서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한다. 혹자는 홍석천이 게이 스테레오타입을 확대 재생산한다며 비판하고, 혹자는 그럼에도 응원한다. 하지만 정작 홍석천 개인의 언행과 품행이 방정해지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그 경우 성소수자에게 방정한 품행을 요구하는 또 다른 스테레오타입의 문제가 불거질 뿐이다.

정작 문제는 홍석천에게 있다기보단, 성소수자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커밍아웃을 한 운동가는 조금 더 있지만, 그 중에서 일반 대중에게 홍석천만큼의 인지도를 얻은 사람도 흔치 않다. 하리수는 어떨까? 그녀의 경우 너무도 성공적으로 ‘여성’의 카테고리에 안착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성소수자 대표성을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홍석천에게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발언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이 홍석천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일까? 기왕에 게이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을 것이라면, 적어도 당사자성에 의해 그들에게만 대표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것은 대표하는 이와 대표 당하는 이 모두에게 양쪽으로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5. ‘PC의 베일’은 왜 충분하지 못한가



정치적 공정함(Political Correctness=PC)은 적어도 여러 사람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최소한도로 지켜져야 할 규준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미국식 민주주의 혹은 진보라는 허상 아래 이는 어느 정도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PC는 어디까지나 최소규준이며, 항상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PC를 지켜주었으니 그 이상 내심이야 알 바 아니라는 태도는 얼마든지 문제적으로 변할 수 있다. 게이에 대해 PC한 업무환경을 만들어 주었으니, 개개인이 가진 호모포빅한 태도에 대해서는 잘 숨겨져 있기만 하다면 침묵해야 할까?


많은 경우 PC는 변명의 근거로, 면피의 구실로 이용되고는 한다. 모호한 내심의 문제가 많이 관여되기 때문에, PC를 판단할 때는 개인이 가진 평소의 태도가 많이 반영되곤 한다. ‘PC의 베일’이 그렇게 객관적인 편도 아닌 셈이다.

혹 ㅍㅍㅅㅅ 운영진이라면,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그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라면 나에게 불만을 가질 것이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 더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설령 내가 그 입장이었다 해도 더 잘 할 수야 없었을 것이다. 더 잘 하라는 제언이라기보단, 그 배후에서 작용하는 구도의 불편함을 말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그러한 것이다. 퀴어 운동을 한다는 것은 논리와 구호 이상을 말하고자 함인 듯하다. 태생적 불편함, 그 불편함을 서술하는 방식, 몸짓, 그리고 바로잡힐 수 없는 이물감과 같은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퀴어란 말 자체가 배제적으로 시작되었으되, 그 배제를 칼로 무 자르듯 선명하게 가져가는 것이 또 다른 배제라는… 그래, 나도 내가 뭔 말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ㅍㅍㅅㅅ가 성소수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는 점을 높이 산다고 할 지라도, 그 수단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는 점.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왜 그 페이스북 페이지는 굳이 미국식-게이-프로파간다 짤방을 가져다 썼으며, 그 댓글에서 글감을 ‘건져’ 하나의 PC한 글로 완성해 내었는가? 그리고 이 의문은, 그리고 지금까지 제기한 문제는 설령 ㅍㅍㅅㅅ에서 성소수자 필진을 발탁하여 글을 쓰게 한다고 할지라도 쉽게 풀리진 않을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게이가, 지금 상황에서 ㅍㅍㅅㅅ에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이 질문엔 ㅍㅍㅅㅅ가 자주 활용하는 ‘짤방’을 활용하여 답하는 수 밖엔 없을 것이다.



Posted by MECO


너무 오랜만에 쓰는 글이네요.

제가 요새 정신사나운일이 좀 많이 있었어서요. 그간 블로그에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도 못 정하고 공부도 못해서...그냥 멤버들 눈치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이런 상황이 여전할 것 같아서, 일단 그냥 개인적인 글을 쓰려고 합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한 생각일 뿐이고, 특정 종교를 비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들어오는 싸움 거절하진 않ㅇ(읍읍).

 


지금에야 신앙심이라고 할만한 것이 흔적기관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지만, 여렸을 적에는 꽤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을 믿으시는 두 분 부모님에 의해 영아세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토요일마다 미사를 다니던 꼬맹이였으니 말이다. 어릴 적, 가장 선명히 기억 남는 기억 중 하나가 헌금하라고 주신 천원 중 500원은 삥땅치고 나머지 500원만 헌금 낸걸 걸려서 죽어라 맞았던 기억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그 당시에는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 따라 들어간 성가대 때문에 매주 성당을 나가기도 했고, 꽤나 열심이었던 기억도 난다. 물론 지금 다시 돌아보면 어쩜 그렇게 맹목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지 의아하기만 하지만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신앙과는 조금씩 동떨어진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어릴 적의 나에게 신앙이란 숨쉬듯 당연한 어떤 것이었고, 오랫동안 주기도문, 사도신경, 성모송으로 이어지는 기도3종세트는 어려운 일이 있거나 또는 공포영화를 보고 잠 못 이루는 밤에 위안을 주던 것들이었다. 지금이야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처럼 긴 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전히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로 시작하는 성모송은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나에게 있어 종교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와 분명 맞물려 있을 테다. 언젠가부터 기독교의 그 공격적인 마케팅 기법이 어린 마음에 반발심이 들기 시작했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그 당시의 나에게 이라는 존재는 어떤 형태로든지 당연히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었고, 여전히 세계를 설명하는 한 부분으로서의 신앙이라는 것을 깨뜨리는 일은 요원한 일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증가하던 것과는 달리, 종교와 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활발했던 편이었었고, 일원론적인 기독교의 신앙을 벗어나 오히려 범신론적인 무언가를 믿기도 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무신론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해졌다. 무신론자로써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이 한 권 있는데,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이다. 서점에서 무슨 책이 있나 구경 다니다가 뒷걸음에 채인 책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반발심과도 비슷한 마음으로 구입했던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영향만큼은 어쩌면 인생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바꿔버린 터닝포인트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한 가지 이유 주 하나가, 그들의 무식한 진화론 딴지 걸기 때문이기도 한데, 생물학전공자인 도킨스 답게, ‘만들어진 신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진화론에 입각한 무신론이었다. 한국 대학의 생물학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진화론이 현대생물학의 근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학문적 탐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나 역시, 학부에서의 전공은 생물학이었지만 사실 진화론이라는 학문에 대해 아는 바는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이러한 실정과 맞물려 진화론에 대한 궁금증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개인적인 공부과정은 나를 과학적 무신론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진화론을 공부하면서 궁극적인 의문으로 떠오른 질문은 만약, 최초의 생명 (혹은 생명과 비슷한 어떤 형태)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면 우주에서 신이라는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있을까?”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내릴 수 있었던 답은, “없다였다.

물론 나는 과학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줄 수 있으리라는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학은 증거에 기반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수 많은 현상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으며, 지금까지 잘 작동하여 왔고 그 결과 우리가 세상을 과거와는 달리 더 많은 부분에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증거와 반증에 기반한 과학적 방법론은 과학이라는 학문을 지난 수백 년 동안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 주지 않았던가.

수십 년간 이러한 과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때때로 과학적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미혹되기도 하지만, 그건 그저 내가 아직 모르는 것들이 많아서 이지 어떤 초현실적인 존재의 개입에 대한 가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과학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며, 과학이라는 틀 안에서 증거와 반증에 닫혀있는 신이라는 존재는 그 정당성을 잃고 만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러한 태도는 게이로써의 내 성정체성과 맞물려, 기독교와 기독게이에 대한 내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한때 교류가 있었던 일부 게이들 중에 주말마다 열성적으로 종로 어딘가의 교회를 다니던 분들이 있었다. 종로의 모처에 성소수자를 위한 교회가 있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그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곳의 목사님이 게이 프렌들리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나 추측해볼 따름이다. 하지만, 비록 방금의 예처럼 일부 기독교 단체는 성소수자에게 관대하고 그리고 세계적으로 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하지만, 여전히 주류 기독교 단체 에서 성소수자는 차별과 박해의 대상일 뿐이다.

여기서 나는 의문점이 하나 들게 된다. 기본적으로 종교를 믿는 이유가 마음의 위안을 찾고 어떤 식으로든 구원을 바라는 것이라면, 나를 부정하는 종교에 이처럼 맹목적인 믿음을 쏟을 수 있는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나에게 물리적인 목소리로 나는 너희들을 차별 없이 사랑한다라는 계시를 내려주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신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아!” 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오류와 모순이 그렇게도 많은 성경에서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구글링으로 성경의 모순을 검색해보세요), 예수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 우리를 차별하는 너희가 예수님의 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예수님이라면 우리를 차별하라고 하지 않으셨을거야!’ 라고 정신승리 하면 내 마음이 편해지는가.

나는 굳이 이 글에서 기독교를 믿는 기독게이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종교라는 것이 개인의 선택이 아닌 집안의 내력으로 믿는 경우가 대다수임을 비춰보았을 때 (물론 누군가는 신앙은 나의 개인적 선택이다 라고 말하고 싶을는지 모르겠으나, 과연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환경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땠을까 라고 반문하고 싶다), 어려서부터 고착화된 어떤 믿음을 탈피하는 것은 고난한 과정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주류과학을 공부하고 과학적 무신론의 세계관에 경도되어 있는 나에게 차라리 믿지 않으면 편할 텐데라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다.

무신론자이자 게이인 나에게 있어서, 비록 종교의 사회적 순기능이 존재함을 부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의 거대한 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를 이고 로 단정해 버리고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를 어떻게 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인간의 동정심, 도덕본능 과 같은 것이 분자적 수준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 이 시대에서, 나는 종교가 없다고 하여 갑자기 세상이 아마겟돈의 수렁텅이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굳이 종교적이어야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는 아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종교란 없어져야 할 무언가 이며, 그를 통해 게이로써 나의 권리와 행복이 더욱 증대될 것이라고 생각함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지 모른다. 물론, 비종교인의 호모포빅한 기질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또한, 종교라고 하기 애매한 유교적 가치관이 뿌리깊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만이 성소수자의 차별에 앞장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종교세력의 약화는 우리의 사회적인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한 노력에 분명 큰 일조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바로 얼마 전 대선에서도 우리는 목격하지 않았는가? 두 거대 정당이 기독교계의 입김에 의해 성소수자의 권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 법안의 입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을.

그렇기에 나는 무신론적 사고방식의 확산을 바란다. 단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스스로도 근거를 댈 수 없는 믿음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성적 취향에 정조대를 채우거나 정신승리를 일궈내는 것 보다는, 나 자신의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여 좀 더 명확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좋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언젠가 메코가 이 글에서 언급했던 ‘아웃팅의 낙폭을 줄이고 우리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것에 일조하리란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도킨스가 말했다.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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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CO




2012년 9월 말, 고종석 씨가 절필을 선언했다.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 달포 전쯤, 술자리에서 친구 차병직이 자조적으로 “책은 안철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 우린 아니지!”라고 말했을 때, 나는 진지하게 절필을 생각했다.” 라는 말이 그의 심경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 글은, 그의 말대로 무력해 보인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 했다면 구백구십구 가지 이상의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세상을 바꾸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비효율적인 선택이었는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뿐이다.


퀴어 인구 비율이 높은 편인 서울시 마포구의 LGBTQ 모임인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가(이하 '마레연') 지난 11월 소위 ‘퀴어 현수막 대작전’을 시도하였다. 현수막을 거는 형태의 퀴어인권운동은 버스 및 대중일간지 광고와 더불어 최근 등장한 ‘핫’한 방법이다. 사회운동가 이계덕 씨가 올해 한 가장 큰 기여 중 하나는 종로구에 최초로 현수막을 내건 것일 테다. 주목을 받고 싶어 했다는 비난도 있고, 굳이 이렇게 일반대중을 향해야 하느냐는 방법론적 회의도 있었다. 하지만 이 현수막이 꽤 큰 호응을 얻었고, 나름의 버즈를 형성하였으며, 마레연이 꼭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비슷한 방식을 택했다는 것은 나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계덕 씨가 종로구에 게시한 현수막의 문구는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 서울시민중 누군가는 성 소수자입니다. 모든 국민은 성적지향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갖습니다” 였다. 마레연은 “지금 이 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입니다”와,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라는 두 개의 현수막을 1월 초까지 게시하려고 하였다.


"옥외광고법령에 해당 내용을 금지하는 내용이 없고, 국가인권위원법 제2조 3항에 '성적지향에 의한 차별'을 할 수 없다고 담고 있어 광고물 게첨을 반려할 법적 근거가 없어 게첨을 허용했다"는 종로구청과는 달리, 마포구청은 난색을 표했다. ‘난색’이라는 구어를 차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마포구청이 공식적으로 반려처분을 내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수정을 요구해왔을 뿐이다. 1번 현수막의 사람들이 옷을 입지 않고 있는 묘사(해당 ‘사람들’은 2등신 캐리커쳐였다)와 해당 문구의 어미가 반말인 점, 손가락으로 ‘여기’를 가리킨다는 점 등에서 혐오감을 조성할 수 있으며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제5조에 의거해 마포구청 도시경관과는 이 문구와 그림의 수정을 요구했다.


마레연은 해당 수정요구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규정하고 민원과 여론 조성을 통한 대응을 선포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여 행동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퀴어 인권운동에도 분명 이와 같이, 이익단체적 성격을 확실히 하여 행정에 과부하를 주어 자신들의 존재를 확고히 인지시키고 원하는 처분을 받아내는 방식이 기여할 여지가 있다고 믿는다.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나는 마레연을 지지한다. “감히 날 없는 사람 취급해?”라는 분노 때문일 것이다. 민원글 하나 정도 쓰기는 쉬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당연히 분노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그것에 왜 분노하는지 설명을 하는 것조차 모욕적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기실 나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역시나 이로서 괜찮은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최근 어떤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퀴어 사회의 ‘선두주자’들이 앞서 나가고 있을 때, 납득하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뒤떨어진 채로 ‘저것은 뭘까’ 하는,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황 말이다. 나는 인권운동이 –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지금 인권운동이 그러한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소위 ‘일반 대중’을, 최소한 설득할 시도는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런 설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뱀다리에 발가락 무좀까지도 그려보고 싶어진다.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마포구청의 수정요구가 불러오는 모욕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양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걷어내고 보아도 이것이 얼마나 어이 없는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들은 지금껏 너무도 당연하여 말하지 않은 것들이다. 왜 여기에 분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 당연하지 않은 어감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단지, 그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길고 긴 유폐



당신을 (어디까지나 글쓴이 MECO가 게이이기 때문에) 게이라고 해보자. 학창시절 구기종목은 별로였지만 같은 반 활발한 그 아이를 좋아했다. 그 마음은 품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귄 여자친구와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으면 가슴은 멍이 들면서도 어찌 되었든 그와의 연은 이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를 보지 않는 것은 더 큰 고통이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만나는 친구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다 그는 묻기도 한다. “그런데 너는 요즘 별 것 없냐?” 뼛속 깊은 호모포비아인 그를 아는 당신은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요즘 사는 게 바빠서…” 그는 바빠서 연애를 안 한다기 보다는 눈이 x나게 높은 거라며 당신을 잠시 타박한 후, 자기 이야기로 돌아간다.


당신은 드러나는 존재일 수 없다. 물론 어려서부터 커밍아웃을 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으며 행복한 삶을 사는 성소수자가 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여, 타자화되는 것을 피하며 대등한 교류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었던 이들에게 ‘왜 그러지 않느냐’며 각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 누구든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요구 받을 수는 없다.


자신을 지칭할 말을 찾지 못한 부유하는 영혼과 몸은, 각자 시차를 달리하여 도시의 게토로 흘러 들어온다. 종로 모처의 바에 기대어 ‘내가 열 살만 어렸더라면’을 읊조리는 ‘언니’들이 있다. ‘그 땐 다 그랬어’라며 뒤늦게 찾지 못한 삶을 없었던 셈친다. 심지어 서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일부만을 서술하게 되는 이 두려움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많고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설령 성소수자란 사실은 나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다른 많은 것들이 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자부하였더라도, 결국은 쫓아와 나를 붙잡고야 마는 이 오래된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앞에서 나는 드라마틱해질 수조차 없다.


집단서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새겨진 정서가 존재한다. 혹자는 피해의식이라 부른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롯이 내가 못났기 때문은 아니다. 이야기를 하는 순간 받게 될 욕설 가득한 문자가 존재한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같이 밥을 먹었던 내가, 더러운 것인양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당신이 존재한다. ‘난 그런 거 이해 못해’라며, 적어도 나에겐 본질적이었던 이 문제를 한 때의 방황인 양 치부해버리는 취급이 존재한다.


직장에서의 눈에 띄는 차등이 존재한다. “차별하면 안 되지만, 솔직히”로 시작하는 수많은 차별이 존재한다. 결혼을 하지 않는 당신에 대한 수군거림과 일종의 강압이 존재한다. 단지 당신이 스스로 느끼는 성별불편감을 바루기로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직종이 극히 제한되는 경험이 존재한다. 회사는 고용인의 의료보험을 책임지지만 어떤 병에는 해고와 사회적 멸실에 이르는 낙인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나 자신의 존재보다도 선명해 보인다.


이 모든 것을 숨김으로써 유예할 수 있다. 벽장은 그나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안전한 쉘터, 아니, 이동식 요새이다. 숨어있을 공간이란 걸론 하루하루 수행하는 이 전투를 오롯이 설명할 수 없다. 어느 날 벗어 던질 생각만 하는 이라 할지라도 자동으로 주어져 있는 이 요새를 당장 버리고 나가는 일이야 할 수가 있을 리가 없다. 안전은 할지라도 벽장은 무겁다. 이걸 지고 생활하는 것은 어떤 말로도 대체할 수 없는 큰 불편이다. 그것은 자발적인 듯 자발적이지 않은 유폐이다.


이것이 자발적이지 않은 유폐라는 점은, 마레연과 같이 존재를 드러낼 때 주변에서 보이는 반응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잠시 엿보았던 벽장 바깥의 세계는 역시나 차갑기 그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소리 높여 주장하기로 하였을 때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이중의 탄압이다. 그 때 당신에게 모를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지의 상태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 있다는 이야기부터 하여야 한다. 당장 ‘내’가 이 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인정한다. 그것은 내가 겁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우리 주변에 있다는 이야길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누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당연해졌을 때, 성소수자는 비로소 보일 것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의심한다. 열 명 중 한 명이라는 것이 정말인지, 그냥 하는 소리인지. 너무 나간 이야기가 아닌지 의심할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지금 여기 있다는 이야기는, 할 수밖에 없다. 당장 네 앞의 내가 바로 그 게이라는 말을 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래서 가슴을 내리치다 못해 답답해서 익명의 보호를 받아 허공에다 겨우 작게 소리 낼지라도, 어쨌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이야기를 막는 것은, 혐오감을 줄 수 있으므로 수정하라는 것은 모욕이다. 지금까지 숨겨왔으니 계속 숨기고 있으라는 결탁에 다름 아니다. 사실상 숨길 수 밖에 없으니 숨겨야 한다는, 잘못된 사실의 왜곡된 규범화다. 왜 굳이 지금이어야 하냐는 말을 한다. 굳이 그런 방식으로 말을 해야 하냐는 도움 안 되는 걱정도 해준다. 지금이어야 한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쩔 텐가?




왜 굳이 ‘여기’인가



마레연이 처음 사태를 공개하였을 때 일각에서는 마포구청이 ‘부동산 값’이 떨어질까 우려하였다는 시각을 공유하였다. 마포구청이 반려한 사유인 ‘혐오감을 줄 수 있는 그림과 손가락질, 무례한 반말투’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마레연이 게시하고자 한 현수막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을 종로구에 성공적으로 게시한 이계덕 씨의 사례를 보면 조금 더 분명해진다. 동일한 옥외광고법령에 따른 심사를 수행한 종로구와 마포구의 도시경관과는 서로 다른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마포구 도시경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반복적으로 ‘미풍양속, 청소년 보호’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실질적으로 마포구가 난색을 표하는 이유는 현수막의 성소수자 친화적인 내용일 것이다. ‘미풍양속’과 ‘청소년 보호’를 위해, 성소수자가 바로 지금 여기 있다는 표현을 허용하기가 힘들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공격적 어투로 쓰여져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 마포구청의 솔직한 입장이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종로구는 해당 현수막을 게시할 때,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검토하여 차별금지에 관한 조항이 있으므로, 옥외광고법 제5조의 ‘음란하거나 퇴폐적인 내용 등으로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것, 청소년의 보호ㆍ선도를 방해할 우려가 있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지를 펼쳤다. 마포구청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갔다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마포구청은 오히려 현수막의 본지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한 검토를 하는 대신 그에 대한 불편감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수막에 표현된 그림과 손가락 표시 등을 문제 삼는 쪽을 택했다.


이는 뿌리 깊은 논쟁과도 맥이 닿아 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 양상에서 ‘현명한 전략’을 주문하는 어떤 의견이 있다. 미국의 인권운동 맥락에서, 시간적으로 앞선 동성애자 옹호 운동은 사회적 인정과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인정을 목표로 삼았다면, 후에 등장한 게이 해방운동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고자 훨씬 더 원색적인 방법을 취했다. 이 두 방법론은 여전히 공존하면서 인권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한다.


전자의 의견에 심리적으로 동조하면서, 성소수자가 사회제도를 흔드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적극 개진하자는 주장이 있다. 왜 굳이, 안 그래도 예민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일반 대중을 자극하여 뒤흔드냐는 것이다. 마포구청은 그러한 ‘자제’를 주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전략은 대한민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공존할 수 없을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략을 당사자 아닌 다른 이들이 요구할 수 있는가? 이는 결국 당사자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운동’의 ‘자제’를 요청하는 행정편의적인 발상이요, 복잡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행동이다. 그렇기에 여기여야 한다. 그럴 이유가 달리 어디 있겠는가. 지금 마레연이, 성소수자 본인이 이 곳에 보이기를 원했기에, 여기에 그 의사가 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의사가 정해진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자제’를 요청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실정법’에 관해. 국민의 권한을 위임 받은 의회가 만든 법을 행정기관이 적용할 때 일정한 재량을 부여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재량은 무한대의 재량이 아니며, 입법에 의해 적절히 기율된다. 이미 종로구청이 한 번 보여준 바와 같이 옥외광고법과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해 사실상 현수막 게시를 허락하는 방향이 요구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마포구청이 이와는 다른 방향의 결정을 그대로 밀고 가고자 한다면, 행정심판과 소송 내지는 손해배상청구 등에서 자신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부담은 마포구청의 것이 될 것이다.


왜 굳이, 난색을 표하는 마포구여야 하는가. 잘못된 질문이다. 왜 마포구는 안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굳이 본심과 달리 그림 표현을 문제 삼아 가면서까지 타협해야 하는 이유를 물어야 한다. 엄밀하지 않은 표현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하고자 한 말을 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자유이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사용되기로 한 공공의 권한이 이 자유를 사실상 저해하는 것은, 분노의 이유로 이미 차고 넘쳐 보이지 않는가.


아직도 분노의 이유가, 궁금한가.




‘슬픔과 분노’에 관해



2012년, 눈 내리는 서울엔 현수막 두 장에 분노하기엔 너무도 큰 사안들이 많아 보인다. 누군가는 송전탑 위에서 목숨을 걸고 떨고 있고, 다음 대 대통령에 독재자의 딸이 당선되어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로 방향타를 돌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혹자는 말한다. “왜 너는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라고.


그것이 작은 일이었는지 다시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다. 당장의 목숨이, 수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종국적으로 결정되는 일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는가? 다시 생각한다. 작년의 종로 ‘묻지마 폭행’을 다시 생각한다. 역시나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무게를 재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똑같이 중한 일일 것이다. 그럼 다시 한 번 묻는다. 왜 그렇게 이 일에만 분노하는가.


솔직히 고백한다. 이 글을 쓰는 시간의 십분지 일이라도 다른 중한 일에 써본 적 없다. 나를 움직인 것은 즉각적인 분노이다. 그리고 그 분노를 추동한 것은 아마도 슬픔일 것이다. 혹은, 자기 연민. ‘마레연’의, 그리고 ‘당신’의 일에 대해 쓴 것처럼 보이는 이 글은 사실상 나의 일이다. 나를 드러내고 싶어도 드러낼 수 없기에, 그렇게라도 내가 있음을 증명하는 일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걸 막으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에서 존재의 위기마저 느낀다. 그렇기에 익명의 아이덴티티가 선사한 가면을 뒤집어 쓰고서, 무엇이라도 말하고저 끊임 없이 시간을 태우고 있다. 말이 이어지지 않아 패퇴에 가까운 심정마저 느낀다.


그럼에도 계속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글로써 풀어내길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근절할 수 없는 이 열패감을 이기기 위해서는 지지 않고 지껄이는 수밖에 없다. 숨은 의도, 옥외광고법령, 국가인권위원회법, 수익적 처분 혹은 그 어떤 말이라도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해불가능한 분노라 예정되어 있을지라도 이해를 구할 수밖에 없다. 예정된 실패의 반복이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을지라도 가능성을 꾸준히 이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마레연을 지지한다. 고작 현수막 두 장 때문이 아니다. 나의 슬픔과 그로 인한 분노 때문이다. 이걸 이해 받을 수 있는, 꾸준히 실패할 바로 그 가능성 때문이다.



2012. 12. 7.

ME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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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전 채터박스 블로그를 뒤로 제쳐놓고 푹 쉬면서 간만에 학문에 정진하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다른 팀채터박스 일동들도 다들 말은 안 하지만 글을 안 올리는 걸로 보아 저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는 걸 의심치 않습니다 흐흐흐흐

나날이 실력이 늘어만 가는 잠수에 푹 빠져있던 와중에도 가슴이 선덕선덕한, 반가운 소식이 있어 이렇게 이벤트글로 여러분들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송희일 감독이 2006년에 퀴어영화 '후회하지 않아'를 들고 찾아온 지 정확히 6년 째인 2012년 11월 15일에, 뜨끈뜨끈한 퀴어영화 연작들로 다시 나타날 예정이랍니다. 영화 '백야 White Night' (2012), '지난여름, 갑자기 Suddenly, Last Summer'(2012) '남쪽으로 간다 Going South'(2012)가 바로 그것이죠. 물론 그 사이에도 김조광수 감독의 '친구 사이?' '두 번의 결혼식 한 번의 장례식', 김경묵 감독의 '줄탁동시', 소준문 감독의 '올드 랭 사인' '종로의 기적' 'REC 알이씨' 등이 영화관에 걸리긴 했지만 KOFIC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으로 2010년, 2011년 한 해 동안 모두 429편, 439편이 극장에 걸리고 있다는 현실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바닥이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붓는 가느다란 물줄기 몇 개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절대적인 양조차 부족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송희일 감독만의 퀴어영화를 그리워 하던 이들에게 지난 6년간은 결코 어떤 영화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를 감내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바로 이제, 그 갈증을 풀 시간이 온 것 같아 정말 반갑기까지 합니다.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다들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는 건 반가운 일이 분명한데, 이게 그토록 가슴선덕선덕해할 반가운 소식인지에 의문을 갖게 될 분도 계실 줄 압니다. 하하, 물론 이게 끝은 아니구요. 영화의 성공적인 흥행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는 것 같은 백야 트위터 공식홍보계정 @2012whitenight 의 지원에 힘입어 다가오는 11월 12일 월요일 저녁 7시 무렵에 종로 부근에서 열리는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연작 '백야' '지난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 특별시사회에 팀 채터박스가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팀 채터박스 블로그를 열독해 주시는 독자 여러분 중 몇 분들께도 같이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무나도 가슴이 벅찹니다.

 이벤트 참여를 위한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 앞서 영화 소개를 간략히 해드릴까 합니다. 일단 주시는 떡(?)은 웬 떡이냐며 감사히 넙죽넙죽 받았지만 단순히 떡의 대가로서가 아닌, 올해 6월에 열렸던 인디포럼에서 앞서 이 영화들을 감명깊게 보았던 관객의 경험으로 비춰보아도 인상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소개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차 ㅎㅎㅎ 연작 중 '남쪽으로 간다 Going South'는 올해 6월까지도 나오지 않았던 작품이라 이 작품에 관해선 아무런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점은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같이 가서 보아요!

 

 

백야 White Night, 2012

 

  "...우연히 만나, 특별한 관계가 될 것이라는 생각 전혀 없이 호감보다는 반감, 혹은 무관심에 가까웠던 두 사람이 하루를 같이 보내면서 자신을 잘 알고 아껴주는 그 누구보다도 서로의 마음에 위로가 되는 그런 관계가 된다,(중략)...가 ...와 함께 보낸 하루의 기억으로 인해 영화가 끝났을 때 인생에 조금 더 힘을 얻었으면 했다. '만남'이란 건 그런 것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오늘도 어딘가에 사는 어떤 게이는 분명히 한국을 하루 빨리 뜨고 싶은 공간으로 마음 속으로 호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이 곳은 오늘 와서 내일 가야 하는 경유지로서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을지도요. 한편, 지금은 당장 비록 척박스러운 땅이라 침을 뱉더라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으로 여겨 언젠가 자신이 지지고 볶고 살 공간으로 바라보는 게이도 있을 겁니다. 이런 이중적인 공간에서 서로 아무런 접점없는 이들이 얽히게 되는 어느 실 한 자락의 끄트머리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백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들의 얽힘을 담아낸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왠지 현빈과 탕웨이가 주연했던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 Late Autumn' (2011)가 떠올랐습니다. '만추'에서 그려낸 하루 동안 현빈과 탕웨이가 거닐던 시애틀이 안개를 듬뿍 머금은 공간이었듯이 영화 '백야'에서 화면에 담아낸 원규와 태준이 다니는 종로거리는 그 특유의 쌀쌀하고 어두운 밤기운에 둘러쌓여 있는 곳입니다. 접점을 찾기 힘든 이 두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함께 보낸 밤시간이 어떻게든 굴러가 '진짜'로 되어가는 이야기는 또한 '만추'에서 애나와 훈 사이에 작용하던 미묘한 척력이 인력으로 변해가는 과정과 유사하기도 하죠. 제논의 역설에서 등장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나가면서 거리는 점차 좁혀가지만 결코 만나지 못했다던 아킬레우스와 거북이마냥 좀처럼 서로를 마주 보지 못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변해가고, 끝내 진짜가 되고 마는가에 대한 차분한 서술이 인상깊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엔 지난해 일어났던 모 사건을 배치해 소재로서 활용하는 솜씨도 흥미롭기도 했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비로소 나오기 시작하는 배경음악은 ...다소 애잔하기도 하네요.

 

아, 그리고 백야 소개글 서두에 인용한 말은, 이송희일 감독의 '백야'에 관한 말씀이 아닌 김태용 감독의 '만추'에 대한 코멘트입니다. 안 놀라셨어요? 놀라야 하는데... ㅜ

 

 

 

지난 여름, 갑자기 Suddenly, Last Summer 2012

 

 

어느날 느닷없이 선생님의 일상에 끼어들어 자리 하나를 차지하는 남학생의 이야기를, '지난 여름, 갑자기'는 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간적 배경이 되는 여름날만큼이나 답답하고 속이 타는, 도무지 알기 힘든 그들의 사연을 담담하게 생각해보게 되는 영상입니다.

 단편영화 '지난여름, 갑자기'에서는 꽤나 자주 중간중간 선생님과 남학생의 모습들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데 이로 인해 그 모습들이 더 확대되고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차 안에서의 그들이 대치하는 상황을 보여줄 때 부러 그들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날 때 느껴지는 그 무더움과 답답함이란!

더운 날, 귀를 꽉꽉 틀어막은 헤드폰, 있으나마나 한 바람을 감질나게 일으키는 미니선풍기,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손수건, 그 와중에 그나마 시원해 보이는 한강유람선. 안 그래도 더운 날 이 두 사람이 설익은 감정을 우컥 쏟아내는 모습들을, 슬슬 추위가 찾아오는 가을이 되고 나선 가끔씩 그리워하게 되는 그 모든 더위를 이 영화에서 맛보실 수 있습니다 ㅎㅎ

 

남쪽으로 간다 Going South, 2012

 

 

이는 올해 6월에는 만들어지지 않았던, 혹은 공개되지 않았던 미공개단편이라 여러분과 같이 공평하게 감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어서어서 이벤트에 응모하셔서 같이 즐겁게 감상합시다! 사진만 봐도 가슴이 뛰네요~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벤트 응모방법!(궁서체임. 내리던 스크롤 그만 멈추셈)

1. 이 글(이벤트: 특별시사회 나눔글)에 '응모합니다'라는 댓글과 함께 이메일주소를 남긴다.

혹은

2. 팀채터박스의 공식트위터계정(http://twitter.com/chatterbox_gays)의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연작 특별시사회 나눔이벤트를 홍보하는 트윗을 RT한다.

응모하시는 분들 중 몇 분을 뽑아 팀 채터박스 일동들과 동일한 날, 동일한 영화관, 동일한 스크린, 동일한 퀴어영화를 보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특히 이번 특별시사회에는 157분에 달하는 상영이 끝난 후에도 이송희일 감독과 출연배우들의 GV가 있을 예정이라니 더욱 알찬 자리가 될 겁니다.

 

추첨은 금요일, 팀 채터박스 멤버들이 모일 때 한꺼번에 추첨할게요.

모두들 Good Luck!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0월달에 할당된 글의 채무불이행을 피하기 위한 꼼수.

최대한 머리 안굴리는 포스팅으로 나가보자 특집...

지난 10/2~3일의 채터박스 멤버들의 (except 호랑이 @Albus_Tigris) 정모 후기를 준비해 봤습니다!

내가 귀찮게 카메라를 챙겨간 이유는 모두 이것을 위한 준비작업이었어!!

 

가끔, 비정기적으로 만났던 것 같긴 합니다만,

이날의 모임은 좀 더 의미(?) 있게 모였던 날이었죠!

일단 우리 귀여운 가토가 소집해제 하고 학교도 복학하면서 '자취'(<-요거 중요해요, 장소제공가능한 남자는 언제나 사랑받는 법...)를 시작했기에! 가토의 앞날을 축복(응?)하는 의미로 집들이를 빙자한 B Party가 있었던 날이었거든요! (...라지만...정말 그랬을까..?)

 

 

PART 1. 아저씨없는 오지상 함박스테이크

일단 시작은 녹사평에 있는 어딘가의 맛집을 찾아 가기로 했었죠.

살짝 늦은 저를 기다리고 있는 나머지 세명의 멤버들.

아니 근데 왜 첫마디가 "어머, 언니 오늘 애인도 없는데 왜 예쁘게 하고 온거야?"

....응...?네...?...뭐라고...?

ㅜㅜ 저의 저날 패션컨셉은 [왠지 종로 어학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땍스러운 일틱 복학생 남] 이었는데요! 예쁘게 라뇨!!!

땍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한 아이템으로 '군모'도 착용하고, 청바지는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제일 통큰 청바지 였는데! 티셔츠도 무늬없는 회색 티셔츠...하지만...저러한 나의 항변은 씨알도 안먹히고...흙흙...오히려 온갖 트집질만...

아무튼, 식사담당이었던 람쥐군(@stress_surpluss)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맛집선정에 실패하였기에, 일단 돌아다니다가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오지상 함박스테이크>

어...어머...오...오지상...이라니...개인적으로 '연하'에 집착하는 야생형...이라지만...그래도 저런 단어는 들으면 마음이 설레어요. 꺆!! >_<

 

오지상이라니...왠지 짤방에 있는 회색수트남 같은 아저씨가 앞치마를 두르고 함박스테이크를 만들어 줄 것만 같은 음식점 이름 아닌가요! 멤버들의 망상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But...역시 현실은 현실일 뿐이었어...

 

이 한장의 사진으로 모든 감정을 대신하겠어요. 오지상은 어디...

뭐...Hot한 오지상이 없다는 실망감과는 별개로, 음식은 아이 마이쪙 >_<b

 

요런 후라이팬위에 고기덩어리가 뙇.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베이컨-치즈-에그-갈릭 함박스테이크 되겠습니다.

고기가 엄청 두꺼워요. 음식도 깔끔. 베이컨은 참 먹음직 스러워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난 그알릭...

 

사이드 메뉴로 '치킨 가라아게?' 라는 닭튀김도 시켰고용. 아...배고파...하지만 오늘의 나는 기껏해야 구내식당이겠지...

아저씨가 없어도 맛있었던 저녁식사를 마친 뒤, 우리의 람쥐찡은 역시 카드덕후인 것을 증명이나 하듯 뭔가 할인되는 카드로 할인을 받더군요. ...저런 개인 음식점에서도 카드할인이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람쥐찡 멋있당...

 

먹었으면 마셔야죠! 된즈앙질의 기본 아닌가요? 경남갱남 된장남을 지향하는 야생형은 외식했으면 커피를 마셔줘야 합니다.

...때..때릴거야...?

 

<카페내부>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음식점과 멀지 않은 곳 지하에 있던 카페였어요.

룸이 하나 딸려있는데 아숩게도 이미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패쓰.

...Meco찡(@meco_vibre)은... '어차피 난 다리가 길어서 불편해' 라는 요지의 드립으로 듣는 사람들의 어그로를 끌어주셨고...(너 미워요)

 

각종 드립난무에 앞서 음료는 필수죠.

그리고 빵빵 터지는 드립의 향연...

그...근데 이제와서 생각하니 기억나는게 없어...ㅜㅜ 원래 드립이란 터뜨리고 나면 잊는법...

 

그리고 문제의 짜빠게티.

 

카페에서 왜 짜빠게티를 파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침 저날 짜빠게티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더랬죠.

뭐, 자세한 설명은 패쓰하죠. ㅋ

하...하지만, 맛있었어요!

 <쉬어가는 코너>

- 다음 땡땡땡 중에서 북반구에 위치한 것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

1. OO의 휴일

2. OOO의 잠 못이루는 밤

3. Don`t cry for me OOOOO

정답은 댓글로 남겨주세영.

마침, 카페에 있는 TV에서 1:100 이라는 퀴즈 프로그램을 하던데...나 빼고 다들 잘 맞춰...

난 3번은 정말 모르겠던데...어째서 너희들은...

 

카페에서의 즐거운 수다 앤 드립타임을 보내고 나니, 벌써 열한시가 가까워 지네요.

녹사평까지 왔는데 이태원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죵. 하지만 아직 어딘가 가긴 이른시간...

그 이른시간에 이태원엔 와본적이 없었던지라...게이힐을 올라가봐도 사람들은 보이질 않고. 심지어 퀸마저 아직 영업을 안해...

그래서 Soho라는 이름의 술집?바?클럽? 뭐라그래야해. 그런분위기...

나..나름 이태원은 펄스랑 퀸밖에 안가본 꼬꼬마 게희라서 그런곳은 처..처음...

 

주문하고 앉아있으니 주인아저씨가 저런 야광팔찌를 채워주시네요. 아니 어쩜 저렇게 네명 모두에게 핑크만 채워주시는지...

원래 남자라면 핑크지! 손만은 다들 땍땍해...

연휴 끝물이라 그랬는지 사람도 별로 없고...게이바 라는데 남자랑 여자의 비율이 비슷비슷해 보였...핥아주고 싶은 남자도 없고...

저는 그냥 스크린으로 나오는 각종 뮤비들만 보고 있었더랬죠.

그러다 발견했어요. Get my money back.

http://youtu.be/ic65OSynCf8

어머, 이건 꼭 봐줘야해...바람직한 동영상이야....

http://youtu.be/IM3eeH_U0cw

그리고 우연찮게 발견한 그날의 또다른 hot 뮤비...제목을 몰라서 못찾고 있었는데...같은 가수거였구나...전 뒤에것이 더 좋네요. 어머...참 바람직한 뮤직비디오야. 국내도입이 시급합니다.

룰루랄라 뮤비보면서 시간때우고 있으니 퀸이 문을 열었네용. 퀸에서 좀 놀다가 그뉵그뉵 게희님들이 찾는다는 클럽엔 그냥 잠깐...거기서 뭔가 하기엔 우리가 너무 왜소했어...헑헑...

그렇게 이태원에서의 클럽탐방을 마무리하고 갸또네 자취방으로 향했죠.

 

PART 2. 준비된 그 남자 가토(@tmlovewillkme)

이태원에서 멀지 않은(먼가..?) 모동네의 가토군의 자취방.

저도 자취를 몇년 해봤지만...보통 남자의 자취방이라면...엄청 더럽거나, 아예 뭐가 없거나...인데...

어머, 이 아이. 누가 섬세한 아이 아니랄까봐. 집이 너무 잘 꾸며져 있는거에요. 예전에 집준비 한다고 할때 뭘사네 뭘사야지 이럴때 알아봤어야 했어...제 자취생활이 오버랩되면서 조금은 창피해졌어요...

오늘을 위해 술을 준비했다는 두 남자. 가토와 메코.

집들이에 선물준비하는 것을 깜빡 잊은 섬세하지 못한 저란 남자... 현물투자를 하기로 하고 치킨을 시켰죠.

 

가또가 준비한 가토 니그로...

메코가 준비한 호세 쿠엘보?

전 술엔 조예가 없어서...알콜도수가 높아지면 다 똑같아지는데...뭐가 다르데요. 뭐가 다른걸까...

와인은 내가 마셔본 것 중에 가장 드라이 했는데...다른 사람들은 이정도면 드라이한거 아니라고...(아냐 역시 생각해보니까 탄닌감이 많이 느껴지는건 드라이가 아니고 무겁다고 표현했던게 맞는거 같아. 그..그니까 저건 드라이했...)

아무튼 술과 치킨으로 본격적인 집들이가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두번째 안주로 가토의 사랑이 담긴 브!라!우!니!

 

가....아니고....

 

호두가 잔뜩 들어간 브라우니.

마...맛있어영! 제과제빵이 취미인 천생남자.

 

술과 브라우니를 먹으며, 얼마전 슴가아픈 일이 있었던 람쥐찡을 위로하다보니 어느새 새벽4시.

연료효율이 좋은 저는 술 한두잔이면 밤새 취해서 놀 수 있어영. 온몸이 빨개져서 방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더니 다른 멤버들이...치...침대로!!!!!!

그...그렇게 저는 가토와 한이불을 덮고 잔 사이가 되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흙...ㅜㅜ

 

정신없이 자다보니 벌써 아침.

세수를 하다보니 '어머 오늘 피부가 왜이렇게 좋아?' 라고 혼자서 자화자찬하며 세수를 마치고.

가토를 깨우니, 알아서 요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오토매틱 메이드 같은 남자.

가토의 아침요리 3종세트. 심지어 샐러드에 분홍색 저것은 연어!!! (라지만 난 연어 잘 못먹어...)

너님들 남자 자취방에서 밤새 술마시고 이렇게 아침까지 차려주는 남자 본적 있나여!

우리 가토가 이런 남자야! 내...내것이 아닌데도 이래! 근데 자기 남자 생기면 얼마나 잘해주겠어?

저것들 외에도, 도라지청이 들어간 차도 만들어줘, 인삼도 갈아줘, 사과도 깍아줘, 돈까스 튀겨줘, 스프까지 해줬... 이제 남자만 생기면 다 될것같아...

정말, 빈말이 아니고 놀러간 집에서 저렇게 대접받고 나오긴 처음이었어요. 정말 풀코스로 대접 잘 받았다는...

밤새 호세 쿠엘보를 반병을 다 마셧다는 람쥐찡은 숙취에 저것들을 먹지 못하고...OTL

이렇게 채터박스 멤버들의 가토집들이 기념 B-party가 무사히..? 끝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다음엔 T-Party해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MECO



참고하세요: Gay Manifesto #1.: 제국 이태원(帝國 梨泰院)‎



저는 지금 살짝 당황해 있습니다. 부분적으론 달콤한 오수 중에 깜짝 놀라 잠이 깨버린 것도 있고, 오늘 채터박스 총회가 있는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사실 이 글을 Homo Surplus에 올려야 하는지, 아니면 제 개인 블로그에 올려야 하는지 글을 거의 다 쓴 지금까지 결정을 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총회에 제시간에 출석하려 한다면 상당히 서둘러야 하기 때문에 평소 즐겨 사용하는 완곡화법은 잠시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짜~파게티! 라는 트위터 유저에게 제가 Homo Surplus에 쓴 글, Gay Manifesto의 첫 번째 글인 ‘제국 이태원’이 어떤 맥락으로 “소비”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퀴어 트윗터들의 특정 행동양태를 에이즈포비아로 규정하고 그런 양태를 보이는 분들께 제 글 링크를 띄우며 읽고 공부나 하라고 일갈하고 계십니다) 이 분을 보시면 뭐가 그렇게 분노에 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처음엔 호모포비아의 기믹(참고로, 기믹이라는 단어는 Gimmick이라고 씁니다. 혹시 짜~파게티! 님께서는 이를 모르셨다면 이 기회에 알아두시길)으로 시작하였다가 본인이 스스로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게슈탈트 붕괴를 겪은 나머지 에이즈포비아들을 계도하는 신시대의 선지자로 커밍아웃 하고 납신 분인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 번 글을 띄운 이상 그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읽히는지는 제가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오독의 여지가 크다면 반성하고 다음 글에서 더 잘 하면 될 뿐이고, 혹은 그 오독이 정말로 심각하다면 다른 글로서 바로잡길 시도할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 두 번째 권리를 사용하려 합니다.





1. 게이 커뮤니티 내의 에이즈포비아를 다그치기 위한 요건으로서의 당사자성

에이즈포비아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제 글, ‘제국 이태원’은 그 중에서도 퀴어 커뮤니티 내의 비이성적인 대 에이즈 공포와 HIV감염인에 대한 포비아적 행보를 지적했습니다. 제가 ‘게이 여론’ – 그런 게 실존한다면 – 을 측정하는 지표로 사용하는 트위터에서 이는 인기 있는 관점이 아닙니다.

물론 저와 뜻이 같은 트윗터도 몇 분 계십니다. 그 분들 중에선 대한민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원로 분들도 계시고, ‘90년대를 콘돔 한 장으로 살아남은’ 분도 계시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 HIV/AIDS 인권운동의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계시지요.

‘제국 이태원’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써온 다른 글에서도 일관되게 관철해온 바와 같이 저는 게이 커뮤니티 내의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외부 세계의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되는 것을 상당히 경계합니다.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 자체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격적 맥락을 최대한 덜어낸 근원 하에서 이루어지는 자성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데이터와 현실을 직시하자는 목소리는 매우 자주, 포비아들의 무리한 주장에 연동되고는 하지요. “봐 봐, 니들 저렇잖아. 에휴 더러운 것들.” 하고 말이지요.

외견적으로 같은 내용의 주장이라 하더라도 “누가” 발화하느냐에 따라 그 맥락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긴 논증이 필요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전반의 에이즈포비아가 아닌, 게이 커뮤니티 내의 에이즈포비아에 대한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에서는 이 “누가”가 크리티컬한 요소란 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지금까지 “남성 동성애자들이 항문성교를 하는 비율이 높으며, 항문성교는 HIV 전파에 취약한 형태의 성교다”라는 형태의 발화를 하고도 집중적인 포화를 맞는 대신 찬반의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성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었다는 점은 적어도 감정적으로 이 부분을 뒷받침해줄 겁니다.

그리고 저로선 드물게도, 이번만큼은 이성으로서 감정을 합리화해보고자 합니다. 게이 커뮤니티 내의 에이즈포비아는 커뮤니티 내의 노선투쟁일 겁니다. 부외자는 여기에 발언하기 전에 사회 전반의 에이즈포비아라는 ‘필터’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 전반의 에이즈포비아라는 화두에서 아직까지 동성애자 문제는 감염인 문제와 연대중인 사안입니다. 한 집단을 탄압하기 위해 다른 집단을 사용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요. 설령 그 부외자가 “에, 너희 게이들, 그런 너네도 에이즈포비아로부턴 자유롭지 못하잖아?”라고 지적한다 하더라도, 대답은 이와 같이 나갈 뿐입니다. “그건 우리 안에서도 비판의 움직임이 있으니 넌 상관 마시고, 일단 너부터 에이즈포비아를 떨쳐 보세요.”

커뮤니티 내의 민감한 노선투쟁에 훈수 두기 전에 적반하장은 하지 말란 소리지요. “우리” “자성하자”에서 “우리”를 삭제하고 “자성해”라는 명령형을 취하는 어떤 오만이 참 그렇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러한 지적을 하는 부외자 개인이 에이즈포비아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 전반의 감염인 인권의 문제 전에 먼저 게이 커뮤니티 내의 감염인 차별 이야기를 굳이 꺼내든다는 것은 어떤 불순한 목적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지요. “너희들 잘 걸렸다, 한 번 까여봐라.”라는, 그런 목적성이요. 아, 불순하진 않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이런 사람이 감염인 인권에 진정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는 저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논쟁에서 짜~파게티! 님이 퀴어 커뮤니티 내의 에이즈포비아를 지적할 수 있는 적법한 당사자성, 즉, 우리와 같이 토론하며 노선을 노정하여가는 과정의 동료로서의 당사자성을 확보하였다고는 도저히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제가 앞에서 나열한 어떤 가능성 – 부외자로서 에이즈포비아이나 호모포비아이기도 하여, 호모포빅한 행동의 수단으로 에이즈를 이용한다는 – 에 대한 의심을 거두기 위한 충분한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글쓴이 MECO 자신이 그러한 당사자성을 확보하였는가에 대한 지적 또한, 물론 겸허히 수용합니다) 물론 트윗을 보다 보면 감은 옵니다. 누군가의 세컨 계정인가보다. 그리고 그 원래 트윗터는 아마도 이런 분위기에 환멸과 염증을 느낀 퀴어 커뮤니티, 혹은 이와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 이겠구나. 하지만 그걸론 부족합니다. 왜냐고요? 항을 하나 갈고 시작해봅시다.




2. 실패한 드립의 회수책임에 대한 논변

사실 이건 노선투쟁 혹은 인권 운동의 차원에서 이야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사학의 관점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주제이겠지요. 뭐, 둘 다 동시대가 낳은 대(大) 퀴어 주디스 버틀러의 영역이기는 하니까 한 번 친절하게 설명을 시도해봅시다.

짜~파게티! 님은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스럽습니다. 포비아 기믹을 계속 가져가셨다면 오히려 산파술의 새 영역을 구축하셨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 기믹이 무너지고 “게이 니들 다 에이즈포비아야 이 멍청이들아”를 택한 순간 그 분에게서 포비아 심증이 거두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포비아로서의 연속성을 이어 에이즈를 수단으로 호모포비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분이라는 ‘오해’가 가능하지요. 설령 그 분의 트윗을 모두 읽어본다면 어떤 퀴어의 세컨 계정으로 포비아였다는 건 그 분이 말했다시피 ‘기믹’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지라도, 그 기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황현희의 말투로) 왜 저러는 걸까요? 대체 왜 저런 수단을 택하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분은 왜 호모포비아들 사이에 녹아들어가 트로이 목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애먼 게이들과 치고 박고 계신 걸까요? 미대 1학년생도 작품을 하나 할 때는 의도를 고민하고 크리틱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데, 이 분의 트위터 행위예술에서 제가 읽어낼 수 없는 의도는 무엇인가? 뭐 이런 의문들이 있습니다.

… 역시 안 되겠네요. 누군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쎈’ 발화를 하였는데, 그 발화가 자신이 의도한 효과를 불러오지 않았을 때, 거기서 더 나아가 화자는 자신이 이런 의도를 가지고 발화를 하였는데 너희들이 멍청해서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이중의 정신승리를 택하였을 때 그게 속되게 말해 ‘후지다’는 걸 설명하는 것은 결국은 미감의 영역 아니겠습니까. 이 트위터 행위예술은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수단으로는 해체적인 ‘전시’ 정도가 가능할 것 같으나, 여기서 굳이 짜~파게티! 님의 트윗을 전시하여 그 처절한 게슈탈트 붕괴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처연하기도 할뿐더러 굳이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 과도한 귀여운 척 트윗에 (“~~욧!” “~~죠!!”) 꽤 큰 심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뭐 첨언만 하도록 합시다.

아무튼 ‘쎈’ 발화가 의도한 효과를 점화하지 못하였을 때 ‘너희가 멍청하다’며 정신승리를 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 실패한 드립의 회수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것은 분명한 문제가 있는 부분입니다. 제가 썼던 ‘제국 이태원’은 어디까지나 퀴어 당사자성을 가지고, 인권 운동의 장(field)로써의 퀴어 커뮤니티 내부에 대한 목소리였습니다. 퀴어 커뮤니티 내부에만 발화하는 수단이란 게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목소리가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오픈된 곳에 공개하였습니다만, 그럼에도 퀴어 당사자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누군가가 보편적으로 언급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논변입니다.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짜~파게티! 님이 불특정 다수의 게이들에게 던져주시며 “니들 공부 좀 하고 와라”는 식으로 ‘사용’하시기엔 그리 적절한 글이 아닌 듯합니다.

혹시 아직도 짜~파게티! 님은 인권 운동 맥락에서의 본인의 퀴어 당사자성이 부정되는 걸 이해하(고 싶)지 않/못하실까요? 본인이 링크 던져주신 글쓴이들이나 “최소한 태클 걸지 않을 줄 알았던” 분들이 왜 이러시는지 생각을 조금 해보시라는 말 밖엔. 저는 능력이 부족하여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지어볼까 합니다.




3. 다 같이 놀자 동네 한 바퀴

몇 가지 남았네요.

먼저, 전체 인구 대비 에이즈 감염인 비율인 0.00171%와 질 성교 감염률 0.1-1%, 혹은 항문성교 감염률 0.3-5%를 단순 곱하시던 분, 통계 그렇게 다루다간 교수님 이전에 대학원생 조교들에게 혼납니다. 섹스를 대한민국 인구 중에서 랜덤하게 추출해서 나온 한 명과 할 거 아니라면 저런 계산법은 도무지 근거가 없죠. 게이-MSM 인구 대비 감염인 비율을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남-녀나 나이대 별의 “변인통제” 정도는 해주세요. 그런다고 그 무의미한 비교에 의미가 생길 거 같진 않지만요. (대학 입학 후 수학 포기한 나를 통계 하게 만드는 퀴어 인권 운동신을 규탄한다!)

둘째, 기믹인 줄 알면 휘둘리지 마라고 하시는데, 기믹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기믹이 후져서 비웃는 거란 걸 왜 모르시는지… 네 왜 그러는지는 압니다. 기믹이 후지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선천적으로 유머감이 후진 것은 불치병이라곤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기보단, 만성적으로 관리 가능한 질병입니다. 불편하긴 하지만요. 인정하고, 나아지기 위해 수련을 해보세요. 아니 이건, 진심으로 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동질감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셋째, 그럴 리는 없어 보입니다만, 노파심에 한 마디 드리자면 설령 짜~파게티! 님의 정체가 저와 평소 퀴어 커뮤니티 내의 에이즈포비아에 대해 우려를 공유하던 분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앞에 보였던 논변으로 인해 저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디스플레이, 혹은 프레젠테이션은 “실패했습니다.” 백인 WASP 개그맨이 크리스 락의 개그를 하고 있는 듯한 불편함이라고 굳이 친절하게 비유해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제국 이태원’을 작성하고 서리 님으로부터 받았던 우려 중 하나는 퀴어 커뮤니티 내의 어떤 ‘불온성’을 쉽게 ‘에이즈포비아’로 네임콜링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려가 사실로 드러났지만, 분명히 글을 써서 보완해주겠다고 하였던 서리 님이 글을 채무불이행 선언하셨으므로 서리 님을 규탄합니다. (이 문단에 한하여 농담입니다, 물론)




글이 생각보다 길어졌으므로 세 줄 요약.

1. 왜 본인의 센스가 후진 것을 남의 글로 갈음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글은 짜~파게티! 님의 태도와 양립 가능하지 않아 보입니다.

2. 친절하게 말씀드리자면 짜~파게티! 님이 까이는 이유 중 절반 이상은 트위터 게이들이 모두 에이즈포비아이기 때문이 아니라, 발화 방식이 후지기 때문입니다.

3. 그러니 세상에 대한 분노를 꺼트리시고 저까지 물귀신으로 끌고 들어가지 말아 주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비판을 가장한 비난과 인신공격을 매우 즐깁니다만, 이 싸움에서 어떤 공익과 필요성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번 짜~파게티! 님의 헛소리에 대응한 것은 깨진 유리창 효과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큰 건물에 하나 있는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사람들이 유리창을 깨도 되는 줄 알고 다른 유리창도 깨먹고 말지요. 당황스럽게도 짜~파게티! 님의 헛소리에 제가 근거를 제공하는 모양새가 되어 –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 그대로 고착되어버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굳이 긴 글로 답변합니다. 트위터에서라면 블락을 해버리면 되지만, 제 블로그 글이 링크하는 걸 막을 수 있는 기술적인 수단은 없거든요.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신다면, 짜~파게티! 님께 제안합니다. 실패한 드립으로 정신승리 하시는 걸 막을 수야 없습니다만, 그 근거로 제 글을 다른 게이들에게 던져주시는 것은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관심이 필요하신 거라도 A4 다섯 장 정도 드렸으면 이제 제 관심은 충분하잖아요) 그렇다면 저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짜~파게티! 님과 같은 분은 없는 셈 치고 조용히 살겠습니다. 사실 오늘 저녁 채터박스 총회에서 굳이 깔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할 거에요, 정말로.




비아냥으로 점철된 이 글이 읽기 편하지 않으셨을 다른 독자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
두 시간 정도 뒤에 시작되는 채터박스 정기총회를 매우 기대하며

MECO, of Team Chatter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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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CO


Gay Manifesto 2. 퀴어는 어떻게 법을 탐지하는가 (1)에서 이어집니다.




2004스42 결정(과 관련 판례)의 어떤 진보성



성소수자 성정치의 입장이 아닌 법리적으로 볼 때도 2004스42 결정은 엄밀하고 우수하며 깔끔하지 못하다. 당초의 호적법이, 그리고 가족관계등록법이 예정한 호적/등록부 정정의 원인에 포함되지 않은 성전환 수술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포섭하기 위해, 법적으로 근거가 없는 새로운 제도를 하나 만들어버린 것이다. 현대 법치주의 국가에서 이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는 입법권을 사법이 재량으로 침투한 현상으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소위 ‘판례 입법’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이러한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사실 이 사건이다.


기왕의 호적법과,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개정된 가족관계등록법은 두 가지 형태의 호적 수정방법을 예정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원시적인 오류를 바로잡는 정정이며(가족관계등록법 제18조), 후발적으로 행정구역 등의 명칭이 변경되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생긴 경우를 바로잡는 변경 경정이다(동법 제19조). 그런데 이 중 후자, 후발적인 변경에 따른 경정은 법에 그 사유가 행정구역 명칭의 변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성전환자의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대법원의 관점은, 전 항에서 보았듯이 출생시에는 생물학적 성을 타고 났으나 후발적으로 정신적, 심리학적, 사회적인 요인으로 인해 성별이 바뀐다는 쪽에 가깝다. 그러므로 후발적인 변경에 따른 경정이 이 사례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나, 법조문이 후발적 변경 경정에 대해 그 요인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적용하는 것은 유추해석의 범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대법원은 요인이 특별히 법문에 규정되지 않은 원시적 오류를 바로잡는 정정(제18조)을 유추해석하여 적용하고 있다. 후발적인 섹슈얼리티의 변경으로 보면서도 호적 정정 과정은 원시적 오류를 바로잡는 과정을 택하는 논리적 모순이 있는 셈이다.


2004스42 결정이 대법관 전원이 함께 판단하는 전원합의체로 심의되었고, 당시 대법원 분위기상 드물었던 반대의견과 별개의견이 존재하는 치열한 결정례로 남은 것 또한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대법원 반대의견은 그러므로 법적으로 성전환자가 반대의 성으로 호적을 정정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손지열, 박재윤 대법관의 논리는 관련 조문을 아무리 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형태의 변경은 예정된 바 없었으므로, 행복추구권 등의 헌법적 권리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제도를 법관이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입법자의 정책적 디자인이 필요한 사안에 법관이 개입하는 건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반대의견의 법리적으로 옳아 보이는 지적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독수리 오형제’의 일원이자, 이 사건의 주심 대법관이기도 하였던 김지형 대법관은 이것이 소위 말하는 ‘헌법합치적 해석’의 일환이라는 주장까지도 펴고 있지만, 제도가 예정한 바가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할 때 그 중 헌법에 맞는 것을 골라야 한다는 헌법합치적 해석의 정의상 이는 적절하지 않은 논리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대법원의 다수의견은 별다른 논거 없이 법관에 의한 입법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대법원의 과감한 판례 입법은, 주로 가치의 문제인 가족법의 영역에서, 사실상 입법적으로 이 부분이 근시일 내에 개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인식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와 사법구조가 비슷한 독일과 일본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독일의 경우 대한민국 대법원 반대의견과 같은 판결을 내린 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가 ‘윽박질러’ 다수의견과 같은 방향으로 판례를 변경토록 지시한 바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 입법은 그러한 개선의 가능성이 희박하였음을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해 내었다. 2006년 6월 이 사건 결정이 최초로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 신청을 허용하였는데, 그 전인 2005년 2월 이미 헌법재판소에 의해 호적법은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 있었다. 이에 대한 대체입법은 이 사건 결정이 있은 뒤 2008년에 시행된 가족관계등록법이지만, 가족관계등록법에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대한 입법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입법 과정에서 성별정정 신청이 반영될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17대 국회에서 노회찬 의원이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하였으나 이 또한 통과되지 않았고, 현재 19대 국회가 개원하였지만 여전히 관련 입법은 요원하여 보인다.




이는 관련하여 보아야 할 다른 중요한 판례가 있다. 바로 위의 결정에서 별 논란 없이 받아들여진 부분, 즉 ‘사람의 성은 성염색체의 구성을 기본적인 요소로 하여 내부 생식기와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의 외관은 물론이고 심리적•정신적인 성과 이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나 태도 등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한 최초의 판결인 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791 판결이다.




성전환 수술을 받아 여성으로 살고 있는 50대의 트랜스젠더가 강간을 당하였다. 그러나 형법은 강간죄의 대상을 ‘부녀’로 한정하며, 이는 호적상 여성으로 한정되어 해석되어 왔다. 만일 이 트랜스젠더가 남성이라면 이는 강간죄가 아닌 강제추행으로 처벌해야 한다. 형량도 낮아지고, 피해자가 납득할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피고인이 저지른 범죄의 인식과 다르다.


이 상황에서 대법원은 위와 같은 논리로 트랜스젠더 여성을 ‘부녀’의 범위에 포함하는 해석을 시행하였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서 트랜스젠더의 성별이 변경되는 것은 사실상 호적 내지는 가족관계등록부상의 변경절차가 완료되었을 때가 아니라, 성전환 수술을 받아 외성기의 변경이 일어난 시점인 것이다.[각주:1]


이 또한 사실 형법에서 ‘강간’을 부녀를 대상으로 한 것을 입법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해당 입법이 일어날 가능성은, 96년에는 더더욱 요원하였다. 지금까지도 형법 개정에 있어 강간죄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 구성요건에서 부녀를 빼야 한다는 주장은 강력하지만 관철될지 여부는 여전히 안개 속인 이유이다.




대법원이 유독 가족법 영역에서 강력하게 취하곤 하는 사법적극주의, 혹은 판례 입법은 흥미롭게도 국민을 대리하는 입법가들의 수단보다도 더욱 즉각적인 보호를 제공한다. 비록 판결 내부를 관통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법원의 전제는 여전히 한심하기 그지 없을지라도, 대법원이 “그래도 이건 정말 심하지 않냐”고 느끼는, 혹은 변호인단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사안에서 보호에 망설임이 없다는 건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일정한 정도의 진보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진보성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만, 대한민국 퀴어 신에는 아직까지 ‘이것은 저것보다 낫다’고, 심지어 산술적으로 나누어 말할 만한, 기본적인 정의와 진보의 문제가 많이도 산적하여 있기 때문에, 이런 게으른 서술이 용납될 여지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퀴어와 법> 다시 쓰기: ‘법만능주의’ 혹은, 유니콘의 뿔을 찾아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이 글에서는 굳이 서술하지 않았던 지난 겨울의 차별금지법/학생인권조례의 국면에서 핵심은 입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법이 우리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어떤 신성시되는 전제가 목전에 닿았기에 차라리 축제에 가까웠다. 한겨울에 교육청을 점거하는 등의 고생이 있었지만 이 폭발력은 그런 인식 하에서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허나 선언적 입법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차별금지법이 담고 있는 내용은 결국 헌법에 이미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헌법 문언에 의해 합리적으로 해석해낼 수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을 차별금지법이라는 별도의 법안으로 담아낸다는 것은, 물론 도움이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성정체성과 성지향이 명시된 법문이 존재하는 것과 없는 것이 가시적인 차이를 보여줄 영역은 생각보다 꽤 많다.
유치하게도, 그렇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순 없기에 차별금지법은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언적인 입법은 상당히 영미적인 발상으로 보인다. 헌법과 권리장전이 없는 영국이라면야, 인권법(Human Rights Act)이라는 발상이 유효하고 필수적일 것이다.[각주:2] 헌법에 있는 내용을 사안별로 입법하여 관철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는 미국의 사례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미국의회의 유능한 입법과 준법감시기능은 익히 알려진 바 대로다.



기왕에 살펴본 것과 같이 대한민국의 법질서는 입법이 쉽지도 않고, 입법이 된다고 하여 그것이 입법자의 의도가 관철된다는 걸 뜻하는 것도 아니며, 그 입법자의 의도가 완벽하거나 납득할 만큼 정묘하지도 않기에 여러 가지가 중간에 매개를 시도한다. 적극적인 사법이 그 중 하나이며, 그 외에도 의원 한 명 한 명의 재량이 상당히 큰 지경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국회를 구성하면 성소수자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의원이 꼭 한 명 정도는 있다 수준도 아직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계와의 접점이 이토록 특별한 의식, 축제로만 다루어진 것은 결국 퀴어 신의 실책이며 무지일 것이다. 마치 명예훼손소송에 한 번 당해본 진중권이 법 이야기만 나오면 깨갱 하며 법조문과 판례, 실무 경향, 해석 등의 말을 경전처럼 신성시하는 것처럼. 법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민국가의 가장 선진화된 예속 방법이었으며, 이를 가장 선구적으로 관철한 것이 수권법을 통한 나치스의 찬탈이었다.



퀴어 신은 법계에 포착되지 않았기에, 그리고 법이란 것이 언제나 그렇듯,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법은 특별한 이벤트화 되었다. 역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법은 상수화 되어, 특별한 잘못이 없으면 그에 따라 세상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차별금지법이 입법되었다면 퀴어 신에서 이 현상은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너 그거, 차별금지법 위반이야. 포비아? 차별금지법 위반이라니까. 세상에, 벌칙조항 없는 선언적 입법에서 그 정도로 많은 것을 바라다니. 이미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너 그거 헌법 위반이야, 하고. 그리고 대사인적 효력이 제한된 헌법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던가?





여기서 성적 지향이 포함된 차별금지법의 원안 입법 시도가 좌절된 것을 ‘모순된 축복’이라 표현하는 것은 후진 미감의 학자가 쉽사리 택하고 마는 장엄하고자 하는 수사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후퇴였다. 하지만 모두 갈아 엎고 새로 시작할 것이 아닌 바에야, 후퇴가 남긴 잔해에서도 새로운 것을 건지고 얻어내야 한다. 내가 이 글에서 찾아내고자 했던 ‘잔해’는 바로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법만능주의와 그것이 남길 어떤 체념의 문제였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졸라 짱 센 법느님은, 유니콘의 뿔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이벤트적으로 한 번 만들어 두면 나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영구기관/마법이 아니고, 오히려 평소에 꾸준한 유지와 보수가 필요한 결함 많은 화석연료 전동차에 가깝다.

그러니 설령 법이 퀴어를 굽어 살피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찌 퀴어가 법을 탐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Manifesto”로


언제나 뜨거울 것만 같았던 차별금지법/학생인권조례 원안 추진 운동이 지금에 와서는 과거 어느 시점의 맥락으로 한정되어 박제되었고, 심지어 인터넷 상에서도 그 귀추가 어찌 되었는지 추적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자연 소멸한 지금에 이르러서야 말한다. 법을 대하는 퀴어/사회운동의 태도가 이래서는 안 된다. 이벤트성 행사는 폭발적이지만 단발적이며 거품처럼 허무하다. 그리고 그 경험은 퀴어 사회에 결국은 좋지 않은 집단적 경험을 남기게 된다. 한 때 형성되었던 법계와의 특이 교차점이 진정되고 나면, 결국 법계는 움직이지 않으며 격랑이 가라앉으면 다시 상관 없었던 별개의 세계로 돌아갈 뿐이라는 관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법은 유능함에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 법에 대한 특이적 관점은 드물게 법을 언급할 때 이를 만능의 무기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의 사례에서, 혹은 군형법 제92조의 위헌법률제청심판 사건에서 사법이 퀴어의 관점에서 사건을 심리하여 심지어 상처를 위무하는 역할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실제로 이는 법계의 역할일까?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적극적으로 사법과정에 개입하여 권익의식을 표현하고, 사법이 이따금씩 보이는 과감한 진보성을 적극 유도하는 것은 꽤 괜찮은 방법이다. 그리고 이 방법이 이미 시도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부족하지만, 우리 사회의 진보적 사법과정이 자리를 잡을수록 이 방법은 점점 더 과감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퀴어가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의 정정 방법을 법적으로 보장받는 사회가, 그러한 표기방법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보다 우월하다는 논변은 쉽사리 완성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법의 유능함을 말하고, 법을 탐지할 것을 꾸준히 주문하는 것은, 그나마 가장 남을 움직이는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렛대로 작용하는 법의 역할을 고려할 때, 그리고 아직도 부족한 퀴어적 사회지분을 고려할 때 퀴어의 자급자족 사회가 하부구조로 자리잡기란 여전히 요원하여 보인다. 아직도 호모포비아와의 대결이란 두려운 일이고, 남을 설득하고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일은 많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으뜸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 법이기에 이에 침묵하는 것은 어떤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고대 폴리스의 시민이 된 듯한 마음으로라도 법을 다루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 시절 법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럴 것이다. 각종 이야기와 권익과 권리와 의견이, 그리고 연대가 이루어지는 공론장에서 법을 탐지하는 감각은 필요하다.[각주:3]

법을 원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은 퀴어한 이 곳에서 법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일격을 매다 꽂는 과정은 더욱 자주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퀴어가 법을 탐지하는 데서 더 나아가, 법이 퀴어 이슈를 탐지하고, 그를 통해 사회가 퀴어를 탐지하는 과정을 촉진하기에.


  1. 이는, 어떻게 보면, 서류상 변경이 있는 시점을 성별이 변경된 시점으로 보는 관점보다는 훨씬 트랜스젠더-친화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법이 강간죄라는 영역에서는 그 사이의 사실상 여성인 상태 또한 보호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 없으므로. 그럼에도 수술 중심으로 트랜스젠더의 성별변경 시점을 판단하겠다는 외성기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어 각주로 뺀다. [본문으로]
  2. 실제 영국에서는 입법연도별로 꽤 여러 개의 인권법이 있으며, 이들을 통합하여 통일된 권리장전을 제정하려는 노력도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본문으로]
  3. 가령 강간죄의 보호 대상을 부녀에서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는 과정은 모욕적이기 그지 없는 군형법의 ‘계간’ 조항을 폐지하는 데 진일보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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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laimer

이번 글은 퀴어, 성소수자와 관련된 오래된 논의에 대한 배경을 일부 무시합니다. 현실 세계의 맥락에서 이번 글에 한정해 퀴어=성소수자, 그리고 이 개념은 게이인 저를 완벽히 포괄합니다. 별로라고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안 그래도 분량 오바.




무지는 경외의 근원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던 기독교도의 신은 – 실존한다면 – 이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무지는 한계를 베일 속에 가두고 권능은 넓게 펼쳐 혜량할 수 없게 한다. 언제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눈은 언제나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부른다. 그리고 이는 판옵티콘의 숨겨진 전제이기도 하다.


현대의 우리에게 법(法)과 같은 무지의 대상이 또 남아 있을까? 자연과학이 무지의 영역을 극소의 영역으로, 혹은 극대의 영역으로 한정하여 점차 줄여가는 동안 법은 자신들이 이해한 것을, 자신들만 이해하는 방식으로 울타리를 둘러쳤다. 다행이라면 법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굴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법 또한 결국은 군림하고자 한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재작년부터 지난해까지 이어진 차별금지법 제정 국면에서 퀴어 세상 또한 크게 요동쳤던 것은. 불가해한 괴물, 우리 머리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지배자, 그리고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지상 최강의 키보드 워리어 진중권의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는 ‘법’이라는 걸 길들일 필요성을, 세상의 일부로서, 퀴어들 또한 강하게 느꼈다는 반증이었을 테니까.




법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한다. 그러나 정작 퀴어와 법의 교차점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법의 감지는 그 역치가 꽤 높기에, 법에 포착되기 위해서는 퀴어가 충분히 가시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퀴어로서 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또한 생활을 영위하고, 그 생활은, 결국 법의 규율을 폭넓게 받는다. 나를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가 꾸준히 의식하는 과정은 자칫 잘못하면 병적일 수 있다.


대한민국 사법체계가 등장한 이래, 법이 포착한 퀴어 관련 이슈라면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생각난다. 우선, 서두에 언급한 차별금지법. 이는 입법의 영역으로, 어떻게 보면 퀴어 인권 운동의 관점에서는 고전적인 주제가 된다. 그리고, 남성 동성애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모멸감에 시달리게 되는 용어, ‘계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군형법 제92조. 헌법적 문제가 되어 왔다. 마지막으로, MTF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다루고 있는 가족법과 이와 관련된 형법적 문제다. 물론 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역시나 이 정도랄까. 검색을 통해 보아도 여기에 더할 수 있는 것은 인접한 페미니즘의 성폭력과 성적 자기결정권 논의, 그리고 HIV/AIDS의 기본권적 논의 정도이다.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QIS 일각에서 발간하는 자치언론 ‘퀴어 플라이’는 제10호에서 ‘퀴어와 법’을 기획의 일부로 다룬 바[각주:1] 있고, 해당 기획과 관련된 4개의 글 중에서 둘은 차별금지법과 인권조례, 나머지 둘은 군형법에 할애되었다. 굳이 그럴 당위성은 없는 것이지만, 나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대해 퀴어의 관점에서 말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드문 사례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뿐더러 이 사례 자체가 말해주는 바가 다른 두 개의 사례와는 다르면서도 심도 있기에.





사법은 퀴어 이슈를 얼마나 탐지하는가



섹슈얼리티의 형성에 관한 미셸 푸코의 설명으로 돌아가자면, 19세기 서구의 사법은 동성애적 행위를 규제하던 것에서 벗어나 동성애 관계와 해당 성향을 규제하기 시작한다. 입법의 차원에서 동성애자를 처벌하고 규제하는 법이 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법을 적용하고 시행하는 사법 차원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사형 등의 무거운 법정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상 적용되지 않는 죽은 법이었던 동성애 행위 처벌 법규가 강력한 실효성을 가지고 적용되는 사례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각주:2]. 아무튼 블룸즈베리 클럽이 존재했던 영국에서조차 20세기 중반 앨런 튜링의 비극을 막지 못하는 분위기에 이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20세기 초반의 서구 법질서를 일본 민사법을 통해 한 번, 그리고 해방 직후 해외법의 계수[각주:3]를 통해 또 한 번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던 대한민국 법질서는 변방의 것은 중앙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언어학의 어떤 법칙을 따르기라도 한 것인지, 여전히 20세기 초중반 서구 법질서의 모순을 많이도 배태하고 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모순이라면 역시나 혼인의 관념을 전통적인 남-녀의 가족적 결합으로 한정하여 규정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여전히 서구 사회에서도 법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는 마무리단계에 있는 본 논쟁이 결국은 (시민결합의 형태가 아닌) 동성커플의 결혼에 관한 시민사회적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실제 그러한 형태의 입법이 된 사례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논쟁 지점에서는 유독 서구에 이러한 입법형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지 않았다는, 자의적으로 선택된 사실이 동성 커플의 결혼 개념 포섭에 반대하는 측의 하나의 논거로 사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각주:4]




법학과 연계되어 이루어지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각종 진보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법조계는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라는 대중적 인식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는 퀴어 전반 이슈를 대하는 법조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한 법학 교수는 말한다. 법조계에서 이슈로서의 동성애를 언급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호적상 성별 정정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급은 아닐 수도 있지만, 여타의 퀴어 이슈 전반에서 동성애에 비해 훨씬 ‘가시적이지 못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굳이 찾아준 판례법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멈추어진 시계가 하루 두 번은 맞아 떨어지듯, 진보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맞아 떨어지긴 했지만 이는 대한민국 법조계의 실상에 부합하는 설명은 일단 아니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관한 판례 문언을 검토한다면 더욱 명확해진다.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결정례 검토: 대법원의 성전환 인식에 관하여


소위 ‘생물학적’ 성과 심리적, 사회학적, 정신적 의미의 성이 일치하지 않는 트랜스젠더 중에서, 대한민국의 사법이 지금까지 가족관계등록부(옛 호적)의 변경을 허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수술을 통해 외성기의 변형을 이룬 수술 트랜스젠더 뿐이다. 그 중에서도 판례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MTF 수술 트랜스젠더)에 집중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MTF 트랜스젠더의 호적상 성별표기 정정이 처음으로 허용된 사안은 2006년에 있었던 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이다. 이후 호주제가 폐지되어 가족관계등록부가 도입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나 법리의 변화가 있지는 않았으므로 이 결정을 그대로 본다.



당시 성별정정을 인정하는 대법원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1. 기존에 대법원은, ‘사람의 성은 성염색체의 구성을 기본적인 요소로 하여 내부 생식기와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의 외관은 물론이고 심리적•정신적인 성과 이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나 태도 등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었다. (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791 판결 참조)

2. 성별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WHO에서 분류한 국제질병기호상에도 분류가 있는 내용이다. 이를 대법원은 성동일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의 일환인 성전환증(Transexualism)이라는 용어로 포섭한다.

3. 그리고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성별을 호적에 무엇으로 기재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과 설명이 있다. 이 부분은 중요하기에 한 문단을 옮긴다.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도, 남성 또는 여성 중 어느 한쪽의 성염색체를 보유하고 있고 그 염색체와 일치하는 생식기와 성기가 형성•발달되어 출생하지만 출생 당시에는 아직 그 사람의 정신적•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성을 인지할 수 없으므로, 사회통념상 그 출생 당시에는 생물학적인 신체적 성징에 따라 법률적인 성이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출생 후의 성장에 따라 일관되게 출생 당시의 생물학적인 성에 대한 불일치감 및 위화감•혐오감을 갖고 반대의 성에 귀속감을 느끼면서 반대의 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 역시 반대의 성으로서 형성하기를 강력히 원하여, 정신과적으로 성전환증의 진단을 받고 상당기간 정신과적 치료나 호르몬 치료 등을 실시하여도 여전히 위 증세가 치유되지 않고 반대의 성에 대한 정신적•사회적 적응이 이루어짐에 따라 일반적인 의학적 기준에 의하여 성전환수술을 받고 반대 성으로서의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를 갖추고, 나아가 전환된 신체에 따른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만족감을 느끼고 공고한 성정체성의 인식 아래 그 성에 맞춘 의복, 두발 등의 외관을 하고 성관계 등 개인적인 영역 및 직업 등 사회적인 영역에서 모두 전환된 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그 성으로서 인식되고 있으며, 전환된 성을 그 사람의 성이라고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과의 신분관계에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거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아니하여 사회적으로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면, 이러한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앞서 본 사람의 성에 대한 평가 기준에 비추어 사회통념상 신체적으로 전환된 성을 갖추고 있다고 인정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할 것이며, 이와 같은 성전환자(아래에서 말하는 성전환자는 이러한 성전환자를 뜻한다)는 출생시와는 달리 전환된 성이 법률적으로도 그 성전환자의 성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위 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결정문 中

이상에서 보다시피, 대법원의 판단은 일관되게 성전환수술을 받은 사람을 성별정정의 적법한 청구 주체로 파악하고 있고, 그 이외의 부분에는 침묵한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우선 외성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힌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논의는 반대의 경우, 즉 FTM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 FTM 트랜스젠더가 법원에 성별정정을 요청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보이고, 우리와 비슷한 사법체계를 가진 일본에서 – 그러나 일본의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은 입법적 보완이 이루어져 이미 행정적 절차가 구비되어 있다 –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환한 경우 실무적으로 성기 성형 없이 성별 변경을 허가해주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FTM 트랜스젠더의 경우 인공성기와 성기성형의 안전성에 의문이 있다는 점이 반영되었겠지만, 여성기를 남성기의 부재로 보는 전통적 관념을 비판하는 페미니즘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식능력의 완전한 상실을 요건으로 요구하는 점 또한 상당히 후진적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준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남성(FTM)이 불임인 파트너를 대신하여 임신하는 미국과 같은 사례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각주:5]

‘사회통념에 의해’라는 부분에 의해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으로 제한된다는 점 또한 문제 중 하나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관련하여 실제 결정례가 남은 사안인 대법원 2011. 9. 2. 자 2009스117 전원합의체 결정은 자녀과 그 부모 간의 관계가 상당히 극단적인 사안이었으므로 일반화가 어렵지만, 실제 이후 대법원 내규는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전반적으로 위와 같은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판례를 보여주면 심지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하더라도 단박에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위 판결에서 성별을 감지하는 부분이 ‘학계’의 최신 연구결과를 반영했다고는 하나 이는 소위 생물학적, 의학적인 부분에 한정되어 있으며, 인권의 영역에서, 혹은 여타의 인문학적, 사회학적 연구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어휘와 새로운 시도들은 그 존재 자체를 무시당했다는 점이 여실하게 보이는 결정례이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현실에 절망하거나 저항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살아있는 것은 싸우는 것이란 어떤 비문도 있다만, 그래도 품위 있고 조금 더 나은 저항을 택하기 위해서라도 위 판결이 가지는 어떤 외적인 진보성에 대한 분석은 필요해 보인다.

그래,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해보자. 트랜스젠더의/퀴어의 입장에서 분명 모욕적이나, 법원이 퀴어 이슈를 다루는 태도에 있어 저 판결은 보이는 만큼 나쁜 판결은 아니다.





  1. ‘퀴어와 법’에 대해 보자는 국내의 거의 유일한 시도였기에 인용하였지만, 이 ‘기획 의도’ 글은 꽤 심각한 곡해의 지점을 가진다.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 차별금지법을 포섭한다 할지라도 군형법 제92조는 그와 동일한 정도의 역사를, 사실상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도 차별금지 입법보다 더욱 오래된 역사를 가진다. 초반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 신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제기는 모욕적이기까지 한 용어가 사용된 해당 법문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갑자기 빵 터진’ 것으로 묘사한 점은 자의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2. 이를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반동을 배제함으로써 강고한 헤테로섹슈얼리티의 지배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본문으로]
  3. 적당히 번역하고 살짝 고쳐 적용한다는 말을 법학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더라. [본문으로]
  4. 물론 MECO는 동성결혼에 대해 대략 지난 강연 후기에 인용한 Halberstam과 비슷한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할 수조차 없다는 점을 비교형량할 때 동성결혼권을 인정받는 게 옳다고 보는 쪽일 뿐. [본문으로]
  5. 애초에 국가가 개인의 신상기록을 전면적으로 기록하는 시스템이 야경국가적인 후진성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이 점은 논의하지 않기로 하자. [본문으로]
Posted by MECO


안녕하세요. 야생형 입니당.

휴가를 다녀왔어요. '다녀왔어요'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은 어색하네요.

어디 먼 동네를 다녀온것도 아니고 그저 평소엔 좀 힘들었던 가보고 싶었던 서울을 돌아봤을 뿐이라서요.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이란 것이 다 그렇겠지만,

논문쓰지 못한 대학원생에게 휴가란 사치일 뿐이죠. 엉엉.

사실, 올해는 휴가를 갈 생각이 없었어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애인놈이 8월 한달간 없거든요.

애인도 없는데 쉬면 뭐하나 하는 심정으로 일이나 하자...란 마음이었는데, 뭐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서 갑자기 급 휴가를 가게 된거죠. 계획에 없던 휴가였던 만큼, 도대체 어딜 가야할지 감이 안오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취미가 사진기 들고 돌아다니는 거에요. 물론 취미가 실력을 반영한다면 세상에는 요리천재, 음악천재, 그림천재 등등이 넘쳐나겠죠. 실력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평소에 가고싶었는데 못갔던 곳들을 가기로 결정했어요.

이 포스팅은 지난 금~토일간의 애인있는 게이의, 애인없이 혼자서도 잘놀아 특집으로 꾸며봤습니당.

 

1. 남자는 남잔데...할아버지만 많아... "보라매 공원"

보라매 공원...출사지로 나름 유명한 공원이죠. 네. 근데 저는 못가봤어요. 사진에 취미 붙인지 한 4~5년 되었는데요. 네, 안가봤어요.

그래서 휴가의 첫 목적지는 보라매 공원으로 정했습죠. 

<보라매 공원 근처 도림천? 에서 만난 일광욕하는 비둘기떼>

여름엔 낮출사를 가면 안되요. 정말 덥거든요. 무진장 덥습니다. 한시간 걸을때마다 주름살이 한개씩 늘어나는 기분이에요.

근데, 저는 출사 안나간지 좀 오래되었거든요. 그런 개념따위 애저녁에 까먹었었죠. 정말 패기로운 마음으로 출발했던 첫걸음인데...Aㅏ...정말 덥던데요...

더군다나, 보라매공원은 처음 가보는 곳이어서 신대방역에서 내리고나서 공원과는 반대방향으로 한참을 걷는 참사가...거의 삼십분정도를 공원을 찾아 헤메었어요.

어쨌든 결국 동네 주민들께 물어물어 찾아간 보라매공원, 가장 먼저 한 일은...썬크림 다시바르기...

공원을 찾느라 이미 땀을 있는데로 흘려서 피부보호막의 안전이 의심스러웠거든요. 하지만 이미 얼굴은 땀범벅...손수건도 없고, 이렇게 젖은 얼굴에 썬크림을 발라도 잘 발릴까 걱정이 되었지만...전 여름엔 방수제품을 쓰죠.

피부가 젖어있어도 무진장 잘 발리는 방수제품의 위엄.

왠 할아버지가 옆에서 세수를 하던 손을 씻던 신경안쓰고 열심히 썬크림을 처덕처덕...내 피부는 소중하니까요...

 

<공원에 들어서자 처음 본 풍경은 넓은 연못에 가득찬 연꽃...>

알고보니 음악분수로 유명한 연못이더군요. 아쉽게도 분수는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곳은 정말...할아버지들이 많더군요...정말 많았어요...왜이렇게 많지 싶을 정도로...

그늘마다 할어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장기며 바둑이며를 두면서 놀고계시더라고요. 참...평화로운 풍ㄱㅕㅇ.....

하지만, 젊은남자는....?? 그런거 없ㅋ어!

 

<바람이 불어서 요런 사진도 찍어봤죠. 움짤은 재밌어요.>

바람에 흔들리는 연잎을 보니 참으로 시원해 보이긴 합니다만...진짜 무지막지하게 덥던데요...세상에 제가 고등학교 체육시간에도 그렇게 땀을 흘려본적이 없는거 같았음...(사실...체육시간에 공놀이 안했...)

 

호수 옆 화단에는 도라지꽃이 한창으로 피어있었고요...

 

공원안에는 플라타너스 숲이 있어서 쉬어가는 사람들로 가득...(사람이 잘 안보이긴 해요..)

젊은 사람들은 정말 가뭄에 콩나듯 한두 커플씩 있었고요...대부분 마실나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이셔서 이것저것 드시거나 쉬고 계시더라고요...

훈나미들은 이런데 놀러 안오니....ㅜㅜ

 

공원에 있는 넓은 잔디밭에서는 이런 쌩뚱맞은 풍경도 보이고요...무슨건물인지...?

 

이런데 놀러왔으면 하늘사진 찍는건 디폴트로 저장된 기본소양이죠.

 

첫경험한 보라매 공원은 참 좋더군요. 다음에 애인이 끌고선 소풍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좀 시원해 지면요...제가 어딜 돌아댕기는걸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런데 올때 준비물을 생각하지 않고 왔거든요.

이런 날씨엔 음료수를 필수로 들고 다녀야...정말 저 수분부족으로 쓰러지는줄 알았슴...공원안에 매점이 없는건지 못찾은건지...

 

2. 2시간이면 다 둘러볼 줄 알았던 "국립중앙박물관" & 혼자서도 밥 잘먹어

 

<박물관 앞 청자정>

 

원래 휴가 첫날의 계획은 이랬어요.

<보라매 공원에서 사진을 찍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문화를 즐길줄 아는 차도남 코스프레를 한 뒤, 친구를 만나서 저녁을 먹고 노닥거리다가 녹차군을 만나서 간단하게 술한잔. 만약 비온다면 공원을 영화관으로 바꾸기>

다만...보라매공원을 못찾아서 좀 많은 시간을 지체하고 미칠듯 뜨거운 날씨에 약간 정줄을 놓아 첫 단추를 잘못 끼웠나 싶은 생각이 좀 들긴 했지만...어쨌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죠.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이년 전쯤에 한번 출사를 나간적이 있긴 한데요. 박물관 안에 유물을 보기위해 간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언제나 첫경험은 설레임...(다른 여러가지 의미로도...응...?)

 

<이거슨 바로 그 유명한 뭐시기 십층석탑>

사실, 박물관이 커봤자 얼마나 크겠냐는 생각에서 국립중앙박물관도 넉넉잡고 2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굉장히 느긋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입장을 했었더랬죠.

아놔...긍데 이거 왜이렇게 넓음...?

시간개념없이 구경하다보니 어느덧 한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난 왜 아직도 일층...??(지상부만 3층...지하는 있는지 모르겠고...)

6시에 저녁약속이 있는데...5시가 가까워 지도록 삼국시대를 훑고있는 나를 발견하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져서..(1층의 반도 못돌았어요) 고려와 조선은 패쓰다 하고선 2층으로 올라감 ㅋㅋㅋㅋㅋ

2층엔 개인 소장품을 기부한 것들로 이뤄진 코너와 서화, 글씨, 불교그림 등등이 따로 있더군요. 3층은 아시아 유물관이라는데...이미 보라매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저로서는 그곳까지 구경하는 것은 무리무리데스요.

마침 2층 구경하고 있는데 슬슬 6시 약속장소로 가야하면 이제 나가야 할 것 같아서, '다음에 애인데리고 다시한번 와야겠다' 라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발을 돌리려는데...

저녁먹기로 약속한 냔한테 전화가 왔어요.

'이선생 나야!'

'응 왜? 나 보고싶어?ㅈㅅ...'

'지금 우리 실험실에 큰일 하나 터져서 오늘 못보겠어! 미안해!'

'...응?....이런 ㅆㄴ...'

이런 연유로...전 갑자기 저녁같이 먹어줄 사람이 사라짐. ㅋㅋㅋㅋㅋㅋ 설상가상으로 원래 그 전날 같이 저녁먹을래? 라고 제안했던 동생이 있었는데...내가 찼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동생에게 재빨리 다시 연락하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사이에 다른 사람 구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 진짜 멘붕상태였음.ㅋㅋㅋㅋㅋ

어떤 마음이었냐면...

'시밤. 내가 휴간데! 휴간데!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긴 싫다! 이런 야속한 년놈들을 보았나! 하지만, 난 아직 김치맨의 습성을 다 털어내지 못해서 음식점에서 혼자먹을라면 졸 뻘쭘한데...우미ㅓ대뱌ㅓ히ㅏㅓ미아ㅓ피마ㅓㅇㄹ'

하지만 결국 '휴간데 햄버거로 때우긴 싫다'는 마음이 이겼음 ㅋㅋㅋㅋㅋ

물론 저도 가끔 음식점에서 혼자 밥먹어 보긴 해요. 그래도 이날은...삼계탕 집에 혼자갔음. 이건 저에게 위대한 첫걸음. ㅋㅋㅋ 나 존나 성공할수 있을거야....ㅜㅜ

근데...그거 알아요? 휴간데...난 더군다나 쏠로도 아니고 애인이 있는 남자란 말이지! ㅜㅜ

졸라 재밌게 이리저리 뒹굴어야할 휴가에 저녁을 혼자먹는 내기분...가고싶었던 삼계탕집에서 밥먹는데도 뭔가 억울한 그 기분...ㅜㅜ

아무튼 이런 이유로 이래저래 일정이 꼬이네요. 원래는 같이 저녁먹기로 한 여자사람님과 밥먹고 아홉시까지 딩가딩가 수다떨다가 아홉시에 가토랑 종로에서 술마시려고 했던건데...갑자기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 가량이 붕 떠버렸어요...

뭐 별 수 있나요. 그래서 카페에서 된장남 놀이 시작. 다행히 저는 외출할때는 읽을것과 놀거리를 잘 챙겨서 다니죵.

내사랑 스벅에 커피한잔 시켜놓고 폭신한 쇼파에 앉아서 호랭이가 추천해준 Veep을 보면서 시간을 떼우기 시작했어요. 미드보다 지치면, 요새 읽고있는 니나 자블론스키라는 분의 'Skin'이란 책을 읽으며 '나 커피숍에서 이런책 읽는 교호양 있는 남자야' 코스프레도 좀 했고요. 라지만, 현실의 저는 존나 애인놈한테도 "자기 가끔 좀 천박해" 란 소리나 들으며 살고 있음...씨앙...

그리고 아홉시가 넘어서 우리 귀여운 가토와서 종로에 있는 칵테일 바를 가서 칵테일 마시면서 수다수다. 이렇게 휴가 첫날이 저물었네염.

 

 

3. 둘째날엔 사진전을 가겠어요. 근데 또 가토...

첫째날에 하루종일 너무 걸었더니 연약한 저는 좀 피곤했...ㅈㅅ...

아무튼 간만에 일도 없겠다 무진장 늦잠을 잤더랬죠. 근데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이... '오늘은 뭘하지...?'

아 진짜! 휴간데 애인놈이 없으니 이건 뭐할지 정하는 것도 힘들어요. 생각하기 귀찮으면 애인놈한테 대신 생각하라고 시키면 되는데! 뭐 그것도 아니면 그냥 뒹굴뒹굴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아무튼 졸라게 짱구를 굴리다가 '오늘은 전시회나 보러가자' 라고 결심. 그래서 부랴부랴 찾아봤는데, 마침 부암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박노해 사진전'을 한다고 하더군요.

네. 맞아요. 그 시인 박노해 맞아용. 유명한 시인이죠?? 근데 전 읽어본적 없음 ㅋㅋㅋㅋ -_ㅜ

혼자갈까 누굴 데려갈까? 고민하고 있는데...Aㅏ...제가 인간관계가 좀 엉망이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당장 연락하면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없ㅇ..........ㅜㅜ

그래서 트위터에 '오늘 부암동 카페에 사진구경 하러 갈건데 갈사람 없나영' 이러는데..ㅋㅋㅋㅋㅋ갸토가 낚였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 전날에도 만났지만ㅋㅋㅋㅋㅋ 바로 며칠전에 갸토랑 밥을 먹기도 했거든요 ㅋㅋㅋㅋㅋ 일주일 사이에 세번을 만남. 애인보다 더 많이 만나!!!!ㅋㅋㅋㅋㅋㅋ

아무튼 ㅋㅋㅋㅋㅋ 이 자리를 빌어서 이틀연속 나와 함께해준 갸토찡에게 감사의 박수를 드려요.

 

요런 빌라옆에 있던데요

카페 이름이 <라 cafe>

카페가 요렇게 생겼어영.

4층인가 되는데, 1층은 모르겠고 2층은 카페겸 전시장 3,4층은 연구소로 쓰인다고 하네영.

 

카페에 들어가면 전시장에는 무료로 이런 사진전을 하고 있슴당.

사진이 많은거 아니고 대략 10점? 정도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요. 좋은 사진 구경도 했는데 그냥 가기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커피랑 새느위취 시킴. 사진도 몇개 찍긴 했는데...ㅋㅋㅋ 궁금하면 가서 구경하세염. 참고로 사진을 찍어도 괜찮다고 하네요.

 

저같은 도시의 향기를 즐길줄 아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아메뤼까노 앤 새느위취'

요새, 진보는 아메리카노 마시면 안된담서요? 내가 이땅의 애국보수.

 

빵에 꽂혀있는 저 녀석이 좀 귀여움.

"너 내가 우습냐?"

 

 

카페 여기저기에 이런 귀욤귀욤 돋는 소품들이 많아용.

아무튼, 샌드위치도 맛있었고 분위기가 좀 조용해서 혼자와서 책보면서 공부하기 좋은 분위기의 카페더라고요. 거기에 사진전은 덤으로...

아무튼 이렇게 저의 휴가가 대충 마무리 되었습니다. 사진전 구경하고 아는 게이님들과 저녁 겸 술도 한잔 했고요.

그리고 함께 해준 가토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요. 우리 귀여운 가토찡 데려갈 남자 빨리 나타나라!

애인과 함께 하지 못했던 것이 제일 아쉽긴 했지만...사실 가끔 애인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것도 좋기는 해요. -라는것은 가진자의 여유.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MECO


Disclaimer

Gay Manifesto와는 다르다! Manifesto와는! (요즘 그런 글 쓸 힘도 없고 정신도 없음)


ask.fm을 돌리다가, 꽤 의미 있는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의미보다는 흥미로운 질문이겠네요. 커밍아웃은 하였느냐. 네 했습니다. 하고 한 마디를 쳐 넣을 수도 있었겠지만, 조금 복잡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아니,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냥 커밍아웃은 무엇인가, 누구에게 하는가, 어떻게 하는가, 뭐 이런 거에 대한 경험적인 이야기를 조금.





Comingout이란 뭔가? C*m 말고, 그거랑 상관 없이, 벽장(closet)을 상정한 개념입니다. 거기서 나온다는 의미. 즉, 성적 정체성을 숨기고 있었던 외피를 벗어나 자신을 알린다는 뜻이지요. 필연적으로 성소수자의 자아 실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집니다.


커밍아웃을 ‘했다’는 과거형 동사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이성애가 디폴트 상태로 규정되어 있는(이성애정상적Heteronormative) 사회에서 성정체성은 말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이성애자인 것으로 고착되어 있기 마련이지요. 설령 전지구적으로 까발려진 동성애자라 하더라도,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홍석천 씨라 하더라도 커밍아웃은 계속적인 상태에 가까울 겁니다. 이효리가 누군지 몰랐다던 안철수 씨 같은 사람도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저에게 묻는다면, 네. 커밍아웃 해본 적은 있습니다. 어디까지 했냐고 물으신다면 주변의 좋은 친구들 예닐곱에게 했습니다. 제가 게이인 줄 아는 스트레잇이 얼마나 되냐고 물으신다면, 역시 한 예닐곱쯤 됩니다. 그들과 다 연락하고 친하냐고요? 소위 커밍아웃이 ‘성공’하지 않은 경우도 한 번 있었습니다. 그렇게 공포에 떨진 않았고요.


이성애자 남자에게도 커밍아웃을 해 본 적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걸 말하는 순간 바보 같은 게 매력이었던 남자들이 너무 약고 똑똑해지더라고요. 정치적 올바름과는 상관 없이 제가 편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가령 제 앞에서 옷 벗는 것을 꺼리는데 그걸 꺼려선 안 된다는 생각까지 하는 이성애자 남자의 곤혹스러움이 읽히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짜증이 납니다. 멍청한 게 매력인 남자들에게 똑똑해질 기회를 주면 안 됩니다. (Oops, I’m not PC again!)




부모님에게 커밍아웃 할 거냐는 질문도 많이 듣습니다. 제가 무슨 커밍아웃 마스터 이런 것도 아닌데 이런 질문을 꽤 들어본 것 보면 적어도 게이들에게는 의미심장한 질문인 듯합니다. 얼마 전 만난 **도 출신 형의 경우 (지역중립적Prinvince-blind 표현을 위해 블라인드 처리합니다) 가족이 워낙 보수적이다 보니 애초에 말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걸 보니, 제 주변 게이들은 꽤 편향된 표본인지도 모릅니다.


하긴, 어떤 게이들은 자기검열을 하기도 하더군요. “부모 가슴에 못을 박아서야 쓰겠냐”는 호모포비아들의 논리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내재화한 정서적 예속 상태를 보기도 합니다. 거의 상대를 안 하긴 하지만, 1. 결혼할 거 아니라면 못 박는 거야 엇비슷할 거야. 2. 근데 왜 그게 부모 가슴에 못 박는 건데? 3. 못 박는 거라도, 굳이 내 잘못이냐 우리 부모님 잘못이냐를 따지자면 그래도 부모 잘못이 좀 더 크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받지는 못하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부모님께는 결국 말할 생각입니다. 취업 하고,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지만(이거 상당히 중요합니다. 부모님이 엄청 쎄거든요…) 우리 부모님이 퇴직하기 전, 즉 경제적으로 저에게 의존하기 전에 말씀 드리는 게 지금의 목표입니다. 결국은 부모님이 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구도이므로 경제적 원인에 기인한 인낙을 받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대등하게 이해 받을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정도의 나이브한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제가 더 공부하고, 더 강해져야겠지요.




대한민국 기준으로 대가족인 편인데, 다른 형제 자매들에겐 오히려 말하기가 좀 힘듭니다. 여자 형제가 없는 탓도 크고, 형제들은 이해해줘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기도 하고, 우리 집에서 제가 제일 진보적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라고 해봤자 MECO는 자유주의 중도 우파 거함거포주의자 육식 게이입니다) 오히려 남자 형제들이 득시글하다보니 이야기하긴 쉬운 편인 듯합니다. 여차하면 나 하나 없어도 부모님이 대를 잇는 것에 집착할 일도 없고, 나에게 실망을 해도 다른 형제를 보게 될 테니까요. 다만 보수적이기 그지 없는 형제들에게 폭풍 비난의 화살을 맞으면 꽤나 상처받을 것 같아, 오히려 부모님보다 후순위로 잡고 있습니다, 만 부모님께 이야기 하면 필연적으로 알게 될 거 같긴 합니다.






가장 처음 커밍아웃이 언제냐고 물어보셨죠. 첫 커밍아웃은 꽤나 싱거웠습니다. 그냥저냥 데면데면한 사람과 친구에 친구라며 만나다가 종로에서 마주쳤고,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 남자친구가 든든한 외피로 작용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 뒤 제가 주체적으로 한 커밍아웃 중엔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어요. 그 친구가 이 글을 볼 수도 있겠는데 양해를 구하진 않았군요. 하지만 충분히 양해해주리라 믿어요.




당시 저는 학부 졸업 전에 어떤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단체의 일을 좀 심각하게 떠맡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졸업학기에 과중한 업무부담과 감정노동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1주일 정도 잠수를 탄 적도 있어요. 그것도 11월 중순에. 끝날 때가 다 되어서. (그 때의 경험은 지금의 강철 멘탈 기갈녀 MECO를 만드는 데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 잠수를 타고 돌아와서, 이제 밀린 일 수습 좀 하고 후계구도를 만들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뭐 그렇잖아요. 딱히 이 일을 한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 다들 직책을 맡기 곤혹스러워 하는 거. 그래서 지친 멘탈을 수습할 새도 없이 매일 술자리를 돌리면서 대면 설득을 시도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삐지기도 하고, 미안한 짓도 많이 하고. 뭐 그런 나날들.


제가 다음 대 후계구도를 떠맡기려고 점찍어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여자였죠. (결국 만들고 보니 여초 후계구도가 만들어져 매우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MECO는 전임 여초 권력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찬탈자였기 때문에. 역시 퀴어의 삶은 투쟁적이에요. 그리고 게이와 이성애자 기갈녀는 친하기 힘듭니...) 그녀와 새벽 여섯 시까지 술을 마시고, 당시에 머물고 있었던 기숙사에 돌아왔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심호흡을 하고 (술에 취했던 주제에!) 전화를 받았죠.


근데 눈치가 이상한 겁니다. 아니, 후계구도를 떠맡겠다는 이야긴 없고 왠지 이야기가 빙빙 돕니다. 취했기 때문에 이게 뭔가 좀 이상하다는 눈치를 너무 늦게 차려서, 전화를 끊을 타이밍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질렀죠. "뭐 너도 내가 너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지 않느냐. 네가 거기에 부응할 수 있다면 뭐, 네가 바라는 후계구도도 못 떠맡을 건 없…."



아니, 이 여자야. 내가 무슨 매매혼 되는 왕녀야?!





이런 거라던가





혹은 이런 거나




이런 거?!




충분히 이성적인 상태였다면 적당히 잘 타일러서 그런 건 후계구도와는 별개의 문제고, 많이 취한 것 같으니 자러 가라고 잘 다독여주었겠지만, 감정노동에 지쳐 있었던 저는 거기서 그만 폭발을 해버리고 만 겁니다. 그리고 그녀와 저는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제가 그렇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자기 의사를 꽤나 명확히 표현했어요.


그래서 저도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벽 여섯 시의 기숙사에서도 가장 사람이 오지 않을 곳으로 가서, 주변을 살피고, 심호흡을 합니다.


그리고 전화로 질렀죠.


“어, 근데 미안. 난 게이다.”


!@#$%^&*(*&^%$#$@#$%^&^%$#!!!!!!!


말해놓고 보니 그 말이 그렇게 오글거리는 말인 줄 몰랐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녀는 기가 차다는 듯이 “…정말?”하고 물었고, 제가 거기서 뭐라 대답할 수 있겠어요…. 그냥 넙죽 엎드린 목소리로 네… 하곤 자러 가라고 다독여서 보냈죠. 들어와서 씻고 깊게 잘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카카오톡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가 난무하고 있더군요. 둘 다 하이킥을 좀 하면서, 오그라든 손발을 펴면서, 뭐 그렇게 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1주일 뒤, 그녀는 다음 대 후계구도를 떠맡겠다고 선언했지요. 요캇타 요캇타.


이걸로 끝난 줄 아셨겠지요?





그녀와 저는 계속 긴밀한 카톡을 하고 있었고, 업무뿐만 아니라 업무 외 이야기도 많이 했습니다. 즉, 그녀는 소위 말하는 faghag가 되어 저의 지지리도 찌질한 게이 연애 이야기 같은 걸 들었던 게지요. 제가 막 만나기 시작한 우리 학교 게이 이야기 같은 것들. 그러다 어느 날 그녀가 뜬금 없이 제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합니다. 저 때매 혼란스럽고 짜증난다는 거에요. 전 처음에 그녀가 제 커밍아웃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줄 알았죠. 상처 덜 주고 거절하기 위해 게이인 척 한다고 생각해?! 라는, 꽤나 명확한 분노에 그녀는 즉각 해명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도 그건 거 같다고.”



… 뭐?!


고백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저에게 마주 커밍아웃을 합니다. 나에게도 이런 시티 백일장급, 아니 그 이상으로, 퀴어문학상을 받을 일이. 그녀는 여성 동성애자 커뮤니티인 M모 넷에 가입하여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보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후계구도를 끈끈히 만들기 위한 술자리가 몇 번 있었고, 한창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그녀는 술을 먹고 몇 번 죽었고, 저는 그녀가 헛소리라도 할까봐 그녀 주변을 지키느라고 집에 가지도 못하고 재미도 없는 그 술자리를 대여섯 시까지 지키는 일도 있었지요. 심지어 다음 날 M모 넷에서 귀요미를 만나기로 했는데 폰을 잃어버렸다고, 누가 카톡을 보면 어떡하냐는 걱정에 저도 잠 못 이룬 밤도 있습니다. 세상에, 심지어 내 커밍아웃을 해놓고도 쿨쿨 잘 잤던 이 MECO가 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연상의 애인을 만나 재미있게 잘 살고 있는 듯하고, MECO는 보시다시피… (씁쓸) 이러고 삽니다.






이야길 들어봐도 이런 커밍아웃은 잘 풀린 편인 듯합니다. 저는 꽤 커밍아웃 운이 좋은 편입니다. 이야기하자마자 여성주의적 상상력을 극한으로 발휘하여 그 동안 했던 발언을 되짚어 “MECO쨩, 미안해”라며 사과해주는 친구라던가. (그런데 그 친구는 필진 stress_surplus의 동기, 그리고 저희가 아는 가장 똑똑한 녀성)


모든 커밍아웃이 이렇게 낙관적으로 풀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커밍아웃이란 이름 하에 반 아웃팅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잘 풀렸다고 생각했던 커밍아웃이 몰지각, 몰이해, 심지어는 추가적 아웃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아무리 조심한다 하더라도 커밍아웃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커밍아웃이 주는 해방감과 고양감, 정서적 유대는 가져가면서 위험을 아예 없앨 수는 없어요. 어떠한 가능성도 미연에 차단하고 살고 싶다면 누구에게도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걸 알리지 않고 사는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필연적으로 답답합니다. 결국은 납득할 수 있는 정도의 리스크를 감당하면서, 최대한 안전하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다만 커밍아웃을 하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점점 대한민국 사회가 성소수자를 인지해가고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당장 이번 주말 이태원 클럽에 갔는데, 남자들과의 성적 긴장감 없이 춤을 추고 싶어 3만원을 내고 입장한 아는 누나를 만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입니다. 누나는 ‘너 같이 생긴 애도 게이니?’라고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면서 스칠 때마다 심장 떨리게 만들 수도 있지요.


혹은 50 넘어서도 혼자 사는 남자/여자를 상정해봅시다. 우리 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고, 그들 중 일정 수는 성소수자라는 것 또한 지금보다는 더 알려져 있을 겁니다. 그런 시대에는 그냥 내가 있는 그대로 사는 것 자체가 셀프 아웃팅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좀 억울할 겁니다. 난 이태원 길바닥 끼순이도, 걸커(걸어다니는 커밍아웃)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결국 성정체성을 전혀 알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일은 허구에 가까워질 겁니다. 적극적으로 속이기 위한 행동, 가령 결혼과 같은 것을 하지 않는 한. 위장결혼을 할 수 있다면 조금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역시 현실적으로, 쉽지 않죠. 기혼이반이 설 자리는 줄어들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기혼자이면서 동성 애인을 사귀는 것과 같은 행동은 말할 것도 없겠죠. 이혼사유와 위자료 청구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분명 있을 겁니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나댄다’며 싫어하는 성소수자들 또한 이 움직임을 분명하진 않을지라도 예감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격렬한 반응이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전에도 지적하였듯이, 아웃팅을 방지하는 것과 아웃팅의 낙폭을 줄이는 것 중에서 결국은 낙폭을 줄이는 것이 우선입니다. 낙폭을 줄이기 위해서는 그늘에서 필연적으로 나와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전히 냉엄한 남들의 시선과 편견 속에서 조용히 숨어사느냐, 전향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그래도 좀 숨 쉬면서 사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을 전향적으로 만들기가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조용히 숨어사는 쪽을 선택하겠다 하더라도, 그건 점점 어려워져 갑니다. 그들을 바꾸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영영 모를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 쉽진 않을지라도, 커밍아웃을 조금 더 준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Posted by MECO


   안녕하세요 te verde입니다. 어제는 모처럼 주중 휴일인 광복절이었습니다. 다들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아침일찍 일어나서 정갈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달고...... 는 동생이 했고, 실은 8시까지 침대에서 뒹굴(...). 아, 평소에 저는 여섯시, 여섯시 반이면 일어나서 여덟시면 엄청 늦게까지 잔거에요. 비극적인 출근자의 삶, 아흙... 오랜만에 제 일기나 써보려구요.


8/14

    출근하기 싫어서 휴가를 냈습니다.(...) 그렇다고 막장은 아니에요. 실장님이 무려 8일-_-짜리 휴가를 내고 가면서 '나 휴가다녀오는동안 녹차씨도 하루 쯤 쉬어~'라고 했거든요. 난 당당해!!!

    허리가 아파서 한의원에 들러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오오 동양의 신비.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 받을 땐 그냥 욱신욱신이었는데, 침맞고 부항뜨고 하니까 몸이 가뿐해지더라구요. 매커니즘은 모르겠습니다. 그저 잘 고쳐주면 감사하지 뭐...  

    그리고 오후에는 동네주민인 야생형과 점심을 같이 했습니다. 장소는 야생형의 추천으로 알바가 귀엽다는 타이음식점, 그런데 야생형이 봤던 훈남알바보다 더 훈훈+귀염한 알바가 근무를!!!  그 가게는 알바를 외모보고 뽑나봐요, 쯧쯧 이런 몹쓸 외모지상주의... 앞으로 동네에서 약속 있으면 그 음식점으로 가서 먹어야겠어요(...)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난 후, 동네에 유명한 제빵집에 방문해서 치아바타를 씹어줬습니다. 원래는 '커피 한 잔' 이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빵을 흡입 중. '넌 이미 먹고있다' 도 아니고 이건 뭐, 점심으로 탄수화물 세례를 받았었네요 허허허허. 근데 그 가게 빵이 맛있는걸 어떡함 ㅠㅠㅠ 대한민국에서 3천개의 체인점을 거느린 빠X바X트 의 빵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맛이었긔 ㅠ. 우리 동네 놀러오면 하나 쯤은 사드릴께요. 근데 저 보름 후부터는 학교 근처로 이사감.

    평일 낮에 식당이랑 빵집을 다니면서 야생형이랑 이야기 하면서 얻어낸 결론은 '역시 돈많은 집 아줌마들은 웰빙이구나' 였긔. 훈남이 알바하는 식당도, 맛있는 빵집도 모두 비싸보이는 옷을 빼입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정ㅋ벅ㅋ 


8/15

    실은 전 조만간 복학을 할 예정이라 자취방의 열쇠를 받으러 학교 근처 자취방 건물에 다녀왔습니다. 근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중부지방 500mm 폭우 ㄱ-.  집에서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구름끼고 바람부는 날씨라서  '오, 이정도면 끝나고 어디가서 바람이나 쐬다 갈까' 이랬는데... 학교 근처 역에 도착하니 


 쏴아아아아아-   


    세상은 썩었어...

    마지막으로 집을 체크하고 열쇠를 겟, 집주인 아줌마가 개쿨하셔서 좋아요. 처음에 갔을 때 방 장단점을 대놓고 다 말해주심;; 게다가 주인댁이 이 건물에 살지도 않아서 (대학가 원룸의 경우 1,2,3,4층은 원룸으로 만들어 세를 내고 맨 윗층엔 주택으로 설계를 해서 본인들이 거주하는 경우가 많죠)  남자랑 놀아나기에 좋..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도배도 새로 해준다는데... 좀 불안. 이상한 색으로 도배해버리면 나 어떡함? ㅋㅋㅋㅋㅋㅋ 

    학교 앞에 예전에 없던 돈부리 집에 갔는데.. 완전 맛없어... 홍대의 다른 곳에서 먹던 맛이랑 비교하면 거의 발가락으로 만든 수준 ㄱ-.. 여러분 00대학 앞에 돈부리집 0000가지 마세요!!! 완전 맛없어!!! (...이것도 정보라고)

 


아이.. 쓰기 귀찮다. 일기니까 여기까지만. 다음에 만나요 여러분.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MECO


Disclaimer

Homo Surplus 일부 필진의 글은 Team Chatterbox의 공식 입장 내지는 일치된 견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해당 글을 쓴 필진의 개인적 견해일 뿐이므로 문제제기는 그 필진에 대하여 해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나른한 어제 오후였다. 적어도 한가로운 나의 트위터 타임라인에 그 글이 올라온 것은. 그리 길지 않은 글이므로 (기억나는) 그대로 옮겨보자면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가 HIV 감염에 취약한 건 사실”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불어닥친 토론의 소용돌이는 그야말로 광풍과도 같았다. 아, 그 토론의 맥락을 정리하고 내 의견 한 줄을 덧붙여 넣기 위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믿고 싶다). 자신이 논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꽉 막힌 벽과도 같은 다수의 의견을 다시금 누군가의 언어로 번역하여 옮기는 행위란, 그 얼마나 많은 결락과 왜곡을 불러올 것이며, 또한 누군가에게 답답한 벽으로 다가갈 것인가. 그 이전에 정리를 하는 과정이 내 혈압을 보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에서 등장한 전제 몇 가지를, 일반론이라는 당의정을 입혀 그 근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한다.






제국 이태원(Itaewon Empire)이라 하는 건 물론, 식민군(Colonial Army)의 진주를 전제로 한 표현이다. 지금까지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나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조금 젊잖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표현을 하기도 한다. 식별가능한 퀴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동성애자, 혹은 그 중에서도 게이들이 전체 퀴어 인구의 어젠다를 선점하였노라고. 그리고 그건 퀴어 인권운동마저 잠식하여 마치 게이들의 문제가 퀴어 전체의 문제로 둔갑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고. 어제의 토론은 나에게 전형적으로, 이런 경향성이 도드라진 사례로 다가왔다.


게이, 퀴어, 혹은 퀴어-프렌들리한 이성애자이고자 하는 독자들은 인터넷 세계의 변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심 궁금해할 것이다. 그래서 준비한, 개인 블로그에 쓰려 했던 글 두 개 정도를 갈아 넣은, MECO 식의 순도 높은 정황 설명.



토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전제를 잘 정리하는 것일 터다.


우선 문제가 된 트윗은,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가 HIV 감염에 취약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본 문제제기는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남성 동성애자’와 ‘성적 왕성함’의 결부에 대한 불편함의 제기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논한다.



그런데 사태가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 인터넷 상에서 호모포비아와 게이들의(편의상, 이렇게 정의) 오랜 전쟁의 양상 때문인데, 호모포비아들은 “게이는 HIV에 취약하다, 그러므로 게이들은 더럽다/금지되어야 한다/바람직하지 않다/권장할 수 없다”와 같은 일련의 논리구조를 채택하고, 게이들은 이 전제를 흔들기 위해 많은 수단을 택한다.


논리적으로 저 짜증나는 명제를 분석해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될 것이다.



1. 게이들은 애널섹스를 많이 한다. 사실 애널섹스를 하는 사람들 중 절대다수는 게이이다.


2. 애널섹스는 HIV 감염에 취약한 섹스 방식이다.


3. HIV 감염에 취약한 섹스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4. 그 이후의 여러 소모적인 매도들. 게이는 더럽다. 모두 감방에 가둬야 한다. 여자 맛을 못 봐서 그런다 등등.



4번 이후의 매도는 사실 사람 취급해 주기 힘든 애들이나 하는 소리일 것이다. 정작 문제는 3번에 있다. HIV 감염에 취약한 섹스 방식과, 그런 섹스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HIV에 취약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다운그레이드해 보는 왜곡된 관점.


이 관점의 왜곡성을 지적하는 글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게이들의 반박은 1+2번에 치중해 있다. ‘게이는 HIV 감염에 취약하다’는 명제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고,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 이를테면 이런 방식이다.


2번 명제에 관해, 애널섹스를 하는 사람만이 HIV에 감염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한에이즈예방협회는 보통의 성관계에 0.1-1% 정도의 HIV 감염률을, 그리고 애널섹스에 0.3-5% 정도의 감염률을 상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포비아들의 논지는 약간 수정하여, HIV 감염률이 더 높은 섹스 방식과 그 섹스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은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논의의 방향은 자연스레 1번 명제로 가게 된다.


소위 말하는 “나는 게이지만 애널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바로 그런 것. 어떠한 형태를 띠든 결국은 게이=애널섹스의 도식을 파괴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어제 또한 그랬다. 원래의 트윗은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가 HIV 감염에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였으나, 여기서의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 부분에 생략된, 그들이 애널섹스를 더욱 자주 한다는, 그리고 섹스 과정에서 HIV 양성의 파트너를 만날 확률이 높다는 부분에 대한 반론이 있었다.


나 또한 게이=애널섹스의 도식을 100% 인정하지는 않는 편이지만[각주:1], 그와는 별개로 이 파괴에는 어떤 불순한 목적성이 존재한다. 1, 2번 명제와 3번 명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바로 1, 2번 명제는 HIV 감염 취약성을 논증하기 위한 중간다리에 가깝고, 3번 명제는 남성 동성애자가 HIV에 취약하기 때문에, 그들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잘못된 가치판단과 논리비약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의 결락과, 그를 지적하는 공격의 움직임은 당연히 3번 명제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1, 2번 명제에서 근본적인 불편함을 느끼는 일부 게이 및 ‘자칭’ 인권운동가들의 직관은 결국 게이와 HIV가 어떤 식으로든 결부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각주:2]


굳이 HIV 감염인과 게이의 상관계수를 논하지 않더라도 – 그 와중에 ‘변인통제’와 같은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지만, 이는 넘어가고 – 개념적으로도 그렇다. 더 쉽고 취약한 논리적 맹점 대신, 통계의 맹점과 오류를 만들어가며 굳이 1, 2번 명제를 공격하는 것은 결국 1, 2번 명제 자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바로, 동성애와 HIV의 연결고리.


이걸 깨려고 하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결국 이들에겐 HIV가 남의 문제,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 논의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HIV와 동성애자를 결부 짓지 말아야 할 어색한 논거의 각종 변주가. 그런데, 왜 HIV와 동성애자를 결부 짓는 것이 불편한가?[각주:3]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없었고, 당연히 답도 없었다. 아니, 없지는 않았는데 꼰대들의 오독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에이즈포비아인 건 아니에요”라는 말도 많이 보았다. 그런데, 그게 에이즈포비아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게이는 싫지만, 그렇다고 제가 호모포비아인 건 아니에요.”




첨언하자면, 사회적 소수자가 모든 면에서 바람직하며 다른 소수자 인권에 민감해야 한다는 규범적 요청은 어떤 의미의 이중 잣대라고 생각한다.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선해서가 아니라는 나의 옛 주장들과 같은 취지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소수자가 자신의 인권보장을 요구하며 했던 주장과 논리모순, 자가당착에 빠지는 일은 적어도 없어야 한다. 소수자 사회의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s) 현상과도 같을 것이다. 자신들은 같은 취지의 주장으로 어느 정도의 입지를 확보한 후,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신들이 당했던 억압논거로 찍어 누르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또한 AIDS/HIV 문제가 게이의 문제가 아닐까? HIV 양성 감염인은, 게이와 전혀 다른 사람들일까? 심지어 이는 HIV 감염인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인식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게이가 HIV에 감염되었다고 하여 게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HIV에 감염된 게이가 될 뿐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인권을 박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민권이 면탈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조금 더 특수한 형태의 사회적 보호가 필요해질 뿐이다.








많이 돌아왔다. 그래서 이는 제국 이태원 현상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동성애자/퀴어 인권운동 신(scene) 내부에 깊숙이 밀착되지 않은 내 입장에서,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구호는 매우 즉물적이고 직관적이다. 즉물적이고 직관적인 구호는 정서적 공감을 통해 전파되고, 이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문제가 된다.[각주:4]


퀴어, 조금 더 대중적인 용어로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확보한 입지는 게이가 이뻐서, 레즈의 사고방식이 올바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결국은 사회가 소수자를 어떻게 포용하고, 그들이 상처받지 않고 사회 구성원으로 공존할 수 있을지 고민 끝에 찾은 타협점에 가깝다. 그 타협점이 보이는 협상력과 정치력이 결국은 다수를 차지하는 게이들에게 독점되는 현상이 분명 발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부 게이들의 설익은 사고방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류 퀴어 운동의 목소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소위 말하는 퀴어-프렌들리한, ‘인권감수성’[각주:5]을 갖춘 이성애자들 또한 저 목소리를 전사하게 된다. 아웃팅 방지가 퀴어 인권운동의 알파요 오메가며, 거의 제1가치로 평가 받는 이런 현상, 혹은 게이들의 즉물적인 HIV와의 비결부 요구가 마치 인권적으로 선진적인 주장이기라도 한 양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과 공감을 얻어 전파되는 이런 현상들.


이 현상은 결국 즉물적인 게이 어젠다의 한계를 그대로 퀴어 커뮤니티의 문제로 전사한다. 게이 커뮤니티에서 존재할 수 있는 HIV 감염인에 대한 색안경은 그대로 퀴어들의 자가당착이 되며, 나이브하게도 통계자료와 해석방법에 대해 던진 엇나간 문제제기는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너무도 크고 반복적이어서, 내부의 자정작용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혹은 다른 소수자들의 또한 시급한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내부의 자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항상 계도적이고 도덕적으로 완벽할 수는 없다. 평소 운동 신에 훈수를 두는 꼬장한 “올드 스쿨 게이”들이 아니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이기는 수단은 결국 더 철저한 논리가 되어야 한다. 말꼬리를 잡는 건 부끄럽고, 솔직히 뭘 말하는지 이해도 못하는 건 더 부끄러운 일이다. ‘위트’ ‘버튼’과 같은 기믹에 휘둘리지 좀 말고.


상대의 도덕적 미결이 나의 논리적 흠결을 감추어주지는 않는다는 것. 특히나, 들어야 할 사람이 상대방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일 때는 더더욱 말이다.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결국 다른 퀴어들의 합리적이고 심층적인 문제제기를 묻어버리는 이런 답습이 업스트림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사태에 있어 개구리밥 님이 제시했던 여성의 성적 욕망과 같은 부분들.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라는 발언이 이를 위배했다고는 보지 않지만, 확실히 평소 배려가 결여된 부분이란 지적도 피할 수는 없다. 더욱 적극적으로 개구리밥 님이 제시하는 논거들을 보면 레즈비언 섹스에 대한 안내 지침의 부재와 같은 것이 있다.


또한 STD(Sexually Transmitted Disease: 성병)에 있어 어젠다가 나뉘어 설정되어 버렸다는 사실 또한 큰 문제다. HIV는 그야말로 남성 동성애자의 문제가 될 뿐이고, 같은 의미에서 HPV(Human Papilloma Virus, 여성의 자궁경부암을 유발)는 중년 여성, 혹은 고작해야 예방접종의 대상이 되는 젊은 여성들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HIV 감염인 절대 수는 이성애자가 더 많으며(당연한 일이지만, 그리고 비율상 동성애자 HIV 감염인의 비율이 넘사벽이겠지만), HPV 예방 백신인 가다실이 콘딜로마(HIV와 함께 STD계의 양대 공포, 곤지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질병을 하나의 성정체성과 결부하게 되는 방식은 효율적인 방식도 아니며, 위험하기까지 한 결락을 불러오게 된다. 이 또한 업스트림의 목소리에 묻혀, 지적과 개선의 움직임은 요원하기만 하다.




정리하자면, 인권운동의 현장 구호가 즉물적 호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그런데 그 호오는 결국 퀴어 운동현장의 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결정한다는 것. 그러다 보니, 게이 사회 내부에서 정제되지 않은 단순 호오가 표면에 대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이런 어젠다의 잠식을 나는, 퀴어 사회 지분을 다수-소수자가 독점하는 현상을 현현한 ‘제국 이태원’의 전형적인 일례로 본다.


그렇다면 단순히 퀴어 사회의 새로운 독재자로 군림한 게이, 혹은 그에 편승하는 일부 알파-레즈비언들을 척결하면 되는 문제일까? 사태를 그렇게 바라보고 싶어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게이-마초성을 가정하고 죽창으로 이를 해결하려 드는 방식을 우리 모두가 바라지는 않는다고 가정하고,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한다.


누군가를 마초-비마초로 나뉘어 판단하여, 마초를 배격한다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현재의 독점체제를 문제시하는 방법은 너무 단순하다. 그런 판단의 결과로 게이가 퀴어 사회 지분을 잠식하였다는 문제인식에 공감할 마음도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자성에 가까운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해결 또한 그 방향에서 나와야 한다. 게이라면, 그리고 더군다나 메인스트림이라면, 의식적으로 성정체성-성지향의 모든 조합이 가능하다는 가정적인 시뮬레이션을 계속적으로 시도하는 수 밖엔. 그것이 게이에게만 강요되는 것은 물론 아닐진대, 이러한 조합을 당연히 숨쉬듯 할 수밖에 없는 성정체성-성지향의 사람들도 존재하므로, 결국은 그 곳까지 상상력을 뻗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나마, 우리에겐 이러한 상상력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는 점을 새겨보는 것도 좋을 법하다. 누군가에게 이 세상은, 혹은 대한민국은, 게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어야만 하는 청정구역이기도 하다. 그들이 얼마나 무지몽매해 보이는지 다시 한 번 새기면서, 더욱 정진을.






첨언 1. llello 님의 이 글, 그리고 이 글은 지금껏 이 사태에 관해 쓰인 가장 좋은 글이다.


첨언 2. 위와 같은 의미에서 동인련 HIV/AIDS 팀의 인권교육은 좀 가자. 나부터도, 내가 이런 걸 잘 모르고 있다는 판단이 선다면.

  1. 그럼에도 나는 애널섹스를 하는 게이이고, 저러한 형태의 주장이 일종의 선긋기로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배제의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런 나의 주장을 오히려 헉하며 받아들인 사람은 전혀 다른 층위의 주장을 하고 있었던 - 그러므로 애널섹스를 하지 않는 게이들의 주장에 대해 심정적 동조를 하는 것에 가까웠던 - 게이가 아닌 퀴어들이었다. [본문으로]
  2. 또한 나는 일군의 이런 주장에 관해 성엄숙주의에 젖어 있다고 비판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관련성이 덜하여 굳이 논하지 않는다. 하지만, 애널섹스를 하지 않는 게이의 존재를 들어서까지 HIV와의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자신들이 탈출하고 남은 애널섹스를 하는 게이들은 HIV와의 연관성을 그대로 인정하며, 그들에 대한 색안경을 끼게 되는 것인지 조금 더 자아성찰을 요구하게는 된다. [본문으로]
  3. 어느 모로 생각해보나 AIDS/HIV는 악이 아니다. 걸린 사람들의 불행을 연만하고, 나에게 걸릴 가능성이 있음을, 그리고 그 가능성이 항문성교를 상대적으로 덜 하는 듯한 이성애자에 비해 높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러면 어떻냐는 당당한 태도로 임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관리가능한 질병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 [본문으로]
  4. 참고로, 여기서의 인권운동 신이라는 것은 본격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공감공감을 얻기 위해 트위터에 트윗을 하여 그것이 RT를 통해 전파되는 층위까지도 포섭한 개념이다. [본문으로]
  5. 인권+감수성이라는 이 단어는 상당히 웃기다. 인권이 언제부터 감성의 문제였을까? 물론 인권 지표와 관련 토픽에 민감하게 반응하여야 한다는 취지는 이해를 한다만, 이 단어의 사용례는 사실상 인권을 감성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일군의 주류 이데올로기를 놀랍도록 탁월하게 묘사해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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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언제나 그랬다. 내가 열두 시간 전까지 있었던 게이바와 게이클럽에 굳이 비싼 돈을 주고 들어와 춤을 추겠다는 건 양반이고. 게이 카페에 가입하여 소위 '인증'글을 모조리 캡쳐 뜬 블로그가 있었네, 검색 크롤을 통해 들통이 나자 게이들을 조롱하고 자신들끼리의 서로이웃 블로그로 전환을 했네 하는 이야기들. 이미 모든 커뮤니티는 그들에게 뚫려 있었다. 심지어 위치기반 소셜 데이팅 어플리케이션(지오소셜)에 자신의 얼굴 사진을 당당히 걸어둔 여자도 있다. 친구를 만들고 싶다며 왜 말을 걸지 않느냐고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당당한 그들에겐 "faghag"라는 말의 경멸적 어조까지 어울린다.


그런데 아뿔사, 이번엔 심지어 지오소셜을 캡쳐하여 누구나 볼 수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다고 한다. "게이이기 아까운 훈남들"이란 제목으로. 이런 미친! 분노와 경악은 당연하다. 나의, 우리의 입장에서 이는 갑작스레 나의 영역을 침범한 흙 묻은 맨발이기 때문에.





아웃팅 배척의 예외성




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자. 게이인 당신은 사회적으로 핍박받는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그 핍박은 어느 지점에서 오는가? 자신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 사람들의 편견, 손가락질, 과도한 관심과 배척, 불이익, 차별과 같은 지점 아닐까.


게이/퀴어의 목소리 중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아웃팅 방지에 대한 요구이다. 아웃팅은 범죄이며, 심각한 삶의 위협이라는 것이다.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권리인 사생활의 자유를 끌어온다. 누구에게나 사생활을 누릴 자유가 있는 법인데 그 사생활에 대해 남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지만, 헌법은 그런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헌법이 가장 강한 규범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은 국가에 대해 무언갈 요구할 때 뿐이다. 그 이외,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있을 때 헌법은 도덕책보다도 쓸모 없는 수준이다. '친구를 때리면 안 되요. 근데 쟤가 나 때려요' 같은.


조금 더 나아가보자. 아웃팅이 범죄라고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논의는 직관적으로 명예회손명예훼손의 법리를 끌어온다.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성정체성인 게이라는 사실을 남에게 밝히는 것은 나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형법 제307조는 두 항목으로 나뉘어져 있다. (1) 공연히 사실을 적시한 경우와 (2)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경우. 즉 아웃팅을 한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잡아넣기 위해선 그렇다면 "A는 게이다"라는 말이 사실인지, 허위의 사실인지를 검증받아야 하는 과정이 남는다. 게다가 형량을 보면, 게이를 게이라고 말하는 것이 게이가 아닌 사람을 게이라 하는 것보다 죄질이 가볍다. 이게 뭐야?!


명예훼손의 개념으로 들어가봐도 모순과 의문점이 남기는 마찬가지이다. 게이라는 사실이 나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게 이 쪽의 주장이 된다. 그리고 같은 입으로 게이임은, 퀴어임은 잘못된 게 아니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우린 모두 어떤 지점에서 퀴어한 사람들입니다. 남들과 다르지 않아요. 이렇게 태어난 걸요. 교정치료 같은 걸 할 필요 없이, 그냥 이대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아 주세요.


그런데 제가 게이라는 걸 남들에게 말하면 제 명예가 훼손됩니다. (/두둥!)



물론, 대한민국 사회에서 게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통제영역 너머에서 까발려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웃팅 방지 운동은 어디까지나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생긴 것이며, 게이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라는 주장과는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극단적인 이야기이다.[각주:1]


아웃팅이라는 건 우리의, 아니, 나의 생활에 있어 현실적으론 꽤 중요한 문제이긴 해도 게이로서 사회 개선을 꾀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가치일 수는 없다. 그건 '이렇게 해달라'는 요구가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령 게이가 대통령이 되어 퀴어 프렌들리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더라도, 아웃팅이 제1가치라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웃팅을 범죄로 규정하고, 위반하는 자에게 실형을 살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디까지는 아웃팅이며 아웃팅이 아닌지에 대한 혼란이 빚어질 것이고, 더 문제적으로 '너 게이야?'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될 것이다. 심지어는 나 자신이 '나 게이야'라고 선언했다 하더라도, 아웃팅을 극단적으로 염려하자면 내가 혹시 말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남들은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면 안 된다. 이런 금기의 장벽을 쌓는 것이 진정한 퀴어 해방일까.





문제는 그 지독한 타자화




물론 내가 지오소셜 앱에 대한 이러한 침탈,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핍박과 지독히 사물적인 호기심에 대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자'고 주장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이걸 아웃팅이라는 프레임 하나로 단순히 묶어버리는 걸 반대할 뿐이다. "그거 아웃팅이야"라는 말은, 많은 양식 있는 사람들의 입을 즉각 묶어버리는 효과는 있지만 가끔 전가의 보도로써 남용되곤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처럼.


오히려 이번 사건을 터뜨린 년들사람들의 사고를 조금 들여다보면 어떨까. 그들은 왜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일까. 게이에게 선망을 가지는 여성들의 기저심리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만 자신과의 섹슈얼한 텐션이 없다는 것과, 핑크장갑 님과 같은 패션 게이들, 혹은 주변의 보통 남성과는 나눌 수 없는 여러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사는 것 같다. 정도는 다르지만 동인소설에 심취하여 게이에 대한 비이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자들 또한, 결국은 그 근저에는 호감이 베이스된 것 같다.


호감을 베이스로 깔고도 이런 파괴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어긋난 관심, 삐뚤어진 애정이란 것일테다. 나는 문제의 핵심이 그들이 게이를, 다른 퀴어들을 이해하려고 했다기보단 그저 게이라는 사물을 소비하려는 데에 있다고 본다. 아웃팅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어디까지나 문제의 부차적인 층위일 뿐이다. 이것이 아웃팅이라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들이 그토록 선망하는 게이라는 존재가 이러한 소비에 반발할 때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대신 오히려 비아냥거리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 더욱 문제적인 상황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퀴어 운동은 그러한 비아냥을 배척하고 도태시키기 위한 역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비아냥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을지라도.



예를 들어, 이런 글은 어떨까?


아웃팅이 개입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오히려 퀴어들에 대한 공격을 비난하는 어조의 글이지만, 이 글에서도 비슷한 타자화를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문단:



지금껏 내가 ‘배운’ 바로는 퀴어들에게는 오직 사랑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명예와 부, 그리고 그것을 위한 전쟁을 좇는 삶이 무의미하다. 나는 나의 퀴어 친구들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그들이 만든 시이거나 음악이었다. 그들이 왜 총을 들기 싫어서 국가를 버리는지, 왜 전쟁 말고 사랑을 외치는지 나는 이제 조금 알게 되었고 그래서 조금 더 사랑을 존중하게 되었다.


양효실, 서울대 미대 동성애 혐오작품 논란, 시사IN 225호 中



'사랑으로 충만한 퀴어'라는 상을 하나 세워두고 그 상에 근거하여 퀴어를 존중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이 문단은, 히피 문화에 대한 묘한 향수를 가지고 퀴어들을 신인류로서 제시하는 퀴어 낭만문학으로 흠잡을 데 없다. 그렇다면 양효실 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애인 없이 하루하루를 밀리터리 덕후질로 보내는 거함거포주의자 육식 게이는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것인가.

선한 사회적 소수자의 허상이란 게 존재한다. 사회적 소수자는 선하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들이 얼마나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인데, 그저 이 사회적 구조란 것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다며, 그 구조를 걷어 주면 그들은 특유의 선함으로 우리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으므로 공리주의적인 관점에 의거해 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그러한 낭만적 주장. 이러한 주장이 주는 문학적 카타르시스는 인정한다. 하지만 사회적 도움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긍정적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세태는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Faghag 팬덤의 인터넷 아웃팅이든, 물처럼 맑고 순한 게이의 허상이든 결국은 타자화로부터 시작된다. 커밍아웃한 연예인이 TV에 등장해 게이 개그로 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호감을 사는 시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여러 게이들의 얼굴은 모호해진다. 나의 일상 생활 속에 게이가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을 아직 누구나 하지는 못하는 그런 시대이다. 그들에 대한 여러가지 형태의 환상(幻想)이 자리하고, 환상에 들어맞지 않을 때 그들은 당황하고, 더러는 반감을 가진다. 왜 내가 가진 상(像)에 너희는 들어맞지 않느냐며.




그래서 어쩌라고



MECO는 형이상학을 하는 사람이라는 오해가 생길 지경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공부를 해본 적 없는 사람인데. 그래서 독자들이 던질 질문을 나 스스로 던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일단 벌어진 아웃팅을 대체 어쩌자는 건가?

명예훼손은 웃긴 소리다. 이건 전기통신기본법상 전기통신설비를 이용하여 일어난 범죄이므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처벌을 구해야 한다. 법 제49조에 규정된 "정보통신망에 의하여 처리ㆍ보관 또는 전송되는 타인의 정보를 훼손하거나 타인의 비밀을 침해ㆍ도용 또는 누설"에 해당하는지 부분을 입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해당 지오소셜이 누구나 설치하면 볼 수 있다는 점은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지만, Terms of Services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법상 고소에 더하여 민사상 위자료도 해볼 수 있을 것이고.

엇? 이게 전부? 그건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타자화에 대응하는 방식은 누구나 다를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벽장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는지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내가 같은 게이란 이유로 정치적 견해가 일치하리란 것 또한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게이란 점은 일정 부분에서 같은 주장을 공유할 수는 있다. 그 지점에서 연대의 신비가 작용할 것이다.

만일 당신의 포지션이 현재 이 곳의 인권신장을 바라는 과격파라면, 당신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인권 가치에 따라 그걸 보장 받기 위한 길을 걸으면 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다시피 인권신장을 이야기하며 아웃팅을 우선적 가치로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아웃팅으로 오늘도 상처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프지만, 결국 퀴어 인권운동의 방향은 아웃팅의 낙폭, 즉 아웃팅이 있더라도 그 결과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도록 만드는 쪽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지만, 또한 누구나가 완전히 벽장을 나올 수는 없다. 당신이 벽장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결국은 아웃팅 방지는 스스로의 현명한 처신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아웃팅의 낙폭을 줄이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당신의 불안 또한 최대한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타자화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결국 타자화의 문제는 엄밀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답이 ㅇ벗는 faghag타자화된 호의의 표현이라 하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그 정도의 호감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문제이다. 그리고 항상 이론적 정밀함만이 사태를 돌파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보여주었듯이 가족주의 또한 퀴어를 이해하고 포섭할 수 있다. 그것이 부작용을 쫙 뺀 담백한 이해와 포섭은 아닐지라도, 세상은 그렇게 누비어져서도 굴러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에 움츠러들지 않는 것. 퀴어에 대한 반가치를 적극적으로 들고 나온 포비아가 개입되지조차 않은 이번 사안으로 혹시라도 겁을 먹고, 목소리가 수그러들지 않는 것.

오히려 더욱 기갈차게 외쳐주진 못할 망정,"너희 같은 무개념녀들이랑은 내가 이성애자라도 안 놀아." "왜 내 사진은 없냐! 내 사진도 캡쳐 좀 굽신굽신"숨어버리지 않는 것. 




이 글을, 이번 사건이 터진 후 지오소셜에서 수많은 훈나미들이 사라질 것을 가장 먼저 걱정한 Chatterbox 구성원들에게 바칩니다. :)

  1. 실제 지금 우리 사회 수준과 비슷했을 90년대 미국에서 게이 유명인을 아웃팅시키는 Queer Nation이라는 단체가 있었다. 물론 그들이 호모포비아라는 건 아니고, 오히려 게이 인권운동의 한 방향으로써 이를 도입한 것에 가까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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