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야 다음에 올 것을 기다리는 이유 -이송희일 감독의 <백야> <지난여름,갑자기> <남쪽으로 간다>감상
우리 모두는 무언가의 오덕이었다 2012. 11. 18. 22:36이 리뷰는 상당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읽을 때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이쪽동네 사람들’은 딱히 어느 때라고 구체적으로 특정지어 말할 필요 없이 거의 항상 퀴어영화에 목말라 하고 있던 것 같다. 2012년 한 해 동안 <은교>가 사내들의 호기심을 부추겨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 <건축학개론>에서 아렷한 첫사랑의 화신으로 남아버린 수지를 보며 애닯아 하는 동안, 그리고 <늑대소년>를 보며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고분고분하고 헌신적인 남자의 판타지에 눈물짓고 달달하게 녹아내리고 있는 동안 ‘이쪽동네 사람들’은 먹을 것도 얼마 없는 간촐한 삼첩반상에 그저 만족해야 했다. 한 해 동안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는 400여개가 넘어가는데 퀴어를 다룬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우리는 1년 내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었던 셈이다.
이 지독한 배고픔을 견뎌내는 와중에 <백야>를 비롯한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멜로 연작이 우리에게로 드디어 왔다. 내가 <백야>와 단편 <지난여름, 갑자기>를 처음 봤던 때는 6월에 열렸던 인디포럼에서였는데, 개성적인 이 두 편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던 매력에 매혹되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이들을 다시 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썩 괜찮은 것들 중 몇몇이 종종 그러한 운명을 맞이하듯 벽장 안에 갇혀 좀처럼 나올 기회를 잡지 못하던 것 같았다. 그로부터 제법 긴 시간이 지나 누군가로부터 이 영화들이 위에 켜켜이 쌓인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스크린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수 개월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 속에서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막연한 이미지들과 조각들을 모아 언어의 미세한 채에 거를 필요성을 느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백야>는 하루 24시간 중에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밤 시간을 쏙 베어내어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밤만이 가지고 있는 왠지 모를 자유로운 공기와 차갑게 가라앉은 밤기운을 듬뿍 머금은, 도시의 고즈넉한 정경을 느리고 긴 호흡으로 담아내는 이 영화를 보면서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에서 느낀 시애틀의 짙은 안개내음을 맡는 기분이 들었다.
빛(조명)과 어둠을 잘 활용하여 밤이 주는 양감을 풍부하게 살리고, 강렬한 이미지를 뽑아낸다는 점에서 <백야>는 참 근사한 영화이다. 가끔씩 도로를 활강하여 내달리는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소음과 한 점의 빛 외엔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와 담배를 피워대던 첫 쇼트를 생각해보자. 그가 성급하게 빨아올린 흰 연기가 무색하게끔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는 남자(원규)는 도착하는데 그들은 얼굴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아니한 채 발걸음을 옮긴다. 어둠과 정적,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의 이미지가 뒤섞인 첫 쇼트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뒤이어 드르륵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말없이 걸어가는 원규와 옛 애인으로 추정되는 사내, 그리고 담벼락에 걸린 채로 그 주인들을 따라가는 그림자가 스크린에 비춰질 때면 빛과 어둠을 최대한 활용했던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슬며시 떠오르기도 한다.
이 영화는 어둠과 빛을 인물의 내면과 심정을 드러내는 질료로써 활용하기도 한다. 옛 연인을 만나고 나서 돌아온 호텔 방은 원규가 돌아온 이후에도 불이 들어올 줄 모르며, 오직 그의 방에 존재하는 불빛이라고는 코끼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내보내고 있는 TV의 브라운관이 발하는 희끄무레한 빛뿐이다. 그 방에 가득 차 있는 어둠은 코끼리가 헤엄치는 영상을 멍하니 보던 원규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는 데 익숙하다. 여기서 확장된, 이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은 원규의 슬픔과 고통을 상징하고 때로는 은폐하는 장치인 동시에 원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실제로 서사가 진행되는 내내 공간을 빽빽히 메우고 있는 어둠에 변화가 일어나는 때는 단 한 번으로, 원규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한 그 사건에 대한 복수가 마침내 종결되고 원규와 태준의 관계가 다른 국면을 맞이했을 때 흰 눈이 흩날리며 어둠은 백야가 된다.
처음에는 아무렇게나 내던져지는 듯 했던 대사와 미장센이 나중에 또다시 반복 혹은 변주되면서 완결된 구조를 취하는 점 또한 <백야>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첫 만남에 이어 시도된 섹스에서 원규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일방적인 태도를 보였을 때 태준은 분노에 가득 차 그곳을 금방이라도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 동시에 방으로 옮겨서 관계를 갖자는 원규의 은근한 제의를 무시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결과적으로 제의를 무시해버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원규를 앞질러가는 듯하던 태준은 얼마 안 가서 멈춰선다. 한편, 태준의 이런 행동을 보고 제의에 넘어온 것으로 판단한 원규가 앞질러 간 태준의 위치에 도착하는 순간 일정 거리를 달려나간다. 또다시 원규가 발걸음을 옮겨보지만 아까 일어난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뿐이다. 제논의 역설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거리가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이들의 움직임을 뒤에서 잡는 쇼트는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이 쇼트는 뒤에서 반복, 변주된다. 사적인 복수가 끝난 뒤 원규와 태준이 계단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원규가 먼저 일어나 자리를 뜨고 얼마쯤 걷지도 않아서 태준을 태운 오토바이가 원규를 앞질러간다.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가 뒤에서 바라본다는 점까지 이 쇼트는 앞서의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원규가 태준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와 나란히 서게 되고 태준은 더 이상 뛰쳐나가지 않음으로써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는 완전히 소멸된다. 원규가 홀로 걸음을 걷기 시작한지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오토바이 소리와 동시에 태준이 등장해 원규를 앞질러가서 기다리고, 원규는 멈춰선 태준과의 거리를 좁히는 장면을 카메라가 뒤에서 담아낸다는 점까지 동일한 두 쇼트의 반복과 변주는 그 두 지점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보여준다. 태준이 원규의 호모포비아적 범죄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에 연대함으로써 보다 즉물적이고 도구적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다른 국면으로 비로소 이행하게 된다. 반복, 변주되지는 않지만 전반부에서의 두 인물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도구로 인형뽑기게임이 등장하기도 한다. 두 번째 시도한 섹스가 실패하고 난 후 슈퍼에서 담배를 사가지고 입에 물며 투덜거리는 태준에게 원규는 6시까지만 있어달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하는데 이로 인해 두 사람 간에 가벼운 마찰이 일어난다. 이들의 충돌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인형뽑기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갈등상황이 진행되는 장면 사이에 원규가 하고 있는 인형뽑기장면이 삽입되는데, 인형이 집게에 잡혀올라가도 끝끝내 미끄러져 떨어지는 장면의 반복은 이들의 충돌상황을 은유적으로 제시하는 시각적 극대화이다.
어둠을 설명하면서 잠시 언급했던, 옛 애인을 만나고 온 원규가 어둠에 잠긴 방으로 들어오는 미장센은 다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 공간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무저갱이기도 하지만 어딘가에 갇혀 있는 혹은 폐쇄된 원규의 내면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어딘가는 2년 전 사건을 의미하는 과거일 수도 있고 원규의 내면에 있는 자기부정일 수도 있다. 브라운관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캐리어에서 짐을 꺼내 침대 위에 풀던 원규의 모습을 벽 사이에 있는 좁은 공간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카메라는 원규를 벽으로 사방이 막힌 방 안에 갇힌 존재로 비유한다. 당구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원규를 만류하면서 말다툼을 하다가 태준이 분노에 가득차 건물을 뛰쳐나가는 쇼트도 마찬가지다. 계단을 내려가 막 입구를 나가려던 태준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벽에라도 부딪힌 것처럼 주춤거리며 나가지 못하고 다시 당구장으로 되돌아오는데 이를 촬영하는 쇼트 역시 벽과 계단으로 시야가 답답하게 가려져 태준이 어딘가에 갇힌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미장센은 복수가 감행되는 현장에서 재현된다. 친구들과 당구를 치다가 화장실로 향하는 범인을 분노에 휩싸여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원규와, 뒤이어 당구공을 움켜쥐고 따라가는 태준을 담고 있던 쇼트, 그 다음 지점이 바로 그렇다. 카메라는 이를 화장실 밖에서 문을 통해 복수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잡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폭력이 날것 그대로 카메라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는 장치인 동시에 사건이 일어나는 화장실을 폐쇄되고 닫힌 공간으로 그려낸다.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태준과 원규는 나오지만 카메라는 그곳에서 나가는 그들을 바로 따라가지 않고 그 좁은 문 사이로 화장실 안에 쓰러져 있는 범인을 담는다. 이 쇼트는 화장실에 쓰러진 청년을 원규와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 묘사함으로써 원규와 그 범인이 역설적으로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하는 듯하다. 심지어 옛 애인과 태준이 원규에게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를 묻는 대사 역시 전반과 후반으로 나뉘어 반복되고 원규가 독일에 사는 35살 혹은 24살의 연인으로 바꿔말할 때마다 라이터가 클로즈업되거나 그 소리가 중간에 끼어드는데 이를 통해서 이 영화는 생각보다 더 치밀하게 반복과 변주라는 씨실과 날실로 견고하게 직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중심소재인 종로무차별사건을 솜씨좋게 제시하는 동시에 그 쇼트에 흐르는 씁쓸하면서도 애잔한 정서에 무거리로 밀착해 있는 카메라의 연출은 이 사건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폭행사건의 전모를 스마트폰 화면의 기사로 제시하여 관객에게 주지시키는 한편, 기사에 첨부되어 있는 폐쇄회로카메라에 잡힌 폭행현장사진을 보는 태준의 모습을 앙각으로 내려가 그의 머리 위에 있는 폐쇄회로카메라를 흐린 초점으로 얼핏 보여준다. 그 다음 화면에 가득 채운 클로즈업으로 CCTV카메라를 강조하는가 싶더니 CCTV카메라 시점으로 재빠르게 전환하여 우두커니 서 있는 원규의 모습과 그 주변을 화면 안에 담는다. 이 놀라운 카메라워킹과 편집으로 인해 관객들은 두 가지 사실을 재빠르게 캐치할 수 있는데 일차적으로는 지금 그 CCTV카메라의 시점에서 촬영되고 있는 화면과 기사에 첨부된 사진의 동일성이고, 뒤이어 그 지역이 예전 그 사건이 발생했던 피해현장인 동시에,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원규가 피해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다. 그 다음 우두커니 서 있는 원규가 허리를 굽히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화면을 잡아당긴다. 허리를 굽혀 뻗은 그의 손가락이 바닥에 있는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쓰다듬고 있는 화면은 제법 서늘한 느낌을 주는데 카메라는 이를 클로즈업으로 표현함으로써 당시 원규가 입은 뿌리 깊은 상처를 위로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이런 카메라의 위로하는 듯한 움직임은 관객을 그 자리에 불러들여 애도의 자리에 동참하게 한다.
물론 영화 <백야>는 과거에 있던 종로 무차별폭행사건을 부각시켜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불구자로 남은 원규의 옛 애인과 ‘떠돌이난민’으로 전락한 원규에 대한 접근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원규와 태준의 관계 변화 묘사에 주력함으로써 선택적 집중을 한다. 예를 들어 가족들의 냉담한 반응과 기자들의 괴롭힘에 견디다 못해 ‘떠돌이난민’이 된 원규와 동일한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에서의 삶을 행복하게 잘 꾸려가고 있는 옛 연인의 비교를 통해 다른 퀴어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곤 하는, 고통이 현존하는 이 공간을 떠나 이상적인 곳으로 망명하고 싶어하는 어떤 게이의 전형을 부각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데 관심이 덜해보인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초점은 특별한 관계가 될 것이란 생각이 전혀 없던 두 사람이 주어진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그 사이에 작용하던 척력을 어떻게 인력으로 바꾸어가는가를 묘사하는 데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지점에서 <백야>는 비로소 김태용 감독의 <만추>와도 겹쳐질 수도 있는 지점이 발생한다.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3일 간의 특별휴가를 받고 형무소에서 나온 죄수와 부잣집 여자들을 접대하고 돈을 벌다가 남편에게 쫓기게 되는 호스트가 조우하게 되면서 둘 사이에 있는 거리를 점차 좁혀가는 이야기이다. 애나(탕웨이)는 3일의 짧은 휴가가 끝나면 도로 모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함을 알기 때문에 굳이 인연을 만들려하지 않으며 일부러 일에 자신이 관련되는 것을 피한다. 훈(현빈)은 애나를 시애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처음 발견하고는 가볍게 데리고 놀 상대로 생각하고 접근하고 애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훈을 거부하려 한다. 김태용 감독의 코멘트를 빌리면 <만추>는 ‘이렇게 우연히 만나, 특별한 사이가 될 것이라는 기대 전혀 없이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 가까웠던 두 사람이 하루를 같이 보내면서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서로의 마음에 위로가 되는 그런 관계로 이행’하는 내용이다.
<백야>에서 서사가 진행되는 내내 흐르고 있는 어둠이 단순히 배경 요소 이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만추>에서 도시를, 등장인물들을 감싸고 있는 안개는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 원규가 어둠을 압축해서 만든 인물이라면, <만추>의 애나는 무심하게 흐르는 안개가 인물로 화(化)한 것 같은 사람으로 두 사람의 절제하는 듯하면서도 무심한 표정은 영화 속 어둠과 안개와 어울려 하나의 미장센을 만들어내고 있다. 두 영화에서 모두 섹스가 시도되나 도중에 실패하고 마는 내용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으며 휴대전화가 원규와 애나에게 짧은 시간이 지나면 머무르고 있는 이곳을 떠나야 하는 처지를 주지시키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도, 오랜 기간 떠나있다가 돌아왔어도 가족이란 공동체가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거나 거부하며 두 영화 모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이 극히 제한됨으로써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절박함과 아련함이 고조되고, 등장인물이 사회의 주변부에 속하는 사람들로 그들 사이에 작용하던 척력이 어떻게 사그라들고 끝내 인력으로 변해가는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백야>는 <만추>의 데칼코마니와 같은 영화라고 생각해볼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만추에는 있지만 백야에는 없는 것
<만추>나 <백야>가 모두 두 인물이 조우하면서 각자의 마음에 이는 잔잔한 파문이 어떻게 확장되면서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지를 다루는 만큼 각 영화에서 두 인물의 관계를 어떻게 단단히 다져나가는지에 대한 묘사는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추>와 비교해서 <백야>의 서사구조는 유달리 그 뼈대가 약해보인다.
특히 <백야>의 후반부에 사적 복수에 동참함으로써 소원한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한 원규와 태준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흰 눈이 내리는 밤 아래서 화장실에서 정사를 나누는 지점에서 서사가 진행되어 오던 맥락이 다소 흐트러지면서 과연 그 섹스가 이야기에서 필요한 부분인지가 의문시된다.
<만추>에서 애나와 훈이 서로의 거리를 좁히는 과정은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에서 우연한 그들의 만남에서 시작하여 훈이 손목시계를 주고 애나가 밀어내는 데서 관계가 얽히게 되고, 집에서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마주친 애나가 도로 형무소로 가는 버스표를 사려다가 우연히 훈을 만나 마법과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되기까지 밀도있게 서술되고 있다. 범퍼카를 타기도 하고, 배우들의 몸짓을 보면 각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놀이공원에서의 판타지시퀀스라든지 레스토랑에서의 데이트,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같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은 일련의 견고한 서사가 <만추>에는 있고 <백야>에는 부재하다. <백야>에는 오직 시도된 몇 번의 감흥없는 섹스와 2년 전 사건에 대한 원규의 복수에 태준이 동참하는 것으로만 그들의 관계가 서술되고 있으며, 이러한 빈약한 서사로 인해 복수가 끝난 후 두 인물 간의 거리가 좁혀지고 작위적으로 낭만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는 상황에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섹스는 애절함이 묻어나기보단 그저 못다한 ‘유예된’ 섹스를 기계적으로 완결시킴에 가까워보인다.
물론 <백야>의 부족한 서사는 대부분 하룻밤, 6시간이라는 시간적 한계에서 기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추>는 그에 비해 애나가 받은 3일 간의 특별휴가 동안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으며 훈과 함께한 시간은 거의 하루에 이를 정도로 비교하기엔 무색해지는 구석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백야>에서 드러난 서사의 결핍을 단순히 시간적 제약에 그 탓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이는 전작 <후회하지 않아>라든지 단편 <지난여름, 갑자기>와 <남쪽으로 간다>에서도 드러나듯 이송희일 감독이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는 지표로서 육체를 과다하게 활용하거나 영화의 종결어미로 ‘진짜’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섹스를 호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단편 <지난여름, 갑자기>에서도 상우는 끈질기게 경훈에게 접근해서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해도 자꾸만 자신을 거칠게 밀어내는 그의 행동에 답답해한다. 자신에게 책을 선물하거나 수업 중 수 차례 힐끔거리면서도 다가서면 질색을 하고 뿌리치는 경훈의 이중적인 모습 중에서 진짜를 분별하기 위해 결말 즈음에서 집을 찾아가 경훈을 만난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상우는 경훈의 몸을 껴안고 허리 아래로 손을 집어넣음으로서 경훈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 기이한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는 건 상우뿐만이 아니다. 경훈 역시 상우가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육체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걸 뿌리치거나 부인하지 못하고 되려 흔들리는 본심과 반대되는 반발을 꺼내면서 이에 진심으로 반응한다.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경훈과 상훈이 서로 몸을 떼지 않고 맞댄 채 음악이 흐르며 끝이 난다. 단편 <지난여름, 갑자기>는 육체를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감춰진 진심을 꺼내는 수단으로써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단편 <남쪽으로 간다>에서 이러한 믿음은 더욱 강력하게 돌아와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인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이 영화는 말년휴가를 나온 후임이 이미 제대하여 사회에 복귀한 선임을 만나고 결국 납치에 다다르게 되는 과정과 그 후를 묘사하면서 손쉽게 이성애와 동성애를 구분해왔던 도식을 부인하고자 한다. 여기서 후임인 기태가 선임인 준영에게 집착을 보이고 납치하게 되는 동기는 군대에서 함께 생활하는 짧은 기간 동안 맺었던 수 차례의 육체관계에 기인한다. 그리고 다시 만나고 준영을 납치하여 결말로 달려가는 와중에도 기태는 준영과의 성애를 통해 그의 마음을 확인하려 한다. 준영은 자신이 기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 부인하려 하지만 차 안에서의 관계를 가지면서 보인 육체의 반응으로, 더 가깝게는 이를 성애를 통해 확인한 기태가 “너, 섰잖아!”를 절규함으로써 단번에 부정된다. 이송희일 감독은 단편 <남쪽으로 간다>를 통해 이성애와 동성애를 규정짓는 견고한 울타리에 균열을 일으키려 시도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육체를 이성애와 동성애를 가르는 더욱 강력한 매개로 재등장시킴으로써 무효화된다.
장편 <백야> 역시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원규와 태준이 왜 마지막에 섹스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뒷받침에 매우 부족하다. 구조상으로 원규가 사적 복수를 감행하기 전까지에 해당되는 영화의 중반부까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된 동력은 두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밀도높은 성적 욕구와 긴장감이라고 할 수 있다. 원규와 태준의 만남이 어떻게든 굴러가도록 기능하는 첫 지렛대는 절박한 성적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 절로 나오는 숨소리를 참으며 고지까지 올라가는 노력을 들였음에도 성관계를 갖는 데 실패하는 지점에서 그때까지 이들을 연결하고 움직이던 고삐가 살짝 느슨해지고 만다. 그 후 원규가 “방이 있으면 할래...?”라고 말을 던지면서 느슨해진 국면이 팽팽하게 유지되는 추이를 보이지만 다시 시작되는가 싶던 성애의 장면은 좌절되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하던 성적 욕구는 분노한 태준의 손아귀에 쥐어짜여져 방바닥에 흘러내리던 젤처럼 흐물거리게 된다. 원규의 사적 복수가 시작되고 완결되는 후반부에는 그전까지 서사를 이끌던 성적 긴장감과 섹슈얼한 분위기는 흐려지고 2년 전 사건에 대한 부채, 연대 그리고 연민의 감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너만 2년 전 사건을 기억하는 건 아니라며 당구장으로 향하는 원규를 가로막은 태준의 대사,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지만 다시 돌아오는 행동, 마침내 화장실에서 원규 대신 복수를 대행하기까지. 카메라는 당구장에서 앉아 대기하던 태준과 원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잡아 이 순간 그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축하면서, 부축받으면서 화장실을 빠져나올 때까지의 모든 지점에서 섹슈얼한 무엇이 자리잡을 곳은 전혀 없다. 결과적으로 그 사건을 통해 두 사람은 그들 사이에 있던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을 메우고 있는 언어는 섹슈얼하기보단 차라리 연대와 다른 감정에 더 가까워보인다. 직후 계단에 앉아 서로의 사진을 가식적이거나 포토샵을 이용한 사기에 가깝다는 등의 장난스러운 대화를 끼워넣거나 애잔한 음악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어딘가를 향하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한층 낭만적인 분위기로 유도하려는 노력은 분명 있다. 두 인물이 고지에 이르는 계단과 길을 나란히 걷기도 하고 여태까지 고요하게 어둠으로 만 가득 차 있던 하늘에 눈이 내리는 장면 역시 성적 긴장감을 고조하기 위한 낭만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결국 태준과 원규가 왜 섹스를 해야 하는지를 명백하게 제시해주지 못하며 섹슈얼한 분위기가 둘 주위를 농밀하게 메우기도 전에 강박적으로 진행된 ‘유예된 섹스의 완성’으로 조급하게 치닫게 만들 뿐이다. 흰 눈이 흩뿌려지는 하늘 아래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두 인물 사이의 섹스는 유예되어 왔던 순간을 보상하려는 듯 그 절정에 이른 쾌감을 화면에 담아내는 데는 성공하지만 이를 완성하는 건 서사의 자연스러운 구조로 관객을 설득하기보단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상황 자체를 당연하게 그 이야기가 되게끔 주입하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서사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에서 나누는 원규와 태준의 성애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것은 극히 제약된 시간적 한계와 영화상에서 원규와 태준이 처한 상황이 자아내는 연민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낭만적인 환상이 그 빈 자리를 채우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죽기 전에 나한테 데이트 신청해봐.” “아무리 하룻밤이었지만 우리...진짜였지?” 등의 대사는 낭만적이기보단 되려 과호흡이며, 끓는점을 낮추기보단 되려 올린다.
이런 서사적 결함과 감정이 과잉되어 다소 부적절한 대사들이 몰입을 방해하더라도 <백야>와 <지난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는 6년 동안 기다리느라 생긴 갈증을 채우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무더운 여름이라는 계절적 배경과 선생과 제자 사이에 펼쳐지는 답답한 상황, 그리고 이를 극대화시키는 클로즈업의 빈번한 활용은 <지난여름, 갑자기>의 정서를 선명하게 잡아주고 있다. 실루엣만 보이는 어두컴컴한 터널에서 울려퍼지는 노래와 한을 담은 듯한 기태의 춤을 담은 <남쪽으로 간다>의 마지막 장면은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가슴에 균열을 내기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흰 눈이 흩날리는 하늘 아래서 펼쳐지는 원규와 태준의 성애장면은 머리로 이해되기 전에 그 애절함이 먼저 가슴에 와닿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이송희일 감독의 <백야> <지난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 퀴어연작에 찬사를 쏟아내는 다른 관객과는 다르게 나는 불평 불만을 이렇게 입으로 쏟아놓고 있지만서도, 분명 나는 이송희일 감독이 내놓을 다음 퀴어영화를 스크린에서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가 만들어낼 이미지에 가슴이 먹먹해질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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