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O


Gay Manifesto 2. 퀴어는 어떻게 법을 탐지하는가 (1)에서 이어집니다.




2004스42 결정(과 관련 판례)의 어떤 진보성



성소수자 성정치의 입장이 아닌 법리적으로 볼 때도 2004스42 결정은 엄밀하고 우수하며 깔끔하지 못하다. 당초의 호적법이, 그리고 가족관계등록법이 예정한 호적/등록부 정정의 원인에 포함되지 않은 성전환 수술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포섭하기 위해, 법적으로 근거가 없는 새로운 제도를 하나 만들어버린 것이다. 현대 법치주의 국가에서 이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는 입법권을 사법이 재량으로 침투한 현상으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소위 ‘판례 입법’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이러한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사실 이 사건이다.


기왕의 호적법과,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개정된 가족관계등록법은 두 가지 형태의 호적 수정방법을 예정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원시적인 오류를 바로잡는 정정이며(가족관계등록법 제18조), 후발적으로 행정구역 등의 명칭이 변경되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생긴 경우를 바로잡는 변경 경정이다(동법 제19조). 그런데 이 중 후자, 후발적인 변경에 따른 경정은 법에 그 사유가 행정구역 명칭의 변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성전환자의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대법원의 관점은, 전 항에서 보았듯이 출생시에는 생물학적 성을 타고 났으나 후발적으로 정신적, 심리학적, 사회적인 요인으로 인해 성별이 바뀐다는 쪽에 가깝다. 그러므로 후발적인 변경에 따른 경정이 이 사례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나, 법조문이 후발적 변경 경정에 대해 그 요인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적용하는 것은 유추해석의 범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대법원은 요인이 특별히 법문에 규정되지 않은 원시적 오류를 바로잡는 정정(제18조)을 유추해석하여 적용하고 있다. 후발적인 섹슈얼리티의 변경으로 보면서도 호적 정정 과정은 원시적 오류를 바로잡는 과정을 택하는 논리적 모순이 있는 셈이다.


2004스42 결정이 대법관 전원이 함께 판단하는 전원합의체로 심의되었고, 당시 대법원 분위기상 드물었던 반대의견과 별개의견이 존재하는 치열한 결정례로 남은 것 또한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대법원 반대의견은 그러므로 법적으로 성전환자가 반대의 성으로 호적을 정정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손지열, 박재윤 대법관의 논리는 관련 조문을 아무리 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형태의 변경은 예정된 바 없었으므로, 행복추구권 등의 헌법적 권리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제도를 법관이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입법자의 정책적 디자인이 필요한 사안에 법관이 개입하는 건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반대의견의 법리적으로 옳아 보이는 지적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독수리 오형제’의 일원이자, 이 사건의 주심 대법관이기도 하였던 김지형 대법관은 이것이 소위 말하는 ‘헌법합치적 해석’의 일환이라는 주장까지도 펴고 있지만, 제도가 예정한 바가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할 때 그 중 헌법에 맞는 것을 골라야 한다는 헌법합치적 해석의 정의상 이는 적절하지 않은 논리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대법원의 다수의견은 별다른 논거 없이 법관에 의한 입법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대법원의 과감한 판례 입법은, 주로 가치의 문제인 가족법의 영역에서, 사실상 입법적으로 이 부분이 근시일 내에 개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인식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와 사법구조가 비슷한 독일과 일본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독일의 경우 대한민국 대법원 반대의견과 같은 판결을 내린 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가 ‘윽박질러’ 다수의견과 같은 방향으로 판례를 변경토록 지시한 바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 입법은 그러한 개선의 가능성이 희박하였음을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해 내었다. 2006년 6월 이 사건 결정이 최초로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 신청을 허용하였는데, 그 전인 2005년 2월 이미 헌법재판소에 의해 호적법은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 있었다. 이에 대한 대체입법은 이 사건 결정이 있은 뒤 2008년에 시행된 가족관계등록법이지만, 가족관계등록법에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대한 입법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입법 과정에서 성별정정 신청이 반영될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17대 국회에서 노회찬 의원이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하였으나 이 또한 통과되지 않았고, 현재 19대 국회가 개원하였지만 여전히 관련 입법은 요원하여 보인다.




이는 관련하여 보아야 할 다른 중요한 판례가 있다. 바로 위의 결정에서 별 논란 없이 받아들여진 부분, 즉 ‘사람의 성은 성염색체의 구성을 기본적인 요소로 하여 내부 생식기와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의 외관은 물론이고 심리적•정신적인 성과 이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나 태도 등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한 최초의 판결인 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791 판결이다.




성전환 수술을 받아 여성으로 살고 있는 50대의 트랜스젠더가 강간을 당하였다. 그러나 형법은 강간죄의 대상을 ‘부녀’로 한정하며, 이는 호적상 여성으로 한정되어 해석되어 왔다. 만일 이 트랜스젠더가 남성이라면 이는 강간죄가 아닌 강제추행으로 처벌해야 한다. 형량도 낮아지고, 피해자가 납득할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피고인이 저지른 범죄의 인식과 다르다.


이 상황에서 대법원은 위와 같은 논리로 트랜스젠더 여성을 ‘부녀’의 범위에 포함하는 해석을 시행하였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서 트랜스젠더의 성별이 변경되는 것은 사실상 호적 내지는 가족관계등록부상의 변경절차가 완료되었을 때가 아니라, 성전환 수술을 받아 외성기의 변경이 일어난 시점인 것이다.[각주:1]


이 또한 사실 형법에서 ‘강간’을 부녀를 대상으로 한 것을 입법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해당 입법이 일어날 가능성은, 96년에는 더더욱 요원하였다. 지금까지도 형법 개정에 있어 강간죄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 구성요건에서 부녀를 빼야 한다는 주장은 강력하지만 관철될지 여부는 여전히 안개 속인 이유이다.




대법원이 유독 가족법 영역에서 강력하게 취하곤 하는 사법적극주의, 혹은 판례 입법은 흥미롭게도 국민을 대리하는 입법가들의 수단보다도 더욱 즉각적인 보호를 제공한다. 비록 판결 내부를 관통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법원의 전제는 여전히 한심하기 그지 없을지라도, 대법원이 “그래도 이건 정말 심하지 않냐”고 느끼는, 혹은 변호인단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사안에서 보호에 망설임이 없다는 건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일정한 정도의 진보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진보성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만, 대한민국 퀴어 신에는 아직까지 ‘이것은 저것보다 낫다’고, 심지어 산술적으로 나누어 말할 만한, 기본적인 정의와 진보의 문제가 많이도 산적하여 있기 때문에, 이런 게으른 서술이 용납될 여지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퀴어와 법> 다시 쓰기: ‘법만능주의’ 혹은, 유니콘의 뿔을 찾아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이 글에서는 굳이 서술하지 않았던 지난 겨울의 차별금지법/학생인권조례의 국면에서 핵심은 입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법이 우리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어떤 신성시되는 전제가 목전에 닿았기에 차라리 축제에 가까웠다. 한겨울에 교육청을 점거하는 등의 고생이 있었지만 이 폭발력은 그런 인식 하에서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허나 선언적 입법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차별금지법이 담고 있는 내용은 결국 헌법에 이미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헌법 문언에 의해 합리적으로 해석해낼 수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을 차별금지법이라는 별도의 법안으로 담아낸다는 것은, 물론 도움이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성정체성과 성지향이 명시된 법문이 존재하는 것과 없는 것이 가시적인 차이를 보여줄 영역은 생각보다 꽤 많다.
유치하게도, 그렇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순 없기에 차별금지법은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언적인 입법은 상당히 영미적인 발상으로 보인다. 헌법과 권리장전이 없는 영국이라면야, 인권법(Human Rights Act)이라는 발상이 유효하고 필수적일 것이다.[각주:2] 헌법에 있는 내용을 사안별로 입법하여 관철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는 미국의 사례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미국의회의 유능한 입법과 준법감시기능은 익히 알려진 바 대로다.



기왕에 살펴본 것과 같이 대한민국의 법질서는 입법이 쉽지도 않고, 입법이 된다고 하여 그것이 입법자의 의도가 관철된다는 걸 뜻하는 것도 아니며, 그 입법자의 의도가 완벽하거나 납득할 만큼 정묘하지도 않기에 여러 가지가 중간에 매개를 시도한다. 적극적인 사법이 그 중 하나이며, 그 외에도 의원 한 명 한 명의 재량이 상당히 큰 지경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국회를 구성하면 성소수자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의원이 꼭 한 명 정도는 있다 수준도 아직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계와의 접점이 이토록 특별한 의식, 축제로만 다루어진 것은 결국 퀴어 신의 실책이며 무지일 것이다. 마치 명예훼손소송에 한 번 당해본 진중권이 법 이야기만 나오면 깨갱 하며 법조문과 판례, 실무 경향, 해석 등의 말을 경전처럼 신성시하는 것처럼. 법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민국가의 가장 선진화된 예속 방법이었으며, 이를 가장 선구적으로 관철한 것이 수권법을 통한 나치스의 찬탈이었다.



퀴어 신은 법계에 포착되지 않았기에, 그리고 법이란 것이 언제나 그렇듯,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법은 특별한 이벤트화 되었다. 역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법은 상수화 되어, 특별한 잘못이 없으면 그에 따라 세상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차별금지법이 입법되었다면 퀴어 신에서 이 현상은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너 그거, 차별금지법 위반이야. 포비아? 차별금지법 위반이라니까. 세상에, 벌칙조항 없는 선언적 입법에서 그 정도로 많은 것을 바라다니. 이미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너 그거 헌법 위반이야, 하고. 그리고 대사인적 효력이 제한된 헌법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던가?





여기서 성적 지향이 포함된 차별금지법의 원안 입법 시도가 좌절된 것을 ‘모순된 축복’이라 표현하는 것은 후진 미감의 학자가 쉽사리 택하고 마는 장엄하고자 하는 수사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후퇴였다. 하지만 모두 갈아 엎고 새로 시작할 것이 아닌 바에야, 후퇴가 남긴 잔해에서도 새로운 것을 건지고 얻어내야 한다. 내가 이 글에서 찾아내고자 했던 ‘잔해’는 바로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법만능주의와 그것이 남길 어떤 체념의 문제였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졸라 짱 센 법느님은, 유니콘의 뿔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이벤트적으로 한 번 만들어 두면 나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영구기관/마법이 아니고, 오히려 평소에 꾸준한 유지와 보수가 필요한 결함 많은 화석연료 전동차에 가깝다.

그러니 설령 법이 퀴어를 굽어 살피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찌 퀴어가 법을 탐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Manifesto”로


언제나 뜨거울 것만 같았던 차별금지법/학생인권조례 원안 추진 운동이 지금에 와서는 과거 어느 시점의 맥락으로 한정되어 박제되었고, 심지어 인터넷 상에서도 그 귀추가 어찌 되었는지 추적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자연 소멸한 지금에 이르러서야 말한다. 법을 대하는 퀴어/사회운동의 태도가 이래서는 안 된다. 이벤트성 행사는 폭발적이지만 단발적이며 거품처럼 허무하다. 그리고 그 경험은 퀴어 사회에 결국은 좋지 않은 집단적 경험을 남기게 된다. 한 때 형성되었던 법계와의 특이 교차점이 진정되고 나면, 결국 법계는 움직이지 않으며 격랑이 가라앉으면 다시 상관 없었던 별개의 세계로 돌아갈 뿐이라는 관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법은 유능함에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 법에 대한 특이적 관점은 드물게 법을 언급할 때 이를 만능의 무기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의 사례에서, 혹은 군형법 제92조의 위헌법률제청심판 사건에서 사법이 퀴어의 관점에서 사건을 심리하여 심지어 상처를 위무하는 역할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실제로 이는 법계의 역할일까?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적극적으로 사법과정에 개입하여 권익의식을 표현하고, 사법이 이따금씩 보이는 과감한 진보성을 적극 유도하는 것은 꽤 괜찮은 방법이다. 그리고 이 방법이 이미 시도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부족하지만, 우리 사회의 진보적 사법과정이 자리를 잡을수록 이 방법은 점점 더 과감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퀴어가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의 정정 방법을 법적으로 보장받는 사회가, 그러한 표기방법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보다 우월하다는 논변은 쉽사리 완성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법의 유능함을 말하고, 법을 탐지할 것을 꾸준히 주문하는 것은, 그나마 가장 남을 움직이는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렛대로 작용하는 법의 역할을 고려할 때, 그리고 아직도 부족한 퀴어적 사회지분을 고려할 때 퀴어의 자급자족 사회가 하부구조로 자리잡기란 여전히 요원하여 보인다. 아직도 호모포비아와의 대결이란 두려운 일이고, 남을 설득하고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일은 많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으뜸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 법이기에 이에 침묵하는 것은 어떤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고대 폴리스의 시민이 된 듯한 마음으로라도 법을 다루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 시절 법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럴 것이다. 각종 이야기와 권익과 권리와 의견이, 그리고 연대가 이루어지는 공론장에서 법을 탐지하는 감각은 필요하다.[각주:3]

법을 원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은 퀴어한 이 곳에서 법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일격을 매다 꽂는 과정은 더욱 자주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퀴어가 법을 탐지하는 데서 더 나아가, 법이 퀴어 이슈를 탐지하고, 그를 통해 사회가 퀴어를 탐지하는 과정을 촉진하기에.


  1. 이는, 어떻게 보면, 서류상 변경이 있는 시점을 성별이 변경된 시점으로 보는 관점보다는 훨씬 트랜스젠더-친화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법이 강간죄라는 영역에서는 그 사이의 사실상 여성인 상태 또한 보호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 없으므로. 그럼에도 수술 중심으로 트랜스젠더의 성별변경 시점을 판단하겠다는 외성기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어 각주로 뺀다. [본문으로]
  2. 실제 영국에서는 입법연도별로 꽤 여러 개의 인권법이 있으며, 이들을 통합하여 통일된 권리장전을 제정하려는 노력도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본문으로]
  3. 가령 강간죄의 보호 대상을 부녀에서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는 과정은 모욕적이기 그지 없는 군형법의 ‘계간’ 조항을 폐지하는 데 진일보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Posted by MECO


MECO


Disclaimer

이번 글은 퀴어, 성소수자와 관련된 오래된 논의에 대한 배경을 일부 무시합니다. 현실 세계의 맥락에서 이번 글에 한정해 퀴어=성소수자, 그리고 이 개념은 게이인 저를 완벽히 포괄합니다. 별로라고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안 그래도 분량 오바.




무지는 경외의 근원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던 기독교도의 신은 – 실존한다면 – 이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무지는 한계를 베일 속에 가두고 권능은 넓게 펼쳐 혜량할 수 없게 한다. 언제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눈은 언제나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부른다. 그리고 이는 판옵티콘의 숨겨진 전제이기도 하다.


현대의 우리에게 법(法)과 같은 무지의 대상이 또 남아 있을까? 자연과학이 무지의 영역을 극소의 영역으로, 혹은 극대의 영역으로 한정하여 점차 줄여가는 동안 법은 자신들이 이해한 것을, 자신들만 이해하는 방식으로 울타리를 둘러쳤다. 다행이라면 법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굴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법 또한 결국은 군림하고자 한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재작년부터 지난해까지 이어진 차별금지법 제정 국면에서 퀴어 세상 또한 크게 요동쳤던 것은. 불가해한 괴물, 우리 머리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지배자, 그리고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지상 최강의 키보드 워리어 진중권의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는 ‘법’이라는 걸 길들일 필요성을, 세상의 일부로서, 퀴어들 또한 강하게 느꼈다는 반증이었을 테니까.




법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한다. 그러나 정작 퀴어와 법의 교차점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법의 감지는 그 역치가 꽤 높기에, 법에 포착되기 위해서는 퀴어가 충분히 가시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퀴어로서 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또한 생활을 영위하고, 그 생활은, 결국 법의 규율을 폭넓게 받는다. 나를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가 꾸준히 의식하는 과정은 자칫 잘못하면 병적일 수 있다.


대한민국 사법체계가 등장한 이래, 법이 포착한 퀴어 관련 이슈라면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생각난다. 우선, 서두에 언급한 차별금지법. 이는 입법의 영역으로, 어떻게 보면 퀴어 인권 운동의 관점에서는 고전적인 주제가 된다. 그리고, 남성 동성애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모멸감에 시달리게 되는 용어, ‘계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군형법 제92조. 헌법적 문제가 되어 왔다. 마지막으로, MTF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다루고 있는 가족법과 이와 관련된 형법적 문제다. 물론 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역시나 이 정도랄까. 검색을 통해 보아도 여기에 더할 수 있는 것은 인접한 페미니즘의 성폭력과 성적 자기결정권 논의, 그리고 HIV/AIDS의 기본권적 논의 정도이다.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QIS 일각에서 발간하는 자치언론 ‘퀴어 플라이’는 제10호에서 ‘퀴어와 법’을 기획의 일부로 다룬 바[각주:1] 있고, 해당 기획과 관련된 4개의 글 중에서 둘은 차별금지법과 인권조례, 나머지 둘은 군형법에 할애되었다. 굳이 그럴 당위성은 없는 것이지만, 나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대해 퀴어의 관점에서 말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드문 사례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뿐더러 이 사례 자체가 말해주는 바가 다른 두 개의 사례와는 다르면서도 심도 있기에.





사법은 퀴어 이슈를 얼마나 탐지하는가



섹슈얼리티의 형성에 관한 미셸 푸코의 설명으로 돌아가자면, 19세기 서구의 사법은 동성애적 행위를 규제하던 것에서 벗어나 동성애 관계와 해당 성향을 규제하기 시작한다. 입법의 차원에서 동성애자를 처벌하고 규제하는 법이 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법을 적용하고 시행하는 사법 차원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사형 등의 무거운 법정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상 적용되지 않는 죽은 법이었던 동성애 행위 처벌 법규가 강력한 실효성을 가지고 적용되는 사례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각주:2]. 아무튼 블룸즈베리 클럽이 존재했던 영국에서조차 20세기 중반 앨런 튜링의 비극을 막지 못하는 분위기에 이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20세기 초반의 서구 법질서를 일본 민사법을 통해 한 번, 그리고 해방 직후 해외법의 계수[각주:3]를 통해 또 한 번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던 대한민국 법질서는 변방의 것은 중앙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언어학의 어떤 법칙을 따르기라도 한 것인지, 여전히 20세기 초중반 서구 법질서의 모순을 많이도 배태하고 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모순이라면 역시나 혼인의 관념을 전통적인 남-녀의 가족적 결합으로 한정하여 규정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여전히 서구 사회에서도 법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는 마무리단계에 있는 본 논쟁이 결국은 (시민결합의 형태가 아닌) 동성커플의 결혼에 관한 시민사회적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실제 그러한 형태의 입법이 된 사례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논쟁 지점에서는 유독 서구에 이러한 입법형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지 않았다는, 자의적으로 선택된 사실이 동성 커플의 결혼 개념 포섭에 반대하는 측의 하나의 논거로 사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각주:4]




법학과 연계되어 이루어지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각종 진보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법조계는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라는 대중적 인식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는 퀴어 전반 이슈를 대하는 법조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한 법학 교수는 말한다. 법조계에서 이슈로서의 동성애를 언급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호적상 성별 정정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급은 아닐 수도 있지만, 여타의 퀴어 이슈 전반에서 동성애에 비해 훨씬 ‘가시적이지 못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굳이 찾아준 판례법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멈추어진 시계가 하루 두 번은 맞아 떨어지듯, 진보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맞아 떨어지긴 했지만 이는 대한민국 법조계의 실상에 부합하는 설명은 일단 아니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관한 판례 문언을 검토한다면 더욱 명확해진다.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결정례 검토: 대법원의 성전환 인식에 관하여


소위 ‘생물학적’ 성과 심리적, 사회학적, 정신적 의미의 성이 일치하지 않는 트랜스젠더 중에서, 대한민국의 사법이 지금까지 가족관계등록부(옛 호적)의 변경을 허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수술을 통해 외성기의 변형을 이룬 수술 트랜스젠더 뿐이다. 그 중에서도 판례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MTF 수술 트랜스젠더)에 집중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MTF 트랜스젠더의 호적상 성별표기 정정이 처음으로 허용된 사안은 2006년에 있었던 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이다. 이후 호주제가 폐지되어 가족관계등록부가 도입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나 법리의 변화가 있지는 않았으므로 이 결정을 그대로 본다.



당시 성별정정을 인정하는 대법원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1. 기존에 대법원은, ‘사람의 성은 성염색체의 구성을 기본적인 요소로 하여 내부 생식기와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의 외관은 물론이고 심리적•정신적인 성과 이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나 태도 등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었다. (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791 판결 참조)

2. 성별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WHO에서 분류한 국제질병기호상에도 분류가 있는 내용이다. 이를 대법원은 성동일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의 일환인 성전환증(Transexualism)이라는 용어로 포섭한다.

3. 그리고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성별을 호적에 무엇으로 기재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과 설명이 있다. 이 부분은 중요하기에 한 문단을 옮긴다.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도, 남성 또는 여성 중 어느 한쪽의 성염색체를 보유하고 있고 그 염색체와 일치하는 생식기와 성기가 형성•발달되어 출생하지만 출생 당시에는 아직 그 사람의 정신적•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성을 인지할 수 없으므로, 사회통념상 그 출생 당시에는 생물학적인 신체적 성징에 따라 법률적인 성이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출생 후의 성장에 따라 일관되게 출생 당시의 생물학적인 성에 대한 불일치감 및 위화감•혐오감을 갖고 반대의 성에 귀속감을 느끼면서 반대의 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 역시 반대의 성으로서 형성하기를 강력히 원하여, 정신과적으로 성전환증의 진단을 받고 상당기간 정신과적 치료나 호르몬 치료 등을 실시하여도 여전히 위 증세가 치유되지 않고 반대의 성에 대한 정신적•사회적 적응이 이루어짐에 따라 일반적인 의학적 기준에 의하여 성전환수술을 받고 반대 성으로서의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를 갖추고, 나아가 전환된 신체에 따른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만족감을 느끼고 공고한 성정체성의 인식 아래 그 성에 맞춘 의복, 두발 등의 외관을 하고 성관계 등 개인적인 영역 및 직업 등 사회적인 영역에서 모두 전환된 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그 성으로서 인식되고 있으며, 전환된 성을 그 사람의 성이라고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과의 신분관계에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거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아니하여 사회적으로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면, 이러한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앞서 본 사람의 성에 대한 평가 기준에 비추어 사회통념상 신체적으로 전환된 성을 갖추고 있다고 인정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할 것이며, 이와 같은 성전환자(아래에서 말하는 성전환자는 이러한 성전환자를 뜻한다)는 출생시와는 달리 전환된 성이 법률적으로도 그 성전환자의 성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위 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결정문 中

이상에서 보다시피, 대법원의 판단은 일관되게 성전환수술을 받은 사람을 성별정정의 적법한 청구 주체로 파악하고 있고, 그 이외의 부분에는 침묵한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우선 외성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힌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논의는 반대의 경우, 즉 FTM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 FTM 트랜스젠더가 법원에 성별정정을 요청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보이고, 우리와 비슷한 사법체계를 가진 일본에서 – 그러나 일본의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은 입법적 보완이 이루어져 이미 행정적 절차가 구비되어 있다 –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환한 경우 실무적으로 성기 성형 없이 성별 변경을 허가해주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FTM 트랜스젠더의 경우 인공성기와 성기성형의 안전성에 의문이 있다는 점이 반영되었겠지만, 여성기를 남성기의 부재로 보는 전통적 관념을 비판하는 페미니즘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식능력의 완전한 상실을 요건으로 요구하는 점 또한 상당히 후진적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준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남성(FTM)이 불임인 파트너를 대신하여 임신하는 미국과 같은 사례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각주:5]

‘사회통념에 의해’라는 부분에 의해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으로 제한된다는 점 또한 문제 중 하나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관련하여 실제 결정례가 남은 사안인 대법원 2011. 9. 2. 자 2009스117 전원합의체 결정은 자녀과 그 부모 간의 관계가 상당히 극단적인 사안이었으므로 일반화가 어렵지만, 실제 이후 대법원 내규는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전반적으로 위와 같은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판례를 보여주면 심지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하더라도 단박에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위 판결에서 성별을 감지하는 부분이 ‘학계’의 최신 연구결과를 반영했다고는 하나 이는 소위 생물학적, 의학적인 부분에 한정되어 있으며, 인권의 영역에서, 혹은 여타의 인문학적, 사회학적 연구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어휘와 새로운 시도들은 그 존재 자체를 무시당했다는 점이 여실하게 보이는 결정례이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현실에 절망하거나 저항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살아있는 것은 싸우는 것이란 어떤 비문도 있다만, 그래도 품위 있고 조금 더 나은 저항을 택하기 위해서라도 위 판결이 가지는 어떤 외적인 진보성에 대한 분석은 필요해 보인다.

그래,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해보자. 트랜스젠더의/퀴어의 입장에서 분명 모욕적이나, 법원이 퀴어 이슈를 다루는 태도에 있어 저 판결은 보이는 만큼 나쁜 판결은 아니다.





  1. ‘퀴어와 법’에 대해 보자는 국내의 거의 유일한 시도였기에 인용하였지만, 이 ‘기획 의도’ 글은 꽤 심각한 곡해의 지점을 가진다.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 차별금지법을 포섭한다 할지라도 군형법 제92조는 그와 동일한 정도의 역사를, 사실상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도 차별금지 입법보다 더욱 오래된 역사를 가진다. 초반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 신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제기는 모욕적이기까지 한 용어가 사용된 해당 법문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갑자기 빵 터진’ 것으로 묘사한 점은 자의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2. 이를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반동을 배제함으로써 강고한 헤테로섹슈얼리티의 지배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본문으로]
  3. 적당히 번역하고 살짝 고쳐 적용한다는 말을 법학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더라. [본문으로]
  4. 물론 MECO는 동성결혼에 대해 대략 지난 강연 후기에 인용한 Halberstam과 비슷한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할 수조차 없다는 점을 비교형량할 때 동성결혼권을 인정받는 게 옳다고 보는 쪽일 뿐. [본문으로]
  5. 애초에 국가가 개인의 신상기록을 전면적으로 기록하는 시스템이 야경국가적인 후진성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이 점은 논의하지 않기로 하자. [본문으로]
Posted by MECO


MECO



저 개인으로서 첫 글을 드디어 엽니다. 어떤 명작으로 찾아 뵈어야 하나 고민을 거듭했지만 별 것 없다는 것, 우린 사실 이미 잘 알고 있죠. 알아요, 저의 의도는 몇 번인가의 왜곡을 거쳐 결국은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만큼만 받아들여질 것이란 걸요. 이를 감수하고서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진정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글과 공부를 멀리하고 남자를 가까이 하면 좋습니다. (?)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시를 잘 읽는 편이 아닌 내가, 저런 시를 읽어 주자 전 남자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걱정도 고민도 없이 집의 애물단지로 잘 자랐던 그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려 든다는 걸 감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그가 나와는 너무도 다르지만 사랑스러워 보여 수줍은 뽀뽀를 날려주었던 것 같다.





이태원, 적어도 3년 전



주말 한정으로, 해가 진 후 이태원과 종로는 유난히 상처가 많은 세상이다.

우악스러운 태도로 세상을 향해 끼를 떨며 게이들은 누구나 자신에겐 남모를 어려움이 많았음을 간증한다. 간증과 푸념이 게이의 전유물은 물론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된 정조이다. 아니, 그런 듯하다. 태동기에 있는 퀴어적 표현수단 – 글, 소설, 시, 영화 등 – 은 결국 추억, 아픔, 고난을 조명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 고난에 극복 또한 예정되어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적어도 ‘기적’ 정도로는 예정된 고난의 극복이라 하기엔 심히 곤란하다.


일종의 피해의식 또한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게이라서, 성소수자라서 이토록 내 삶이 힘들고 팍팍한 것이라는 종류의 피해의식 말이다. 성소수자라는 말조차 움츠러든 것처럼 들린다. 퀴어라는 말을 써 보자. 그러나 말은 말일 뿐이다. 그 말을 신성불가침으로 싸고 돌며, 맥락의 결락을 지적하면 소수자 집단 내 x맨 정도로 취급 받는 현상은 매우 흥미롭다. ‘나는 비판 받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는 것이 결론이라면, 공격은 최선의 방어이므로 이런 전략을 택한 것을 탓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좋은가?


내가 게이라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결정한 것인가? 어쩌면 나는 우연히 게이일 뿐이고 이성애자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만 빼면) 지금의 나와 동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비현실적이다. 나는 게이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성애 고착적 관념에, 몇 가지 논리적 맹점에 민감하다. 이는 나를 너무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그건 전적으로 내가 게이이기 때문일까? 즉, 다시 말하자면, 나는 게이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Gay, therefore I am)라고 말할 수 있는가?


숙연한 존재론적 질문으로 보이지만, 술에 취해 종로 바닥을 굴러다니며, 혹은 이태원 클럽에서 흐느적거리다가 한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나의 성지향을 어디까지 탓할 수 있을까? 우린 게이라서 힘들다는 그 푸념을 어디까지를 인정해야 하나, 이는 막막하지만 중요한 질문이다. 결국은 내가 해명하고자 하는 질문은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을지라도, 여기에서 시작한다.




What comes up when you google "Manifesto"



A Gay Manifesto(게이의 정치적 선언)이라는 거창한 글을 쓰고자 무익한 시도를 벌이면서, 제목에 짓눌리지도 않고 다른 이들을 짓누르지도 않는 글을 어떻게 쓰고야 말 것인가 고민한 나의 결론은 유보적이기 그지 없다. 이 글과 앞으로 올라올 글은,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에 대한 글이다.



첫째, 당연하게도 정치적 견지에서 관용적이지 못한 분위기를 배격한다. 전통적인 정체성-정치(Identity-Politic)의 영역에 포섭될 수 있는 글이다. 나는 전형적인 인권 투사의 분위기를 내뿜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본질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내 감에 이는 대한민국이 글감을 제공할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에 관해 쓰겠노라고 감히 약속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 앞으로 이런 글을 쓸 일이 드물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우리 내부의 합의점을 찾기 위한 일종의 교통정리를 시도한다. 게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현실적인 가정인가? 다양한 사람들의 사회적 연대라는 정치성의 본질을 일구기 위해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화해는 얼마나 많은가? 가령 동성애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싸움이었던 시절과, 사회도 분위기도 말랑말랑해진 이후의 기억만을 가진 게이들은 어떻게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끼를 정체화한 게이와 자신 또한 끼를 무서워하는 게이는 어떠한가? 더 나아가, 게이 사회에 존재하는 소득/학력 격차는 우리 사회의 격차 이상으로 유의미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하는 것은, 예측하건대 재미있는 결론을 불러올 것이다.


셋째, 전략과 전술에 관하여도, 결국은 논해야만 한다. 이성애자들에게 혹은 사회에 어떻게 우리의 진실을 제시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나의 세계관은 포비아의 설득 아닌 배제를 전제로 하지만, 최소한의 배제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전략과 전술을 빙자한 우리 안의 퇴행성을 배격하기 위한 글이기도 할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기에, 우리가 숨겨야 할 부분이 있다는 류의 주장들.




이 글은 낭독을 위한 선언문이 아니다. 혹은 글로써 자기완결적인 권위적 텍스트를 구성하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주장과 이론을 통해 퀴어-정치성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하는 야심은 없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 기존 논의의 변용과 부분확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이야기를 지금 이 시점, 이 공간에 다시 변주하여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영향일지는, 바라는 바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직까지는 나에게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론: 세상은 공허하다. 그리고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안녕하세요 본격 불교퀴어철학자 MECO입니다... 죄송합니다. 이게 어딜 봐서 옆집 게이 형이 할 만한 이야긴지는 저도 잘...


다음 글에서 뵈어요. 그 때까지 모두들 평안하시길. 그리고 부디 다음 글로 뵐 수 있길. :)


Posted by M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