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O


1. 들어가며



“아니오, 결단코 아니오. 하지만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허약함, 부패, 우리 육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 거꾸로 된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 놓고 법열을 경험한들 무슨 의미가 있답디까? 이런 행위는 거대한 집단의 움직임으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 내가 알기로 웃음은 범부를 악마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왜? 바보의 잔치에서는 악마 또한 하찮은 바보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서책에 이르면 문제는 달라져요. 이 서책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을 <지혜>라고 부르고 있어요. 술로 목젖을 가르랑거리듯이 웃으면서 범부는 제가 주인이라도 된 듯이 뽐내는 법이오. 왜? 취하면 스스로를 주인으로 어김으로써 그 주종관계를 역전시킬 수도 있는 것이니까. 한데 이 서책은 바로 그 순간부터, 머리 좋은 식자들에게 이 역전을 합리화할 책략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로써 범부가 다행히도 몸에 한정되어 있던 그러한 역전을, 머리로도 하게 될 테지요. 웃음이 인간 고유의 특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인인 우리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서책을 읽다 보면, 그대같이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삼단 논법으로 비약시키게 함으로써 웃음을 인간의 목적인 양 오인하게 합니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1980/1993) 中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모든 ‘게이 드립’이란 호모포비아의 차별발언일까? 게이 드립에 자주 웃고, 스스로 그런 ‘드립’을 치기도 하는 게이인 나에겐 복잡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상대가 내 성적 지향을 아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잘 친 게이 드립은 웃기다. 물론 그 근간에는 몇 가지 불편한 가정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긴 하다. 예를 들어,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은 ‘정상적’인 ‘이성애자’로, 이 ‘드립’의 대상이 될 리가 없다던가.

그럼에도 모든 게이 드립을, 나의 존재 자체를 차단하는 심각한 위협인 호모포비아의 행동으로 취급하여 배척할 수 있을까?

위에 인용한 <장미의 이름> 중 호르헤 수도사의 논지를 따른다면 그러한 금제를 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웃음과 해학적 역전을 죄악으로 보는 그의 사상에 의하면 ‘게이 드립’을 친 자는, 게이의 원죄에 그러한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전복의 죄를 더한 이중의 죄를 범한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호르헤 수도사가 살던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웃음을 인간 원죄의 증거로 삼는 그러한 세상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세상에서 게이로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결국은 어떤 ‘드립’은 웃긴지, 어떤 것은 모욕인지, 차별인지,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 등, 생각하길 멈추지 않아야 한다.

최근 대안적 매체를 표방하고 있는 ㅍㅍㅅㅅ에서는 이러한 글을 실었다. 9GAG에 올라온, 한 아버지의 ‘감동적’인 동성애옹호(Homophile) 짤방을 페이스북에 올려본 후 댓글 반응에 대해 쓴 글이다.




(물론 저러한 가족적이며 관용과 인정의 가치에 기반한 미국식 동성애옹호 프로파간다가 ‘감동적’이라는 말에 의문을 표하고 싶은 게이도 있을 것이다. 가족주의와 관용, 무지의 베일에 근거한 정의론적 관점에 대해 이성애자들이 보이는 관점이 다양한 만큼, 동성애자들도 그러하다.)

분명 동성애자로서 나는, 누군가가 동성애 담론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자청하였다면 환영한다. 동성애자 인권에 대한 부족한 사회적 인식은 종종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확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ㅍㅍㅅㅅ의 글을 ‘하나의 생각’이란 차원에서 환영하고, 넘어갈 것인가? 나에게는 그럴 수만은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2. 어떤 타자화



일면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저 정도면 소위 말하는 ‘개념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글쓴이인 ㅍㅍㅅㅅ 두목은 해당 동성애옹호 짤방 아래에 달린 댓글 가운데 일부에 주목한다. 페이스북의 ‘태그’ 기능을 활용해 일부 댓글러들이 친구에게 ‘게이 드립’을 친 것. 이 ‘게이 드립’이 괜찮은가, 불편하진 않은가의 결벽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분위기로 이야기를 옮겨간다.

표면적으로는 홍석천이 자주 TV에 출연하는 등 관용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였지만 여전히 통계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동성애에 관용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사회이다. 개그의 본질에 있어 마이너에 대한 개그는 당사자가 하지 않으면 민감할 수 있는 문제임을 지적하고, 대한민국 사회가 성소수자에 대한 개그와 ‘드립’을 양심의 가책 없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열린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글을 끝맺고 있다.

모범적인 전개이지만, 여전히 뭔가 불편하다. 문제는 아마도 ‘게이 드립’과 모욕의 지점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글쓴이는 이미 PC의 정도를 흠잡을 데 없이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편함은 이 글이 그려내고 있는 도식에 있다. 그리고 내 감에 의하면, 이 도식은 최근 문제가 되었던 마레연 현수막의 도식과도 닮아 있다.

마레연이 마포구청에서 반려처분을 받기 이전 종로구에는 비슷한 현수막이 게첨되었다. 다만 차이가 있었다면 종로의 현수막은 ‘서울시민 중 ‘누군가’는 성소수자’라고 지칭하였다면 마포에선 ‘이 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라고 지칭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이 문구의 차이가 게첨 여부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나도 안다.

그렇지만 이 문구의 차이는 무언가를 상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성애자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아니면 사랑의 대상이 동성일 뿐인데 부당하게 차별 받고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불쌍한 동성애자들을 옹호한다. 그럼에도 ‘찬성’ 혹은 ‘반대’하는 측 모두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동성애자들을 자기 주변의 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자리를 지나고 있는 ‘당신들’ 중 동성애자가 있다는 지적이, ‘서울시민’ 중 동성애자가 있다는 지적보다 민감한 반응을 불러 일으킨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의 상상력이 동성애자의 존재에까진 미쳤을지언정, 더 가까이에 존재하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의 동성애자를 가정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최근 레즈비언 로맨스 웹툰을 표방하는 <모두에게 완자가>에서는, ‘현재와 같이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이 높은 사회였다면 우리 어머니도 레즈비언적 관계를 첫사랑으로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을 게재하였다가 여론의 집단적인 포화를 맞았다.

평소 말이 많던 웹툰이기는 했지만 평점도 나름대로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집중포화는 의외였다. 실제로 해당 화(69화)의 평점은 눈에 뜨일 정도로 낮다. 반발심은 결국, ‘어떻게 어머니를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느냐’라는 지점에서 왔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평소 동정적이던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에게도 동성애자라는 것은 비칭일 수밖에 없을까? 적어도 해당 화의 댓글란은 평소와는 압도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보인다.

ㅍㅍㅅㅅ의 해당 글이 불편한 것도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다면 훌륭한 PC의 베일을 쓴 글이었지만, 해당 글에서 동성애자는 진정 ‘나와는 다른 누군가’일 뿐이다. 왜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 훌륭하신’ 분들이 불쌍한 성소수자의 권리를 챙겨주고 계신다는 ‘시혜적 인권’ 개념이 생각날까? 애초에 이 글은 동성애자를 독자로 상정하지 않은 채 쓰여진 글이다. ㅍㅍㅅㅅ의 가열찬 독자이기도 한 나 자신이 이 글을 읽는 포지션이 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기존에 ㅍㅍㅅㅅ가 시도하고자 했던 관점과는 조금 다른 듯해 보인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어 보이는 관점으로부터 탈피해 별도로 생각해볼 만한 지점을 짚어온 편집방향, 혹은 옛날 딴지 남로당을 보는 듯한 느낌과는 매우 다른 ‘모범적’인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편한 지점을 많이 제공하는 글이기도 하다.



3. '게이 드립'의 금기시



동성애자는 본인이 드러내기 전에 확연히 알 수 있는 표징으로 차별 받는 것이 아니다. 여성 혹은 소수인종과 같은 소수자와 가장 큰 차이를 불러오는 지점이다. 동성애자 인권운동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드러내는 ‘커밍아웃’과, 그 반-테제로서 원하지 않는 ‘아웃팅’ 상황을 배제하는 데에 모순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이 특성에서 기인한다.

커밍아웃이 의미를 가지는 것과, 아웃팅이 방지해야 할 ‘사고’로 평가 받게 되는 것은 동성애자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를 둘러싼 사회적 인식이 더 큰 문제다. 사회적 인식 개선을 추구해야 할 문제인 것이지, 아웃팅 방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취해서는 안 될 방향이라고 이미 몇 차례 말했던 바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아웃팅의 방지는 동성애자의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옹호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옹호가 동성애라는 사실 자체의 언급을 금기시하는 방향으로 가기 쉽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으로 동성애자의 해방과 차별 철폐에 도움이 될까? 최근의 KSCRC 강좌에서 언급한 적 있는데, 클로짓 게이들의 경우 직장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은 감지된다. 그러나 이는 직장이라는 환경의 특수성을 반영한 선호로, 이 선호를 사회 일반 내지는 개인적 영역으로 끌고 가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게이 드립’을 ㅍㅍㅅㅅ의 관점과 같이 불관용의 위험징후로 해석하거나, 당사자가 개입되지 않으면 하기 힘든 개그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일반화 할 때 비슷한 무리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서는, ‘게이 드립’을 게이만의 것으로 전유하였을 때 이는 커밍아웃한 오픈리 게이만의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커밍아웃한 오픈리 게이와 클로짓 게이가 공존하고 있는 커뮤니티의 양상까지 생각할 때, PC의 베일을 쓴 채로 우리가 게이 드립으로 누군가를 웃길 수 있는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만다.

나에겐 그 드립이 정말로 웃긴데도 말이다. 흑인이 흑인 비하 개그를 한다거나, 전라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전라도 비하 개그를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4. 과소담론, 담론의 독점



결국 게이와 관련된 개그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게이에게만 부여한다는 인식은,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게 된다. 성소수자 담론을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수를 현저하게 줄이게 된다. 결국 이 담론 자체를 축소하고 마는 것이다.

일례로, 최근 김혜나 작가의 <정크>라는 작품이 그 참을 수 없는 저급함으로 – 나의 관점이다 – 회자되는 동안, 손아람 작가는 트위터에서 ‘루저 중의 루저’라는 말을 자신은 소수자성에 대한 예민한 이해로 생각한다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당사자들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다를 것이다.”라고.

<정크>는 동성애자를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소설작품이다. 소설작품에 대해 소설가가 이야기 하다가 소재인 동성애자의 당사자성에 의해 발언을 멈추거나 수정하는 것은 어떤 사고의 발로일까? ㅍㅍㅅ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는 정중한 PC의 베일을 의도한 것일 테나, 기실 판단하기를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성애 논쟁 국면에서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 자체로 ‘논쟁이 종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제공하는 정보의 신뢰도가 올라가거나 토론의 층위가 다양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성이 확보된 순간 논쟁을 멈추고, 모두 당사자의 말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정중할 지는 모를지언정, 진정한 이해라고 할 수는 없다.

결국 지금까지 계속 지적해온 바와 같이, 일종의 선긋기가 일어나는 것이다. 일전에는 커밍아웃한 연예인을 방송계에서 퇴출하는 것으로 그 선이 그어졌다면, 이제는 그 연예인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우리 모두 합의한 후,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저런 촌극이 벌어지고 있으리라. “나는 동성애는 이해하는데, 내 주변에 있다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동성애는 이해하지만 나에게 들이대면 안 된다.” 와 같은, 수 많은 모순어법이 구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퀴어는 존재한다. 당신이 어느 선에서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하였든지 상관 없이. 그 존재가 저지선을 넘어 흐를 때,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다시 한 번 걸림돌로 작용하고 만다. 그나마 오버그라운드에서 담론이 형성될 때, 그 성소수자 담론은 극히 일부의 존재에 의해 과대대표되는 문제를 빚고야 만다.

KBS의 케이블 채널에서 트랜스젠더 토크쇼를 만든다고 했을 때, 일단 제목부터 – XY 그녀 – 이것은 트랜스 여성에 대한 여성-억압의 일환이란 점을 민감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진행을 맡은 것이 기왕에 존재하는 트랜스 여성 연예인도 아닌 홍석천이란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라는 카테고리 전부가 과대대표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을 계기가 되었다.

홍석천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소재이다. 그가 방송에서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한다. 혹자는 홍석천이 게이 스테레오타입을 확대 재생산한다며 비판하고, 혹자는 그럼에도 응원한다. 하지만 정작 홍석천 개인의 언행과 품행이 방정해지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그 경우 성소수자에게 방정한 품행을 요구하는 또 다른 스테레오타입의 문제가 불거질 뿐이다.

정작 문제는 홍석천에게 있다기보단, 성소수자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커밍아웃을 한 운동가는 조금 더 있지만, 그 중에서 일반 대중에게 홍석천만큼의 인지도를 얻은 사람도 흔치 않다. 하리수는 어떨까? 그녀의 경우 너무도 성공적으로 ‘여성’의 카테고리에 안착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성소수자 대표성을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홍석천에게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발언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이 홍석천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일까? 기왕에 게이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을 것이라면, 적어도 당사자성에 의해 그들에게만 대표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것은 대표하는 이와 대표 당하는 이 모두에게 양쪽으로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5. ‘PC의 베일’은 왜 충분하지 못한가



정치적 공정함(Political Correctness=PC)은 적어도 여러 사람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최소한도로 지켜져야 할 규준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미국식 민주주의 혹은 진보라는 허상 아래 이는 어느 정도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PC는 어디까지나 최소규준이며, 항상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PC를 지켜주었으니 그 이상 내심이야 알 바 아니라는 태도는 얼마든지 문제적으로 변할 수 있다. 게이에 대해 PC한 업무환경을 만들어 주었으니, 개개인이 가진 호모포빅한 태도에 대해서는 잘 숨겨져 있기만 하다면 침묵해야 할까?


많은 경우 PC는 변명의 근거로, 면피의 구실로 이용되고는 한다. 모호한 내심의 문제가 많이 관여되기 때문에, PC를 판단할 때는 개인이 가진 평소의 태도가 많이 반영되곤 한다. ‘PC의 베일’이 그렇게 객관적인 편도 아닌 셈이다.

혹 ㅍㅍㅅㅅ 운영진이라면,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그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라면 나에게 불만을 가질 것이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 더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설령 내가 그 입장이었다 해도 더 잘 할 수야 없었을 것이다. 더 잘 하라는 제언이라기보단, 그 배후에서 작용하는 구도의 불편함을 말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그러한 것이다. 퀴어 운동을 한다는 것은 논리와 구호 이상을 말하고자 함인 듯하다. 태생적 불편함, 그 불편함을 서술하는 방식, 몸짓, 그리고 바로잡힐 수 없는 이물감과 같은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퀴어란 말 자체가 배제적으로 시작되었으되, 그 배제를 칼로 무 자르듯 선명하게 가져가는 것이 또 다른 배제라는… 그래, 나도 내가 뭔 말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ㅍㅍㅅㅅ가 성소수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는 점을 높이 산다고 할 지라도, 그 수단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는 점.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왜 그 페이스북 페이지는 굳이 미국식-게이-프로파간다 짤방을 가져다 썼으며, 그 댓글에서 글감을 ‘건져’ 하나의 PC한 글로 완성해 내었는가? 그리고 이 의문은, 그리고 지금까지 제기한 문제는 설령 ㅍㅍㅅㅅ에서 성소수자 필진을 발탁하여 글을 쓰게 한다고 할지라도 쉽게 풀리진 않을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게이가, 지금 상황에서 ㅍㅍㅅㅅ에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이 질문엔 ㅍㅍㅅㅅ가 자주 활용하는 ‘짤방’을 활용하여 답하는 수 밖엔 없을 것이다.



Posted by M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