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O



글을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은 지식의 전달이 주목적이 아닙니다. MECO라는 필진의 모든 글처럼,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평범하고 두루 좋은 내용이 아닙니다.


한-미 FTA를 소재로 하지만 주된 이야기는 그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국제무역과 투자의 역사, 더 나아가 시민운동과 사회적 토론의 전략/전술 측면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한-미 FTA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들 이야기합니다만, 아마도 ISD가 이토록 사회적으로 첨예한 대립의 장이 되는 일은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사회는 가변적이고 한 번 지나간 논제는 필연적으로 생명력을 잃기 마련이니까요.





오히려 그렇기에 되짚어 볼 필요성을 더욱 느꼈습니다. ISD 조항에 대한 최종적 손익계산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전에 중간결산을 한 번 해볼 필요성이 있지요. 반면 시간이 지나고 거품이 꺼졌기에,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부정적인 논조의 이런 글을 쓰는 데에 수반되는 부담감은 줄었고요. 그래서 한 번 용기를 내어 봤어요.


저는 친절한 서술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이해가 쉽지는 않을 거에요. 무엇보다 2차대전 이후의 세계를, 어떤 의미로는 통사적으로 훑어 보아야 하는 논의니까요. 여러분이 읽는데 들이는 귀중한 시간, 그 만큼의 가치가 부디 있길 바랍니다.




ISD?


한-미 FTA 4대 독소조항의 선두주자로 꼽힌 ISD입니다. 기타 래칫(역진불가) 조항 등이 있었지만, FTA 논쟁국면에서 ISD만큼 첨예한 논란을 불러오진 못했지요. 그런데 이 ISD가 뭘까요, 대체?

ISD, 정확히 ISDS이라 함은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입니다. 우리말로는 투자자-정부간 분쟁해결이란 뜻이지요. 투자자-정부 소송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는 전통적인 재판이 아닌, 중재라는 다른 형태의 분쟁해결절차이므로 분쟁해결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겁니다.

특히 한-미 FTA에서 채택하고 있는 ISD란, 세계은행 산하의 국제투자중재센터(ICSID: International Center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에 제소하는 형태의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활발히 체결되고 있는 양자간 국제투자협정(BIT: Bilateral Investment Treaty)의 대부분은 이러한 형태의 ISD를 채택하고 있고, 우리나라 또한 85개의 BIT 중 81개에서 이를 채택하였지요. 그리고 처음으로 이러한 형태의 중재에 회부된 것이 그 유명한 론스타 사건입니다.

흔히들 하는 착각은 ISD가 FTA로 인해서 비로소 우리 사회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건 아닙니다. 이미 ISD는 여러 형태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겁니다. 다만 미국과의 FTA에서 ISD를 체결했다는 점은 분명 주목할 만한 점이지요.

ISD는 FTA도, FTA의 구성요소도 아닙니다. 오히려 FTA가 지금처럼 인기를 얻기 전부터 국제투자의 영역에 존재했던 ISD 조항이 FTA에 도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하지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국제통상과대외투자의 역사에 관한 개략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선 FTA가 왜 ‘갑툭튀’ 하였는지, 그리고 왜들 ISD를 그토록 사수하려고 난리인지 이해해야 하니까요.



국제통상의 역사: FTA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날 갑자기 칠레와 FTA를 했는데 와인과 포도가 그렇게 싸졌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리고 여기저기 FTA를 하더니 미국, EU와 FTA를 한다고 하고, 중국과도 시작하자는 소리가 있고, 일본은 우리가 선제적으로 나서는 걸 보며 위기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윤추구는 상인들을 멀고 위험한 타지, 그리고 심지어 타국으로 보내왔습니다. 이러한 국제통상은 적어도 인류 역사의 최근 1000년 동안 엄청난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고 사회 전반에 있어서 큰 변화의 동력이 되었지요.

무역자유화, 더 크게는 세계화가 절대악이라는 세계관을 가진 분이라면 절망적이게도, 적어도 상품교역의 세계는 이미 완전한 세계화가 진행되어 있습니다. 2차대전의 종료가 목전이던 1944년 브레톤 우즈에 모였던 경제관료들은 2차대전의 원인에 대한 경제적 분석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들의 결론은 역설적이게도 2차대전의 원인이 미국에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유럽의 전체주의 정권들의 압제와 기타 여러 요소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과정에서 결국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가 이들을 경제적으로 압박하여 더욱 극단적으로 몰아 넣어 해당 국가들의 전체주의 정권 득세를 도왔다는 자기반성이었죠.





브레톤 우즈에서는 상당히 재미있는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대공황 시대부터 세계 경제이론을 쥐락펴락한 사람이자 엘리트 사교모임인 ‘블룸즈버리 클럽’의 일원이기도 하였던 케인즈[각주:1](J. M. Kaynes)가 영국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승전국들의 사실상 맹주인 미국의 재무관료이자 뉴딜 정책가 화이트(H. D. White)가 미국을 대표하였는데, 재무부 관료로서 뿐만 아니라 경제학자로서도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위에 있었던 케인즈가 제시한 국제청산동맹[각주:2] 대신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자는 화이트 안이 채택[각주:3]되었지요. 자세한 것은, 이 글을 참조하세요.


각설하고, 브레톤 우즈 회담의 결과로 만들어진, 아니 만들어지게 된 세 가지 기구가 있었습니다.

우선, 세계대전을 불러온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차단하고 감시하여 자유무역을 증진, 전인류의 이익을 도모하는 국제무역기구(International Trade Organization: ITO) –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관세를 낮추자는 기구였죠.

국제무역대금의 결제는 결국 돈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돈, 통화가치의 안정과 수출입 균형의 문제도 연결되고, 국제적으로 결제에 사용되는 통화는 통일될 수 있다면 좋겠죠. 이와 관련된 기구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후 모든 것이 파괴된 개발도상국과 전쟁피해국가들의 재건을 도와 그들의 구매력을 돋구고 세계무역을 증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세계은행/국재재건개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World Bank)이 있습니다.



IMF와 IBRD는 자주들 들어보셨죠. 하지만 ITO라는 기구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당연히도, ITO는 발족되지 않았으니까요. 미국 의회는 1차대전 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가입하지 않아 유명무실화하였던 것처럼 다시금 고립주의[각주:4]를 채택하여, ITO의 설립을 비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세를 낮추고, 비관세장벽을 통제하여 국제무역을 추진하는 것의 중요성은 그 때나 지금이나 주류경제학의 대세를 이루고 있지요.[각주:5] 그리하여 ITO의 설립을 시도한 아바나 협정(Havana Chapter)의 핵심부분만을 뽑아, 별도의 기구를 만들진 않더라도 일단 국제협약이라도 발효를 하자고 합의를 봅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GATT: General Agreements on Tariffs and Trade에요.

이러한 국제경제체제는 트리핀 딜레마의 현실화로 금본위제가 붕괴하였을 때나, 기타 시장 공황이 발생하였을 때 위기를 각각 맞이하였으나 그럭저럭 굴러갑니다. 그리고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합의되어 예전에 예정되었던 ITO와 비슷한 국제기구, 즉 WTO가 만들어졌죠. 그러면서 기존에 존재했던 무역자유화를 이룬 GATT를 전면 개정하여 GATT 1994를 만들고, 이를 WTO 체제의 일부분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GATT, 정확히는 GATT 1947만 해도 1947년부터 94년까지 국제무역을 좌우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여전히 개정되었지만 GATT 1994가 국제무역을 규율하고 있고요. 그리고 GATT의 주된 골자인 최혜국대우[각주:6]내국민대우[각주:7]가 있는 이상, 2차대전 이전의 세계에 비해 세계상품무역의 자유화는 놀라울 정도로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더 나아가 법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요. 국제상품무역을 관할하는 국제협약이 있습니다. 바로 국제물품매매협약(UN Conventions on International Sales of Goods)이라는 협약인데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무수한 체약국이 존재하여 사실상 국제무역에서 무언가가 문제되는 경우 이 협약이 적용되는 경우가 절대다수입니다.



이런 GATT와 WTO 체제에 최근 들어서 대두된 위기가 있습니다만, 하나는 입법기능의 유명무실화이며, 다른 하나는 FTA의 남발입니다. 입법기능의 유명무실화는 모두가 동의해야 하는(만장일치제) WTO 체제의 특성상 빚어진 문제이며, FTA의 남발 또한 그렇기 때문에 추가로 무역상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국가들이 다자 협상 대신 FTA로 양자간 무역자유화를 이루어야 하고, 어느새 이를 선호하게 되어버린 탓에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런데 왜 FTA가 WTO 체제의 위기로 평가받을까요? 어차피 자유무역 기조에 부합하는 것은 마찬가지일텐데요. 하지만 FTA는 앞에서 말한 최혜국대우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분명 모든 나라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최혜국대우(Most-Favored Nation)의 골자일진대, FTA를 체결하면 체약국이 아닌 나라와 체약국을 필연적으로 차별하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GATT 1994의 제24조(GATT XXIV)는 관세동맹과 (조문상 명시되어 있지는 않을지라도) FTA를 몇 가지 요건 하에 허용하고 있지요. 그 요건에는 FTA나 관세동맹의 체결이 비체약국의 무역조건을 이전에 비해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요컨대, WTO 체제는 국제무역자유화를 놀랍도록 증진한 GATT 체제를 인정하며, 이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많은 합의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럼에도 싱글 패키징[각주:8]과 만장일치[각주:9]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WTO 체제가 추가적으로 거둘 수 있는 대타협의 여지가 크지 않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더 큰 합의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개별 국가들의 노력을 인정하는 조항을 둔 셈이지요.



WTO 체제가 자기 자신이 비효율적으로 흘러갈 때를 대비하여 개별국가가 FTA를 체결하여 추가적인 무역자유화를 추구할 여지를 남겨두기는 하였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양자간의 협정인 FTA가 WTO에 비해 비효율적이고 돌아가는 길인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와 같이 FTA를 많이 체결한 나라는 기본적으로 파편화 비용[각주:10]을 많이 지불하게 되어 있죠.

그뿐만 아니라 WTO 체제 자신에 대해서도, 체제에 속한 국가들이 WTO 체제가 아니라 자기들 나름의 해결방법을 도모하게 되므로 체제가 약화된다는 약점이 있지요. 이제는 아무도 WTO 각료회의에서 어떤 합의가 이루어질 거란 기대를 하기가 매우 어렵죠. 지금까지 쉬운 부분은 타협이 모두 이루어졌고, 관세를 어디까지 낮추겠다는 양허표와 언제까지 이를 이루어 내겠다는 스케쥴이 모두 갖추어진 가운데에서, 서비스 시장과 같이 매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만 협상을 남겨두고 있으니까요.


쉬어가기

물론 여기서의 '약화'가 자유무역 기조의 약화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시장 시스템과 국제적 규율로써의 자유무역 기조는 이미 우리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고 말았죠. 심지어 무역기조는 시장 시스템에 대한 가장 도발적인 도전이었을 공산주의 실험에서도 나름의 고유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지요.

저는 여기서 감히 이론논쟁을 시작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국제경제체제에서 시장 시스템과 국경을 넘어서 자유로운 상품 및 자본의 이동이 일어나는 무역이 인류의 절대선이라는 측면은 적어도 현재의 국제사회에선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정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이는 순수한 개념어와 현실적 적용의 차이가 있는 부분입니다.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자유무역이 인류의 부를 증진한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유무역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여러 왜곡과 다양한 피해양상이 발생하는 것 또한 사실이지요. 하지만 이를 넘어서서, 자유무역 자체를 문제로 보며, 영리추구에 혈안이 된 자본가라는 존재를 상정하고 대안사회를 추구하는 운동은 저의 사고와 인지범위를 뛰어 넘습니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자본의 물신화를 추구하는 측은, 자본에 의지를 부여한 '운동가'들일 수도 있지요.

제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지점은 저런 치열한 이론논쟁의 지점이 아닙니다. 다만 훨씬 실용적인 의미에서 반FTA 운동과, 그 근거로 ISD를 삼았던 의견들이 공허한 울림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던 지점과 논거들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FTA 논쟁은 어디서부터 어그러졌을까'에 대한 규명을 시도하는 중입니다. 그 과정에서 최대한 같은 맥락을 공유하고픈 욕심에 이번 글은 국제자유무역의 역사에 관한 간략한 서머리로 끝나고 말았네요.

다음 글에서는 이제 국제투자법의 역사와 ISD 논쟁의 결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글에서 뵐 수 있길 바랍니다, 정말로요.

  1. 그리고 케인즈는 유명한 동성애자이기도 하지요. [본문으로]
  2. 방코(bancor)라는 국가들 간의 거래를 위한 대금결제수단을 따로 만들어 국제교역에 사용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금융기구. [본문으로]
  3. 화이트 안의 채택으로, 미국 달러가 국제사회의 기축통화가 되었으며 미국은 이로써 시뇨리지라는 막대한 이익을 누리게 됩니다. 시뇨리지(seigniorage)라 함은 화폐발행권을 가진 중세의 군주들이 화폐를 만들어 빚을 갚을 수 있듯이 미국 또한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도 달러를 찍어내어 대금을 결제할 수 있다는 원리인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누가 써도 쓸 거 같아요. (...) [본문으로]
  4. 전쟁이 끝났으니 우린 이제 다시 대륙과 다른 나라 일에 참견하지 말고 우리 일이나 잘 하자는 미국의 뿌리 깊은 사상. 미국이 너무 확장주의를 택해서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자엔 많습니다만, 적어도 1차대전 이후의 세계엔 미국의 고립주의가 전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문제는 있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나라들로는 해결이 불가능하고, 해결할 능력이 있는 미국은 개입하질 않았으니까요. [본문으로]
  5. (이것이 단순히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목적지라고만 생각하여 반세계화 조류에서 케인즈 경제학을 인용하는 걸 보면 가끔 쓴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본문으로]
  6. GATT I. 회원국 모두에게 가장 우대받는 국가와 같은 수준의 무역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본문으로]
  7. GATT III. 외국의 물건을 내국 물건과 차별할 수 없다. [본문으로]
  8. Single-Packaging. 모든 사안의 채택여부를 동시에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2003년 칸쿤 각료회의에서 한 사안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한 나머지 모든 사안에서 합의를 이루는 데에 실패한 원인으로 지적되는 제도입니다. [본문으로]
  9. GATT 시대에 비하여 진보하였지만, WTO 체제에서도 많은 의사결정이 만장일치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표결 이전에 외교적인 조율이 일어나는 것이 WTO 의사결정의 특성이기도 합니다만. [본문으로]
  10. 여러 FTA 간의 조건이 많이 달라 수출할 때 수출국에 따라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고, 검역조건 등에서 거래비용이 전반적으로 상승하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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