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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te verde입니다.

 오늘은 드디어 끝날거에요, 와아 끝났다 끝났어 조선의 궁궐 시리즈 하(下)편  아아... 내가 미쳤지 ㅠㅠㅠ 이런 패기로운 주제를 잡는 게 아니었어....  보름 만에 쓰는데도 그저께 쓰고 오늘 쓰는 것과 같은 피곤함. 아 아닙니다...  

1. 임진왜란 : 하얗게 불태워 버렸어... 궁궐을

    저번 포스팅에서 보셨다시피,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양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세 궁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임금은 선조. 11대 중종부터 14대 선조까지의 가족관계를 알기 위해, 잠시 왕실 가계도를 보겠습니다. 

<중종의 가계도, 여인천하의 소재제공자 답네요. 글씨 더럽게 못써>

    선조는 원래 왕이 될 짬밥. 아니, 서열이 아니었습니다. 중종의 수많은 서자들 중 7남인 덕흥군(임금의 적자는 대군이라는 칭호가 붙지요)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죠. 


그냥 아들이어도 일곱째면 왕위를 잇기가 힘든 순번인데 심지어 7남의 아들...  

 

<헐 대박>

    그러니 선조가 왕이 됬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운 빨인거죠. 중종의 적자로 왕이 된 사람은 인종, 명종 두 임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종은 비실비실대다가 재위 1년 만에 사망하고 명종은 유일한 아들이 일찍 죽어 후사가 없었죠. 게다가 명종의 재위 기간이 20년이 넘었으니 명종의 형제들은 대부분 50줄에 접어들어 왕위보단 웰빙(..)을 생각할 나이가 됩니다.[각주:1] 

    결국 명종의 조카들(중종의 손자들) 중에서 후대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덕흥군의 아들인 하성군(선조)이 명종의 눈에 들어서 후사로 책정되지요. 여기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만, 다음 기회에 이야기 하도록 하죠. 분량이 많아서 귀찮아염.

   아무튼 선조 명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5년 간 (궁궐 건물에는) 별 일 없이 시간이 흐르지요. 그런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도로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됩니다. 네, 임진왜란이요 ㅇㅇ 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은 팍삭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그렇다면 임진왜란으로 인해 한양의 궁궐들은.....? 


관청이 무너지고, 궁궐이 무너지고


선조수정실록 25년(1592 임진) 4월 14일 28번째기사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나다

    도성의 궁성(宮省) 에 불이 났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 세자빈의 찬궁 이 있는 곳이었다. 역대의 보완(寶玩)과 문무루(文武樓)·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 춘추관의 각조 실록,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의 사초(史草),【《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의 초고이다.】 《승정원일기》가 모두 남김없이 타버렸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아 먼저 불탔다.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임금이 없을 때 도성을 수비하는 직책 (각주)이 몇 사람을 참(斬)하여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어머나 씨발>

홀랑 다 태워먹었어요.    

{1592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전소(全燒)}  +종묘도 당연히 소실

부록 : 그 많은 궁궐은 누가 다 (태워)먹었을까

<일본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궁궐>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노비문서를 태우기 위한 노비들 + 보물을 노린 난민들이 궁궐과 관청에 불을 질러서 세 궁궐이 모두 타버린 것처럼 기술되어 있습니다.  흠.....  진짜 백성이 불지른걸까요.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 중 하나이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인 오오제키(大關)의 전기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의 일부를 봅시다.

 ‘5월3일 술시. 조선의 도읍 동대문 안으로 진입했다. 거기서 황궁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 (玉樓金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시황의 궁궐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 있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 장군도 천자의 옥좌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


음.............????? 너 궁궐을 본거니? 

    그 다음날인 5월 4일, 또 다른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가 한양에 입성합니다.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종군승 제타쿠(釋是琢)가 오타쿠같애 남긴 <조선일기> 중 ‘경복궁관람기’도 살펴볼까요.


‘북산 아래 자궁이 남향하여 있는데, 돌을 깎아 사방으로 벽을 둘렀다. 진정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는데, 행랑을 둘렀으며 처마가 높다. (중략) 천장 사방 벽에는 오색팔채로 그린 기린・봉황・공작・난・학・용・호랑이가 있다. 계단 가운데는 돌로 새긴 봉황이, 그 좌우에는 붉은 학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이곳이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으로선 분간할 수 없다.’


...............?!?!?!?!?  이게 뭐시여....? 왜군들이 궁궐을 봤다는데?

사실 정리를 해봅시다.

1. 선조는 1592년 4월 30일에 한양을 벗어나 몽진(피난)을 갑니다.(어려운 용어의 뜻을 알려주다니... 상냥해)

2. 앞선 글에 있던 유도대장은 한강 방어선이 뚫리자 왜군과 싸우지 않고 바로 도주. 

3. 그 후 왜군들이 5월 3일에 한양에 입성.  

-> 고로, 왜군은 한강을 건넌 이후 한양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조선군, 관료들과 마주친 적이 음슴. 

    실록의 기록에 근거하면, 왜군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인  1-2번에서 세 궁궐이 전소되어 있어야 합니다. 근데 3번 순서에 있는 왜군들이 궁궐을 봤긔??? 심지어 화려한 궁궐을 보고는 감동해서 눈물까지 질질...?[각주:2] 아무튼, 왜군이 한양에 들어가기 전까지(5월 3일 전까지) 도성 내의 궁궐 건물들은 멀쩡했습니다. 

    그런데 고니시 군의 종군승 덴카이(天荊)가 저술한 <서정일기> 5월 7일 자 기록에는 ‘궁전은 모두 초토로 변했다. (중략) 누원이 남아 있는데, 실로 불탄 뒤의 한 떨기 풀이라 하겠다’ 라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선조가 북쪽으로 튀던 4월 30일은 큰 비가 내렸습니다. 장대한 규모의 세 궁궐 모두가 불타기엔 힘든 날씨죠. 고로 왜군이 입성한 5월 3일~5월 7일 사이에 궁궐의 방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이러나 저러나 1592년 5월, 조선 전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던 세 궁궐은 쌍큼하게 사라졌습니다.

2.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개시된지 약 1년 후, 수도 한양이 수복됩니다. 신하들은 선조에게 어서 수도로 환도하자고 건의를 하지요. 하지만 발발당시 백생들을 쌩까고 개성->평양->의주까지 도망간것도 모자라 요동반도로까지 튀려고 했던 선조는 쉽게 한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한테 쳐먹을 욕이 무서웠거든요.

    나라를 버린 왕이라고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피난을 갔던 선조입니다. 피난 당시 평양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은 왕비가 탄 말을 걷어차고, 왜군들에게 임금의 행선지를 알려주기 위해 임금의 임시거처 담벼락에 ‘왕은 의주로 도망간다'라는 낙서까지 써 놓았었을 지경으로 욕을 먹었습니다.  아... 선조의 찌질함이 너무 짜증나서 이야기가 다른길로...ㅠㅠㅠ    

    아무튼 임진왜란이 시작된 지 1년 3개월 만에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옵니다.  (1593년 10월)


근데 궁궐이 없ㅋ엉ㅋ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다 타서 법궁이고 이궁이고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음ㅋㅋㅋㅠㅠㅠㅠㅠ 

당시 궁궐터들의 꼬락서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 : 

    하는 수 없이 그나마 멀쩡하던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그 주변의 고관들의 집을 임시 세자궁과 종묘로 사용합니다. 이 때 이 곳 일대를 정릉동 행궁이라고 부르게 되지요.[각주:3]  정식으로 돌담을 두를 돈이 없어서 나무로 적당히 울타리를 치고, 대문도 동쪽에 하나 서쪽에 하나 대충 짓습니다. 이후 몇 번 궁궐을 재건하고자 했으나 재정이 시망이라[각주:4] 결국 선조 생전에는 짓지 못하고, 선조는 1608년 정릉동 행궁 석어당 에서 사망합니다. 아... 안습... 

    그리고 맏아들인 (그러나 서자인) 광해군이 석어당에서 임금으로 즉위합니다.  광해군은 즉위와 동시에 궁궐을 수리할 재원을 마련, 공사에 착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산이 모자라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한 번에 복구할 수는 없고...  그 중 창덕궁을 골라 법궁(法宮)으로 삼아  수리 -실은 거의 신축-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1609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1609년 창덕궁 중건)

왜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을 법궁으로 중건했는가

 뭐...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1. 경복궁은 지금까지 임금 두 명이 폐위 당한 곳이라 기분이 좋지 않다. (단종, 연산군)  

2. 원래 경복궁 터 자체가 화기가 세다고 하여 풍수지리상 최고 명당은 아니다. 

3. 경복궁이 면적이 훨씬 넓어서 복구 비용이 더 많이 든다. 

등등이 있지요. 

    선조, 광해군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러 군왕들이 경복궁을 다시 세울 계획을 가졌습니다....만, 경복궁의 부지가 워낙에 넓다보니 막대한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30년 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발생(...)   국가 재정이 더 이상 굴러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망조가 들어서 도저히 시도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조 시기인 1700년대 말이 되어야 간신히 임진왜란 이전 수준으로 인구로 복구가 되었습니다, 200년 걸렸죠.)


 라는 건 실은 핑계임 ㅇㅇ,

 -광해군이 경복궁은 중건하지 않았지만 다른 궁궐은 다 중건했고, 새 궁궐도 지었슴-

1609년 창덕궁 중건, 

1611년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으로 개칭, 

1616년 창경궁 중건, 

1616년 자수궁 중건, 

1623년 경덕궁(경희궁) 창건,

1623년 인경궁 (완공 직전에 광해군 폐위)

  실은 광해군이 풍수지리사상 신봉자였긔.

 ..........?!?!?!?!?! 이게 무슨 무슨소리...  

부록 : 서자출신 왕.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트라우마 

     왜 그랬을까요?  광해군의 ‘정통성'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서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통성에 있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1. ‘아 ㅅㅂ 내가 차지해도 되는 자리인가' 하는 자격지심의 문제도 있고, 

2. ‘서자인 내가 왕이 되었으니 다른 형제가 반란을 일으키면 어쩔?' 

이라는 걱정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선조는 생각했습니다. ‘ ‘다음 왕은 무조건 적자(嫡子-왕비가 낳은 아들)로!!’  하지만 현실은 줄줄이 후궁에게서만 아들이ㅋ...  그러던 도중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전쟁 중에 왕이 죽으면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아야겠죠? 근데 선조는 적자에 대한 미련 때문에 평양으로 도망갈 때 까지 세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등신...) 평양에 이르러서야 신하들의 갈굼 간청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광해군을 세자로 삼지요.  

    광해군은 열심히 일했어요. 임진왜란 중에 목숨 걸고 임금 역할을 한 사람은 광해군이였지요.  왜군이 평양을 넘어서 진격하고 있는데 남쪽으로 내려가서 전쟁자금을 모으고, 군사를 모집해 전투를 지휘하고, 관료들을 소집하고, 선조는 뭐했냐고요? 선조는 이때 의주에서 대기 타다가 요동으로 도망갈 준비 중 이었긔.

    이렇게 목숨 걸고 전쟁 수습을 했으니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세자 자리는 확실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근데....

<아빠인 선조가 뒷통수 작ㅋ렬ㅋ>

    1606년 인목왕후(후에 인목대비)에게서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납니다.  선조는 눈이 뒤집혀요, 적자적자적자적자.....  꿈에도 그리던 왕비의 아들, 적자가 요기잉네?ㅋ  안 그래도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도 그렇고 전후 수습도 그렇고, 일을 너무 잘해서 자기의 왕위가 위협 받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잘해도 지랄이야 애비가 등신이니 아들이 고생...  

     선조는 30줄에 접어든 세자 광해군 대신 두 살짜리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을 생각을 합니다. 영의정과 의논도 거의 끝났었구요. 광해군은 눈이 캄캄해집니다. 근데 (다행스럽게도) 선조가 갑자기 죽어버려서 그런 개막장은 일어나지 않음.

    하지만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선조가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신하들이 광해군의 왕위를 흔들려고 자꾸 시도를 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초조합니다. 이러다가 인목대비랑 신하 몇몇이 짜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내세워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ㅈ되는 거에요.  그래서 9살 짜리 동생을 강화도로 귀양보낸 후 죽이고, 계모는 냉골에다가 유폐시킴(...)

    이런 일들을 겪다보니 광해군은 자꾸 정통성 문제에 매달리게 됩니다. ‘왕기(王氣)’가 서려있다 라고 소문이 나는 곳에는 유달리 집착을 하게 됐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풍수지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이곳 저곳에 궁궐을 짓게 됩니다.  자수궁의 경우 원래 후궁들을 두는 별궁으로 쓰던 곳인데, 왕기가 서려있다는 말을 듣고 보수, 증축합니다. 경덕궁(경희궁)의 경우 왕족인 정원군의 집이었는데,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흐른다' 라는 말을 듣고서는 뺏아서 경덕궁을 짓습니다. 인경궁 또한 ‘인왕산 자락에 왕기가 있다' 라는 말을 듣고 창덕궁, 창경궁에 버금가는 크기로 엄청나게 공을 들여 짓지요. 

    나중에 정원군의 아들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인조입니다. 경덕궁 자리에 왕기가 서려있던건 사실일지도?[각주:5]


...... 망했어...  

    실은 '조선의 궁궐들 5궁'은 3부작이 아니라 4부작입니다!!! 허허허허 하편이 끝이 아니라 최종편이 남아있긔!!!☆(...)  분량조절 대실패. ㅠㅠㅠ 죽여주시옵소서... 다음편에서 만나요ㅠㅠㅠ


세줄요약

1.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다 태워먹음

2. 근데 백성이 태운건 아니고 왜군이 불싸지름

3. 선조가 찌질해서 광해군이 궁궐을 막 지어댐(응?)

서울의 5궁 시리즈.
건축에 관한 무언가4. 서울의 궁궐들 5궁 (上)

건축에 관한 무언가5. 서울의 궁궐들 5궁 (中)


참고문헌


조선왕조 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1. 명종은 중종의 아들 중 막내입니다. [본문으로]
  2. 근데 눈물까지 흘리면서 불태우는 건 뭐람... ‘가질 수 없다면 부셔버리겠어!?’ [본문으로]
  3. 성북구 정릉동 아님. 당시 정릉동은 중구 정동일대 [본문으로]
  4. 임진왜란 이전, 170만결에 이르던 농지가 임진왜란 이후 54만결로 감소합니다. 1/3토막이 남 [본문으로]
  5. 나중에 경종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르는 연잉군(영조)도 정통성 문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