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대법원이 결혼보호법(Defense of Marriage Act: DOMA)과 캘리포니아 주 주민발의안 8번(Proposition 8)에 관한 판결을 드디어 내렸습니다. 우리 시각으로 네 시간 전인 저녁 11시에 선고가 났어요. 결과는 모두 들으셨겠지만, 결혼보호법은 위헌이라고 판결이 났고, 주민발의안 8번은 청구인이 청구인적격(Standing)을 가지지 못하여 각하되었습니다.
저도 (슬프게도 영문 리딩이 느린지라) 아직 판결문을 제대로 파악하진 못했는데, 우선 씁니다. 영문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사이의 정보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나눔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무엇보다도 어찌 되었든 하나의 교두보가 될 승리,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1. 무슨 사건들이죠?
DOMA 사건은 뭐고, 주민발의안 8번은 뭘까요?
United States v. Windsor 사건에서 심판대상법이었던 DOMA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6년 연방정부에서 (기존에 있었던 유사한 법을 고쳐) 만든 법을 말합니다. 미국은 연방제 국가인데, 주법과 주의 권한을 침해하진 못할지라도 적어도 연방법 상에서 “결혼”이라고 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남성과 여성의 결합(Union of opposite sex)”으로 정의하겠다는 내용이 그 핵심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군형법 제92조의6처럼 악명 높은 DOMA 3조였죠.
에디스 윈저(Edith Windsor)라는 여성은 티아 스파이어(Thea Spyer)라는 여성과 동성결혼이 일찌감치 합법화된 캐나다에서 결혼한 후, 이후 동성결혼을 인정한 뉴욕 주에서 이 결혼을 인정 받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주에서 “동성결혼 할 수 있다”를 인정하는 것까진 각 주의 독립된 권한입니다. 그러나 티아 스파이어가 먼저 죽자 에디스 윈저에게는 36만 달러를 넘는 상속세가 부과되었습니다. 상속세는 연방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연방법에 의하면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므로, 상속세의 문제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결혼이었다면 면제되었을 상속세가 그대로 부과되었죠.
그랬기 때문에 윈저 여사는 세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합니다. 물론 연방법상 부부가 아닌 건 맞으니까, 그 제한을 불러온 근거조항인 DOMA 3조가 위헌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요. 미 법무부는 처음에는 반대 입장을 취하다가, 최근 이 법안을 포기하기로 노선을 선회합니다. 그러니까 미 하원의 공화당 의원들이 깜짝 놀란 거죠. “그럼 우리들이 하겠다”라면서 원래 법안을 옹호해야 하는 법무부 대신 수십만 달러를 써가면서 변호사를 사고, 하여간 이만저만한 삽질을 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심지어 이번에 져버렸군요? ^^
Hollingworth v. Perry 사건의 심판대상이었던 캘리포니아 주민발의안 8번. 이야기 전에 주민발의안이라는 게 뭔지부터 봅시다. 주민들이 법을 제안하는 겁니다. 무슨 법을 제안하였을까요? 캘리포니아 주 헌법에 “결혼을 남녀의 결합”으로 정의하는 조문을 넣자고 하였습니다. 왜 이걸 가지고 헌법까지 바꾸려고 했냐면,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이 애초에 결혼을 양성의 결합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캘리포니아 주 헌법 위반이라고 판결을 내린 바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헌법을 바꿔서 캘리포니아 주 법원에게 그런 판결을 내릴 수 없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발의안은 실제로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 결혼하고 싶은 캘리포니아 주에 사는 동성 커플이 이게 (주 헌법이 아닌) 연방 헌법의 평등 및 적법절차 조항을 위반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연방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했습니다. 소를 제기하려면, 우리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특히나 상대가 필요합니다. 법이 잘못되었다고 소송을 하는 것이니, 주지사와 주 정부를 대상으로 소를 제기했지요. 1심인 연방지방법원에서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났어요. 그런데 이미 민주당으로 바뀌었던 주 정부가 “우리는 이거 안 다투겠다”고 해버린 겁니다.
DOMA 사건의 공화당 의원들처럼,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저능한 주민들이 “그러면 어떡하냐. 우리가 대신 다투겠다.” 하고 제9연방항소법원에 항소하고, 여기서 패하자 대법원에까지 상고했지요. 주 정부와 주지사가 옹호하지 않는 법을, 심지어 의원들도 아니고, 그냥 시민단체 하나가 옹호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2. 일단 ‘위헌’은 좋은 것 같은데, ‘각하’는 뭐고 ‘청구인 적격(standing)’은 뭔가요?
네, 결혼보호법이 위헌이란 소리는, 에디스 윈저가 당장 36만 달러를 환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외에도 연금 및 사회보장수령권 등의 문제에서 차별받던 동성커플들이 승리했다는 걸 뜻하지요.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 주민발의안 8번은 조금 미묘합니다.
‘소’라는 건 그러니까, 법원의 판단을 요구한다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아무나 소를 제기할 수 있으면 곤란한 경우가 있지요. 예를 들어 A라는 재산을 두고 B와 C가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권리도 주장하지 않은 D가 끼어들어서 “A는 E의 소유임을 확인해 주세요.”라고 했다고 해보지요. 이런 소송까지 인정하게 되어 버리면 법원의 부담이 매우 커지고, 불필요한 분쟁관계가 너무 많아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소송에 낄 수 있는 사람들을 제한해둔 게 ‘당사자적격’이란 겁니다. 민사소송에선 이런데, 공법소송에서는 조금 더 복잡해요. 헌법소송에서 쓰는 말은 당사자가 아니라 청구인이니 ‘청구인 적격’이라고 해두지요. 아무튼 법을 옹호할(defend) 권한은 주 정부에 있는데, 최초로 항소법원에 소를 제기한 동성커플이 주 정부를 상대로 제기했을 때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정작 주 정부는 상고를 안 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송에 ‘참가’했을 뿐인 주민단체가 상고를 한다? 그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주민발의안 8번이 미국 연방헌법에 의해 합헌인지 위헌인지를 따지기 전에 이미 대법원에서 다룰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소송요건이 흠결되어) ‘각하’된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왜 이걸 나한테 들이밀어?!”가 되겠습니다.
3. 상황이 좋은 건가요? 얼마나 좋은 건가요?
옛날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게이운동가들이 동성결혼을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을 때 결혼보호법 같은 게 있었지요. 미국도 각 주 별로 정치 지형이 많이 다른데, 캘리포니아나 뉴욕, 혹은 오대호 연안의 대도시권 같은 경우에는 진보적인 편이고, 남부 주나 중부 일부 주의 경우 보수적입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빨간 곳(공화당, 보수적) vs. 파란 곳(민주당, 미국진보)를 생각하시면 될 듯) 그런데 1996년에 결혼보호법이 만들어졌다고 했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연방 차원에서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두고 게이 운동가들이 연방을 비난했어요. 왜 연방이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해서 거기까지 왈가왈부 하느냐고요.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조금 바뀌었죠. 일부 진보적인 주에서는 주 권한 내에서 동성혼을 인정하고 있고, 심지어 연방의 결혼보호법이 위험하게 되었죠. 동성혼을 반대하는 논리들은 하나하나씩 복멸되었습니다. 사회학적, 생물학적 연구결과의 나름 성과라고 할까요. 이렇게 되니까 이제는 동성혼 반대론자들이, 연방 차원에서 동성혼이 “허용해야 하는” 상황을 걱정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요즘 동성혼 반대론자들은 “결혼제도를 정하는 것은 주의 권한이다!”를 외치고 다녀요. 오히려 진보적인 사람들과 게이운동가들은 연방이 나서서 동성혼 금지하는 저 무식한 애들 좀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외치는 지경이 이르렀지요.
DOMA가 위헌이 될 것은 뭐 사실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습니다만, (변론절차에서 DOMA를 옹호하는 측은 단 하나도 제대로 된 논거를 내놓지 못했죠. 절반만 번역이 되었지만 제 개인 블로그 글을 참조하시길)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캘리포니아 주민발의안 8번에 관한 것이었어요. 이미 이전에 Romer v. Evans 사건에서 주 헌법에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의한 평등추구조치를 금지하는 조항을 넣는 것”은 금지된다는 연방대법원의 판례가 나왔지만, 동성혼을 금지하는 주 헌법 조항은 어떨까? 라는 게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거든요.
여기에서 “주민발의안 8번은 위헌!”이라고 연방대법원이 때려주었으면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주에서 동성결혼이 허용되는 극적인 효과까지도 있었을 수 있던 거지요. (아주 옛날에 인종간 혼인을 금지하던 시절 이런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 Seven-state solution이라고 해서, 이미 동성간 시민결연(citizen union)이 허용된 7개 주에서 동성결혼이 금지되는 것은 평등하지 않아서 위반이라는 판결을 내린다거나 예전에 허용되었던 주에서 갑자기 금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등의 여러 중간적인 해결책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연방대법원은 ‘청구인 적격’이 없어서 상고가 각하되고, 그러므로 원래의 연방지방법원 판결(이미 위헌이라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로 돌아가라는 중간책을 취한 것으로 보이네요.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연방항소법원에서 애초에 주 정부가 포기하였지만 주민단체가 대신 한 항소를 받아준 것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뭐, 저도 물론 “이런 거 하지 마!”라고 호탕하게 말해주는 쪽을 바랐습니다만, 사실 연방대법원은 그렇게 진보측에 호의적이지 못합니다. 종신직이다 보니 Scalia 대법관 같은 꼬장한 늙은이가 십몇년 째 해먹고 있지요. 전임 부시 대통령 때 다수를 임명하다 보니 아직도 진보 4: 보수 5의 정치적 지형이 유지되고 있고, 대법원장 로버츠 또한 보수 쪽이라고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제 이전 글을 보십시오)
그런 만큼 일단은 다행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워낙에 반대측 논거가 말도 안 되어서 반대의견 쓰신 분들도 좀 어려웠던 것 같지만요.
4. 정말로 “미국에서는 동성커플도 세금, 복지, 주택 등에서 차별을 받지 않게 되었”나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갈 길이야 멀죠. 일단 50개 주 중에서 동성결혼이 인정된 주도 몇 개 안 되고, 시민결합이 인정된 주까지 합쳐서 1/3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요. 미국은 연방제 국가라서 이런 제도들을 각 주에서 다 정합니다.
하지만 에디스 윈저의 경우에는 연방법에 의해서 차별을 받고 있었죠. 그리고 적어도 한 주에서 결혼을 하고 다른 주에 가면 그 결혼의 성립은 대개 인정이 되는 듯합니다. (물론 동성혼에 대해서는 여전히 판례가 분명치 않고 논란이 있다고 합니다) 연방법에 의한 차별이 철폐된 이상, 이제 실제적으로 미국 동성커플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지 못할 일은 없지 않을까요? (자, 이제 정말 미국에서 게이 이혼 전문 변호사의 꿈을 키워야…)
그리고 주민발의안 8번을 위헌이라고 판결한 미 연방지방법원 판결은 살아남았어요. 아쉽게도 연방지방법원 판결은 기속되는 선례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판결 때문에 다른 판결도 이와 같이 판결을 내려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적어도 동성혼을 금지하는 주 헌법 개정이 위헌이라는 연방 하급심 판결 하나가 살아남은 이상, 충분히 참고가 될 만 하지요.
여전히 어떤 주에서는 동성혼을 허용하지 않고, 주 차원에서 주는 혜택을 주지 않으려 들 가능성은 있습니다. 타 주에서 성립한 결혼을 자기 주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겠죠. 아마 다음 번 투쟁은 그 방향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겠네요. 하지만 적어도 싸움의 근거는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동성애자들은 차별 철폐에 한 걸음 다가섰다고 표현할 수는 있겠네요.
5. 동성혼을 반대하는 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건가요?
내 의견을 상식으로 포장하여 남 의견을 상식 이하로 만드는 화법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한 번만 해봅시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자유의사에 의해서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근대법이 보장해온 권리인데 말입니다. 그 “두 사람”의 생물학적 성이 같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최근 실증적으로 밝혀졌어요. 그렇다면, 그걸 반대하시려면 제대로 된 데이터와 실증적 근거를 들고 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이 안 좋아서 동성혼은 안 됩니다”라고 주장을 할 책임은 너한테 있는 거에요.
결혼한 자녀의 성 정체성에 영향 좀 미치면 어떠하며, 그런데 심지어 안 미친다는 과학적 결과까지 나와있고, 사회학적으로도 심지어 레즈비언 커플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은 정상가족 부부 아래에서 자란 경우보다 더 좋은 가정환경을 보장받는다는데 말이지요. 사회학, 심리학, 생물학이 모두 입을 모아서 동성결혼을 반대할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고 외치고 있어요.
지금까지 그 많은 돈을 쏟아 부으면서도 이거 반박도 못 해놓고, 한남대교 근처 음습한 집에서 동성애 치료 따위 자위질이나 하고 있으면서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면 다니? 머리는 왜 달고 다니는지.
6. 미국 일인데 한국 게이/한국 레즈인 나에게 중요한가요?
네, 중요합니다.
제가 이 바닥 처음 나왔을 때부터 그랬지만, 미국이나 유럽 가서 산다는 언니들이 좀 계셨어요. 가서 행복하시다면 좋은 일입니다. 안 말립니다. 근데 갈 수 있는 분은 얼마나 되세요? 아니면 무턱대고 갈 수 있는 용기라도 낼 수 있는 분은?
그렇지 않은 우리들에게 한국이 살아야 하는 터전인 건 분명하지요. 갈 수도 없고, 갈 마음도 없으면서 부러워만 하는 게 다는 아닐 겁니다. 지금 이 곳을 바꾸는 데 미국의 사례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실제로, 미국 판결이 뭐가 나오면 그걸 분석한 논문들이 뜨고, 우리나라 법체계를 바꾸고 법을 개정할 때 미국과 유럽의 사례는 중요하게 작용하지요. “남의 일”이지만, 완전 남의 일은 아닌 겁니다.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발버둥 치고 더 알리고 그러면 그런 날이 조금 빨라질 것도 사실이겠지요.
이 정도의 마음으로 이번 판결을 기꺼이 여기고 있습니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궁극의 목적으로 보는 건 아닙니다. 차별과 평등의 국면에서 해결될 일은 산적해 있겠지요. 합법화되기 전에는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과하게 별 거 아니라며 폄하할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쟤네들 한 거 보고, 일단 군형법 제92조의6부터 어떻게 해봅시다. 폐지 입법청원이 국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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