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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딴지일보에서 필독이란 필자가 고은태 씨의 성희롱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SM에 관한 글을 싸질렀다. ‘싸질렀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글이 이 따위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은태의 고독한 커밍아웃’이란 제호 하에 뭔가 길게 써놓긴 했는데, 피해자 이름으로 사건을 호명하는 등 (지금은 수정되었다) 기술적인 난감함부터 시작하여, 난-잘-모르지만-에세머가-보면-기분-나쁠-것-같은 소리들을 꽤 많이 해두었다.


아 이거, 좀 문제가 되겠다 싶어서 글을 시작하긴 했는데, 공사가 다망하여 며칠을 미루다 보니 레디앙에 이런 글이 나와 버렸다. 애초에 나는 SMer가 아니다 보니 에둘러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을 당사자의 입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글 쓸 필요 없겠네, 블로그에 글 올려야 하는데 어이쿠 아쉬워라, 하고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줄을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말할 지점이 있다는 걸 느꼈다.



“PS. 마지막으로, 고은태는 고독하게 커밍아웃한 거 아니다. 아웃팅 당한 거다. 그 차이는 아시는지?”


- 딴지일보가 SM을 알아? (누구야)



트위터에서 이 사건에 관한 논의는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하나는 성희롱을 사회적으로 비판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몰이해와 불합리한 대응에 관한 비판이었다. 이 사건에 관한 높은 관심으로 인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게 추가적인 피해를 불러왔고, 성폭력을 단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이미 감당한 것보다 더 큰 피해를 보는 것을 어떻게 방지하는가에 대하여, 기존의 논의와 이어지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다른 하나가 바로, 필독의 글과 같이 SM에 관한 것이었다. 나름 트위터 세계의 유명인이었던 고은태라는 인물이, 소위 ‘변태성향’으로 알려져 있는 SMer라는 사실의 센세이셔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필독과 딴지는 이 사건에서 굳이 SM을 다루는 자신들의 못된 관음증을 합리화하기 위해 고은태가 SMer로 커밍아웃 하였다는 프레임을 짰다. 그 의도는 괘씸하지만, SM이 성희롱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고 하여 누군가가 이에 영감을 받아 SM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생각의 흐름을 막을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지 못했다면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퀴어 운동단체였던 Queer Nation이 벽장 속에 머물러 있는 게이 유명인들을 ‘out’ 시키고, 타임지가 이는 자기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의 긍정인 ‘comingout (of the closet)’이 아니라 ‘outing’에 가깝다고 규정한 이후 “커밍아웃은 장려해야 할 좋은 일, 아웃팅은 범죄”는 일종의 공식이 되었다. 필독이 굳이 따지자면 아웃팅에 가까운, 고은태의 성적 취향이 드러난 사건을 ‘커밍아웃’이라고 포장한 것은 성소수자 사회 일반에서 중요한 이들 개념에 대한 몰이해와, 그 이전에 이해할 마음도 없으며 복잡다기한 맥락을 임의적으로 삭제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몰지각함은 이 글 전반에 매우 잘 드러나 있다.


논술 수업에서 선생들은 잘 쓴 글보다 ‘전형적으로’ 못 쓴 글이 나왔을 때 환영하고 좋아한다. 필독의 글은 SMer에 대한 몰지각함을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성소수자에 관한 논의를 진행할 때 전형적으로 일어나는 실수를 참으로 차근차근히 저지른 글이다. 레디앙 기고로 이미 충분히 무지함이 드러난 글이지만, 아니 그러므로 적절한 수준에서 동성애와의 유비추론[각주:1]을 통해 이 글이, 그리고 우리가 흔히들 저지르고 있는 잘못을 다시 한 번 짚어 보자.




우선 짚어보자. "이쪽 바닥 사람들의 성적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필독의 뇌까림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당신이 성소수자라는 점 또한 당신을 항상 성적 자유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주변의 남자에게 내가 게이라고 말하면 그는 순간 본능적으로 나와의 스킨십을 꺼리게 되고, 오묘한 사적 거리를 유지하게 되더라. 설령 나에게 애인이 있더라도 마치 당장 당신을 덮칠 수 있다는 듯이.

물론 나의 스탠다드한 대응은 "넌 남자라도 안 되거든!"이지만, 게이라는 사실만 말했을 뿐인데 본능적으로 나와 당신의 성적 긴장 가능성에 생각이 미치는 그 기민함은 짜증나지 않을 수 없다. 게이 남성이 성적 지향을 커밍아웃하는 이유가 당신을 성애적 의미로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닌데도 말이다. 섹슈얼리티는 많은 것을 결정하고, 의외로 이야기하지 못하면 답답하다.


시작부터 빈정 상하는 부분에 맞닥뜨린 당신이 더 읽어 내려가면서 마주하는 광경은 가관이다. '때리면서 하악하악, 맞으면서 하악하악' 같은 설명이 얼마나 SMer들의 감성에 부합하는 설명인진 모르겠지만, 섹슈얼리티를 설명할 때 간단하고 '친근한' 어휘를 사용한답시고 복잡한 맥락과 역사적 기호를 생략하고 왜곡하는 경우는 결코 적지 않다.


가령 트랜스 여성(MTF)을 설명하며, '머리는 여잔데 몸은 남자인 거야'와 같은 설명을 한다면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인지하는 방식에 대한 중대한 왜곡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을 참조하기로 하자) 이러한 왜곡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가끔은 전투와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대개 오독의 상태 그대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넘어간다는 사실이 문제가 없다는 점을 방증하진 않지만.


시작하면서는 SMer의 일반화를 통해 이들이 얼마나 '다른지'를 이야기하던 필독은, 갑자기 전략을 선회하여 이들 또한 다를 게 없는 동등한 사람임을 강조한다. "에세머들은, 그 용어가 가리키는 취향의 특이성으로는, 욕 먹을 이유가 일절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모순적인 내용의 나열은 성소수자를 설명하는 전략에도 상존한다. 아마도 한 사람이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설명방식의 총의가 이러한 혼돈을 불러온 것일 터. 하지만 확실히 게이들 또한 피부 미용에 신경 많이 쓰는 그루밍 한 예쁜 남자 인간이다가도 갑자기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일 뿐, 다른 것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 덧붙는다.


우리 모두는 같으면서 다르지만, 그 중 무엇을 기준으로 같고 다름을 판정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성소수자의 성적 실현 방식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가 우리 모두와 과히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은 결국 국가적 테두리 안에서 이들의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굳이 욕 먹을 이유가 없다'는 건 이의 러프한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왜 그 다른 점이 차별의 근거가 되어선 안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같으면서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조심스럽게 고려하여 서술할 문제이지, 필독의 사례에서처럼 자기 편한 대로 한 글 안에서 이랬다 저랬다 해도 될 내용이 아닌 듯하다.


아무튼 성폭력이 문제이지, 그 성적 실천의 방식이 문제가 아니란 점을 설명하는 딴지식-방식은 잘 보았다. 저걸 저렇게도 설명할 수 있구나. 흠... 청바지... 생머리...




이와 같은 연습게임들을 거쳐, 필독은 마침내 본격적으로 논쟁적이라 할 부분으로 진입한다. 이 부분은 좀 중요하니 원문을 좀 보기로 하자.



타인의 취향을 좋아해 줄 필요는 없다. 따뜻한 시선을 보내줄 필요도 없다. 걍 늬덜은 그렇게 살라는 의미로다가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똘레랑스라는 게 어차피 ‘인내’잖냐. 고종석의 말이 맞다.


- 난 DS라는 거 역겹지만, 둘이 합의하고 하는 거면 누가 뭐라 그럴 수 있나.


- [타인의 취향] 고은태의 고독한 커밍아웃 (필독)



맞긴 뭐가 맞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인정하거나 지지할 필요 없이 그저 참아줄 수만 있으면 된다는 태도는 충분할까? 성소수자에 대한 이러한, PC하다는 단어로 포섭할 수 있을 태도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무언가를 참아줄 수 있으려면, 일단 그것이 존재해야 한다. 지지는 몰라도,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참아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어떠한 성적 취향/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역겹다. 그렇지만 합의 하에 있는 일이라면 뭐라고 할 수 없다.

라는 문장과 같이 보자. 어차피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합의 하에 서로 좋아서 하는 어떤 일도 막을 수 없다는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라면, 앞의 문장을 굳이 명시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적었다는 사실 자체에 화자의 태도가 드러나 있다. 이러한 문장은, 성적 실현에 대해 쓰였을 때 기묘한 효과를 가져온다. 바로 해당 성적 취향/지향/정체성을 행위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합의하고 하는 ‘동성애 행위’, ‘SM 행위’에 무어라 할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둘 이상의 사람이 합의한 해당 행위가 아닌, 예컨대 ‘동성애자’ ‘SMer’와 같은, 사람들의 존재 양식에 대해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일까? 그 태도는 과연 필독이 말하는 바와 같이 ‘똘레랑스’일까? (아, 참고로 똘레랑스는 인내가 아니라 ‘관용’이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당신은 히로히토인가?)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주장하는 차별 없는 사회란, 당연히 내가 하는 섹스에 대한 지탄 없는 사회라기보단 내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사회이다.

필독은 성소수자들이 원하는 사회 형태를 자기 맘대로 재단해가면서, 오히려 이에 대한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대하고 있다.


에세머들한텐 그냥 이 태도면 된다. 더 이상 바라지도 않고. 아, 가학/지배 - 피학/복종 성향인 게 무슨 특권 유전자를 가진 양 착각하는 에세머들도 있다. 그리고 BDSM을 종교나 철학처럼 추상적으로 떠 받드는 그룹도 있다. 즉 자기애(愛)가 적정선을 넘은 나머지 에셈 취향과 일반적 취향을 동등하게 보는 게 아니라 아예 에셈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건데...

- 위의 글, 이어서


SMer 중 '특권 유전자를 가진 양 착각하는 에세머'로 표현된 이들의 주장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 내가 아는 성소수자들 중에서도 자신의 성적 실현에 대한 자긍심을 품고 살아가는 '게이 프라이드'를 적극 권하는 사람이나, 혹은 남성-여성의 성차와 레즈비언의 소수자성을 민감하게 통찰한 (정치적) 레즈비어니스트도 있다. 혹은 시스젠더-이성애자[각주:2]인 당신 또한 어떤 의미에선 퀴어할 수 있다는 퀴어 이론가들이 있다. 이들은 필독의 기준에서는 '퀴어함을 종교나 철학처럼 추상적으로 떠 받'든다고 표현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자기애가 아예 개입되지 않았을 수는 없겠지만, 자기애는 그 정도로 말살되어야 할까? 앞의 사례들은 오히려, 자기애의 왜곡된 발현이라기보단 억압적 사회에서의 방어기제와 생존전략일 때도 있고, 치밀한 논리적 사고의 결과인 경우도 있었다. SM세계의 ‘그룹’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나 이 또한 주장되는 맥락의 탈각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설령 삐뚫어진 자기애일지라도, 우린 그러한 주장에서 이런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 지금의 사회는 충분히 성소수자 친화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소수자에게 어떠한 병리적인 현상이 발생한다면 이는 충분히 그 개인 이상으로, 우리에게 함의를 가진다.



그리고, 마침내 아웃팅에 관하여. 가장 고약한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역시나 별 재미는 없지만 조금만 필독의 글을 보도록 하자.


에세머임이 드러난 고은태씨. 커밍아웃을 (당)하는 방식 중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케이스이지만, 에세머들은 이럴 때 무척 재미있어한다. 사실 에세머가 바닐라(일반적인 성적 취향자를 이렇게 부른다.)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적절한 비유일진 모르지만... ‘필독미남조’라는 어떤 새가 국내에 자생하는 걸 뻔히 알고 있던 조류학자가 있다고 치자. 이 학자는 모종의 이유로 필독미남조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이게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세상이 떠들썩해지고 방송팀이 출동하고 리포터가 상기된 목소리로 보도하는 걸 보고 있으면 꽤 흥미롭지 않겠는가. 느긋한 구경거리랄까, 여유와 결합된 묘한 즐거움이 느껴지는 거다.

물론 에세머들은 ‘바닐라’들이 자신들의 취향을 얼마나 역겨워하는지 익히 알기에, 고은태처럼 아닌 밤중에 커밍아웃으로 워프한 이가 인간쓰레기로 매장되는 모습을 봐도 별 감정 없다. 슬프거나 비참한 건 어불성설이고, 안쓰럽긴 하지만 어쩐지 재밌기도 하다. 다 안다, 에세머 니네 이 사건 보면서 속으로 한 번 쯤은 웃는 거.


- 위의 글


커밍아웃을 당한다는 묘사는 ACT UP에서 분화된 과격 퀴어 운동 단체인 Queer Nation이 아웃팅 운동을 수행하였던 시대, 즉 아직 커밍아웃과 아웃팅의 개념이 미분화되었던 시기라면 모를까 지금은 이미 적절하지 않은 어휘 사용이다. 여러 차례 설명된 바와 같이 고은태가 당하였다고 필독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웃팅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한 번 짚어보자. 고은태가 당한 것은 아웃팅일까? 그리고 그것은 전세계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그러하듯 비난받고 재발해서는 안 될 일일까? 커밍아웃과 아웃팅은 모두,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음으로서 발생하는 상황이다. 과연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을 통해 보건대 고은태는 확고한 SMer로의 정체성을 가진 멜돔이라 할 수 있을까?

많은 정황이 고은태가 자신의 SMer로의 정체성을 확립한 멜돔과는 달리 상대를 찾고, 그 상대에게 의사를 타진하는 데에 미숙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은태가 평소 DS 경험이 일천한 돔이라는 걸 뜻할 수도 있고, 아니면 포르노그라피 등을 통해 발현된 호기심을 주변의 여성에게 시험해본 성폭력범이라는 사실을 뜻할 수도 있다. 그 중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을 아웃팅이라고 최광의로 정의한다 할지라도, 그 비밀을 확증할 수 없는 상태로 두는 것이 아웃팅이 될 수 있을까? 피해자의 고발은 ‘고은태는 SMer이다’와 같은 형태가 아니라, ‘고은태는 나에게 이러저러한 행위를 강요했다’의 형태였다. 이는 적어도 고은태의 SM 취향에 대한 확증 있는 폭로는 아닌 셈이다. 그 실례로, 이번 사건 관련하여 보도된 자료를 부모님께 보여드렸을 때 가장 먼저 나온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그 교수 참, 야한 동영상 많이 봤나 보구만.”



그리고 설령 아웃팅이라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연락하겠다는 등의 뻘소리를 작렬한 고은태를 제재하는 방법 중 이와 같은 폭로의 순기능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면, 역시나 아웃팅이 합리화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성폭력의 해결에 폭로라는 방법이 ‘적절’하다는 가정 하의 이야기지만, 성적 실현의 방법으로 나를 부르는 것이 멸칭이 될 수 없다면 아웃팅이 그토록 막아야 할 최악의 사태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실상 내 생활에 많은 불편을 불러오는 이상, 커밍아웃의 기반을 닦을 때까진 없었으면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애초에 커밍아웃과 아웃팅이 이 글에 등장해야 할 이유를 별로 찾진 못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웃팅을 당한 성소수자를 보고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 비웃을 수 있다는 서술은 사실을 잘 모르거나, 악의적으로 왜곡하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한다. ‘필독멍청미남조’의 존재를 알던 조류학자는 그 새가 아니다. 새들이 생각할 수 있다면 이제 자기 서식지가 짓밟히지나 않을까 걱정할 것이고, 발견되어 포획된 새의 안위를 걱정할 것이다.

필독은 글을 통해서 자신이 SM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잘 모르는 부외자이거나, 아니면 그 분위기를 나쁜 쪽으로 왜곡하여 SMer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형성할 의도가 있었다는 것 중 적어도 하나를 ‘커밍아웃’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본인의 주장을 본인에게 적용해보진 않은 모양이다. 필독은 본인 의사에 반해 성적 실현 방법이 폭로된 사람을 보며 비열한 즐거움을 느끼나 보다. 우린 보통 이러한 사람들을 공감능력이 결여된 소시오패스 같다고 부른다.

물론 자기 자신의 성격적 결함을 소속 준거집단의 특성으로 뒤집어씌울 수 있을 정도로 집단을 의식하는 걸로 보아 필독은 소시오패스는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SMer와 철천지 원수 사이인 가보다. 이젠 진실이 좀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 외 본인도 SMer라면서, 그리고 이 상황을 아웃팅에 준하는 상황으로 파악하였으면서도 굳이 고은태의 잘 나온 사진 한 장을 떡하니 박아 놓은 점 등을 보면 다시 필독은 SM 커뮤니티와 어떤 사이일까 궁금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점에 특별히 관심이 더 가진 않는다. 모든 성소수자가 자신의 소속 커뮤니티에 대해,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합리적이고 온정적인 관점을 가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필독의 글에서 계속적으로 드러나는 그림자-감성, 혹은 시스젠더-이성애자들로 이루어진 정상 사회가 존재하고 성소수자들의 사회를 그 하층에 있는 게토로 파악하는 관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사실 좀 신기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달리는 장군님왕부치 언니, 퀴어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는 패러디인데, 그리하여 동성애가 모방한 것처럼 보이는 이성애에 여러 원본-복사본에 관한 철학 이론을 도입하였을 때 사실상 이성애 또한 하나의 복사본일 뿐임을 설명해내고서 이런 관점은 심지어 이성애자 먹물들 사이에서도 설 자리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버틀러를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말로써 설명할 필요를 느낀 어떤 성소수자가 저런 관점을 여전히 택하고 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닌 말로, 지금 이게 쌍팔년도 이태원 주말 새벽 두 시 말싸움도 아니고 말이다. 아니다, 그것도 이 따위 글보단 수준 높았을 것 같다.



필독과 딴지가 커밍아웃이란 이름으로 유사-아웃팅을 호명하고, 심지어 아웃팅도 아니고 커밍아웃도 아닌 것을 굳이 그리 포장해가며, 굳이 SM에 관한 자신의 왜곡된 관념을 자극적 필치로 다루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이 글을 다 쓴 지금도 모르겠다. 아니 정말로 모르겠다.

항상 그렇지만 나 또한 짚지 못한 맥락과 오독에 관한 지적은 항상 환영한다. Homo Surplus는 딴지와 같이 지적 DS(intellectual DS)를 즐기진 않기 때문이다.


  1. 이는 커밍아웃과 아웃팅이라는 기표에서 시작한,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글이 될 것이지만 SM에 관한 글이기도 하다. 섹슈얼리티의 범위를 획정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유비추론은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SMer는 성소수자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감히 결론을 내릴 수야 없을 것이다. 게일 러빈이 이미 80년대 초에 제기한, 페미니즘이 탐지하는 성차와 억압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섹슈얼리티로부터 시작한 독립된 사유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가에 관한 질문은 이미 SM의 성소수자성과 같은 문제는 초월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의문이 있고, 답이 필요하다면 그 출발점을 표지하기 위한 자그마한 시도로 우선 논의를 연다. [본문으로]
  2. 시스젠더=트랜스가 아닌, 그리고 이성애자. 트랜스-이성애자, 트랜스-동성애자 등의 조합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점에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해보도록 하자. [본문으로]
Posted by M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