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공간에서 소란이 이는 곳엔 언제나 정치가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그만큼 자극적이고 폭발력이 강한 건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가끔씩 정치적 이슈가 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가운 마음보다 근심이 한 걸음 앞선다.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나 이슈를 소재로 했다는 이유만으로 대개의 영화들이 극장에 걸리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본 영화치고는 맥아리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 고정된 자세로 스크린을 가만히 응시하거나 또는 눈을 내리감는 선택지밖에 고를 수 없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자기 자신과 반하는 무엇인가를 장시간 견뎌내는 일에 그리 적합하지 않다. 산제이 릴라 반살리의 영화 <청원 Guzaarish, 2010>에선 주인공이 판사에게 안락사를 허하는 판결을 구하며 자신이 가진 전신불구를 사지멀쩡한 남자가 좁은 상자에 팔다리를 구겨넣어 갇힌 채로 수십 년을 버텨야 하는상황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스크린이 앞에 놓여져 있단 사실만 제외하면 영화관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상이 나오는 스크린이 있어 영화관은 고통의 공간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각자마다 그 고통의 근원은 다르기 마련이라 틀에 박힌 로맨틱 코미디가 그 대상일 수도, 혐오감을 저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올리는 피칠갑투성이의 공포영화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또한 정치적 견해가 다른 영화일 수도 있는 모양이다. 바로 오늘 개봉하는,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지슬 끝나지 않는 세월2>은 민감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만의 고유한 지역성을 띤 시각으로 이야기를 서술함으로써 정치적 소재가 가지고 있는 양날을 전부 무화시키고 있는 놀라운 영화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이 시작하자마자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흑백의 색감과 풍부한 질감 속에서 표현된 굳게 닫힌 장지문이다. 이윽고 장지문이 열리며 카메라는 미끄러지듯이 집 안으로 들어가 먼지가 켜켜이 쌓인 마룻바닥에 나뒹구는 제기들과 무기질적인 인형처럼 가구 위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시체가 공존하는 다소 비현실적인 정경을 잡는다. 최근까지 나온 한국영화 중에서 화사로움을 전부 털어낸 이 흑백영화는 영화 <지슬>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지슬>에는 탈락되어 있는 다양한 색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은 총천연색으로 표현되는, 더욱 현실감이 드는 세계를 결국 무의식적으로 찾아나서게 된다. 흑백으로 구성된 <지슬>은 자신 바깥으로 실제 같은 현실계를 구축함으로써 스스로를 더욱 비현실적인 세계로 밀어넣고 그곳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지슬>을 흑백으로 옮긴 기법은 영화의 신비로움과 비현실성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하게 치솟을 수 있는 감정을 조율한다.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현실의 색들을 부여받았을 때 가상과 현실과의 거리는 수축되고 그 사건들은 영화에서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더욱 돌출되기 쉽다. 그리하여 색깔을 부여받았더라면 영화에서 발생하는 매 사건마다 강조되는 비극성으로 인해 찰나의 슬픔과 분노로 휘발되었을 감정들은 흑백의 필터를 통해 영화 안으로 수렴되어 마지막까지 시종일관되게 정서의 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국가의 압제적인 폭력 앞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제주사람들이 더욱 안타까워 보이는 덴 영화 군데군데 머리를 내밀고 있는,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휴머니즘과 삶이 가지고 있는 절절한 감각들 덕분이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 밑에서 벌거벗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청년이 겪는 매서운 추위, 동굴 안으로 깊이 숨어들어 칡뿌리 하나를 아쉬워하고 작은 감자 하나에도 크게 기뻐하며 먹는 마을사람들의 배고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군인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좁은 동굴 안에서 매운 고추를 태우면서 거기서 나는 연기에 매운 눈물을 흘리는 마을사람의 통증은 영화관 안에서 모든 감각과 격리되어 있는 관객들을 엄습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빨갱이 하나도 못잡는다면서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던 군인이 결국 이를 만회할 기회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총을 쏘지 못하고 내려놓는 장면,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살하지 못한 여자가 사로잡혀 어떤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더라도 끝내 살아남는 게 좋다는 그의 말에서, 차마 일제강점기의 앙금이 채 가라앉지 않은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용서가 오고가는 움푹 패인 구덩이에서, 어떻게 생명을 함부로 죽이냐며 부상당한 군인을 죽이지 못하고 동굴로 데려와 같이 지내는 마을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극한의 휴머니즘은 그들에게 가혹하고 잔인할 따름인 비극의 땅에서 도리어 선명하게 피어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애틋하게 만든다.

영화 <지슬>에서 슬픔은 결코 눈앞에 과하게 전시되는 법이 없다.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집에 남겨놓고 피난 온 아들은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가게 되지만 남겨진 것은 불타다 남은 집의 잔재들과 시신, 그리고 감자 몇 알뿐이다. 집의 불타고 남은 잔재들과 나뒹구는 감자들만을 하나하나 옆으로 천천히 훑는 카메라는 현장에서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는 노모의 시신을 담길 거부한다. 대신 끊어질 듯하면서 끊어지지 않는 통곡소리가 어느새 멈추고 마을사람들이 피난한 동굴로 돌아와 노모의 소재를 묻는 이들에게 그저 침묵으로 일관한 채 구석에서 주저앉아버리는 아들과 노모의 시신 근처에 있었을 감자가 분명한 것들을 나누어먹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비로소 그 비극이 본디 가지고 있었을 슬픔은 더디지만 더욱 강렬하게 그 사이를 메운다. 이 침묵은 <지슬>에서 일회성으로 그저 소모되지 않고 되풀이되어 활용된다. 남몰래 연모하던 소녀의 처참한 죽음을 목도한 청년은 아무에게 이를 말하지 못하고 슬픔을 내면에 꾹꾹 눌러 담다가도 이내 이겨내지 못하고 산등성이 위를 달려간다. 어둠 속에서 그 위를 달려가는 청년의 질주는 익스트림 롱쇼트로 포획된다. 그들이 달려가는 언덕의 등선은 어느새 나신을 드러낸 여자-청년이 연모하던 그 소녀의 시체일 가능성이 높다-의 신체로 화한다. 이 익스트림 롱쇼트는 가히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 <히든 Hidden, 2005>에서 그려낸 마지막 장면, 고아원에 가기 싫다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다 결국 어른들에게 끌려가고 마는 한 어린아이의 절망적인 발버둥이 인물이 점으로 보일 정도로 먼 거리에서 관찰되었던 것과 비견될 만하다. 비극성을 찾아내 클로즈업 기법으로 관객의 눈에 들이대지 않아도, 익스트림 롱쇼트의 아득히 먼 거리에서도 슬픔이 선명함을 유지한 채로 이 곳에 도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현장에서 존재했을 슬픔의 농도와 크기를 미루어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학살이라는 단어로 압축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는, 민감하고 폭발력이 강한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지슬>은 그리 폭발적인 영화가 아니다. 비슷한 류의 사건을 다룬 <화려한 휴가, 2007>와 비교해보았을 때 <지슬>에서 슬픔의 정서는 극도로 정제되어 있어 예스러움마저 느껴진다. 이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흑백의 색료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표현된 영상 안에서 감정들의 숨이 점차 재워진 탓도 있고 이 영화가 이야기를 엮어내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형식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의의 각 단계가 의미하는 바와 <지슬>의 이야기가 조응하면서 감정은 결코 단번에 격발되는 법이 없고 그저 긴 호흡을 유지하며 신위-신묘-음복-소지에 따라 조율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중후반부에 속하는 음복과 소지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관여하며 그 안에서 장악력을 충분하게 가지는 반면에 전반부인 신위와 신묘는 다소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국 영화 안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을 불러들임으로써 <지슬>의 목적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 영화는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있었던 비극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관객에게 드러내고, 고발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그 비극의 현장을 더듬으며 그들을 위로하는 데 있다. 제주도 방언과 제주도만이 갖는 지역성을 온연하게 표현해낸 건 <지슬>의 탁월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이전에도 방언이 한국영화에서 활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용례는 항상 <황산벌, 2003> 주위를 맴돌 뿐 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지슬>에서도 해학적인 수단으로 이따금씩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 <지슬>에서만큼은 표준어가 거할 곳은 자막이 위치한 영상 하단뿐으로 옥신각신하며 한바탕 만담이 펼쳐지든, 목전에 닥친 위험으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형세에서든 마을 사람들의 입에선 “~수꽝?”로 끝나는 토속적인 언어가 흘러다닌다. 여기서 중심소재로 다뤄지는 4.3사건만큼이나 중요한 키워드가 제주도라는 걸 생각해볼 때 제주도의 토속적인 언어가 <지슬>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서 등장하고 인물들의 입 속에 오르내림으로써 이 영화가 갖는 뛰어난 향토성은 강화된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감자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인 지슬4.3사건에 밀착되어 무거리에 위치한 단어이다. 빨갱이를 잡지 못해 밥을 먹지 못하는 군인을 걱정하며 동료는 그에게 지슬을 건냈고 군인들에게 험한 꼴을 당한 순이를 위로하기 위해 박 일병이 가져간 것 또한 지슬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집에 홀로 두고 불편한 마음으로 피난길에 나서는 부부에게도 지슬은 귀찮아질 정도로 끈덕진 데가 있던 노모의 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아니었던가. ‘음복의 장에서 지슬은 더할 나위 없이 가장 중요한 사물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노모를 모셔가기 위해 집으로 다시 돌아온 아들은 집의 잔해와 노모의 시신을 발견하고 망연자실하다가 그 주위에 나뒹구는 지슬들을 거둬 동굴로 돌아간다. 그리고 노모의 안부를 묻는 말엔 입을 굳게 다문 채 마을사람들과 지슬을 나눠먹는데 이는 그 사건이 속하는 음복파트-제사를 마치고 참석했던 사람들이 신에게 올렸던 술이나 제물을 나누어먹음-과 정확히 일치한다.

영화 <지슬>과 동일하게 제주도 4.3사건을 소재로 한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순이아지망은 죽어도 발쎼 죽을 사람이여. 밭을 에워사고 베락같이 총질해댔는디 그 아지망만 살 한점 안상하고 살아났으니 참으로 신통한 일이랐쥬.”

아매도 사격 직전에 기절해연 쓰러진 모양입니다. 깨난 보니 자기 우에 죽은 사람이 여럿이 포개져 덮연 있었댄 허는 걸 보민...그때 발쎼 그 아지망은 정신이 어긋나버린 거라 마씸.“하고 작은 당숙어른이 말을 받았다.

해필 그 밭이 순이아지망네 밭이었으니.” “그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되연 이듬해엔 감저농사는 참 잘되어서. 감저가 목침덩어리만씩 큼직큼직해시니까.”

그핸 숭년이라, 보릿겨범벅 먹던 때랐지만 그 아지망네 밭에서 난 감저는 사름 죽은 밭엣 거라고 사름들이 사먹질 안했쥬.”

그 잔인했던 시절 이후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 더 이상 목침만한 감저와 지슬은 나오지 않지만 매 해마다 때가 돌아오면 감저와 지슬 역시 성근 알맹이를 계속 맺는다. 비록 그때처럼 갓 갈아나온 것 마냥 선명하고 날카로운 날이 있어 한밤중에 소스라쳐 놀라 일어날 정도는 아니지만, 아직도 제주도의 땅과 동굴,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건을 삭이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있다. 소설 <순이삼촌>의 감저와 영화 <지슬>의 지슬이 가리키는 대상이 서로 다르면 그게 또 어떻단 말인가, 무고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래로 똑같이 그 땅에서 자라나고 크는 것들인데. 동일한 사건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분유하고 있어 결국 4.3사건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물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감저와 지슬은 동일하다.

다만 <순이삼촌>에서 비록 흉년이라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잡아가면서도 한사코 사람들은 큼지막한 감저를 보기만 하고 사먹지 않았다. 그 풍성하게 성근 감저는 시체를 거름삼아 자란 것들이라 이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4.3사건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대면하고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먹는 건 더욱 지난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지슬>에서 아들이 군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노모의 시신 근처에 나뒹굴고 있었던 감자들을 가져와 마을 사람들과 나눠먹음으로써 음복의 예를 취한 부분의 이야기와 대조되는 일이기도 하다. <지슬>의 감독 오멸이 신묘-신위-음복-소지의 형식을 갖춰가면서 4.3사건을 직시한 이유도 분명, 특히 음복을 통해서 비극성의 총체인 지슬(또는 감저)를 마주하기를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제의형식를 차용하여 사실상 그 앞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이를 극복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노모를 잃은 아들이 지슬을 가져가 모두와 나눠먹음으로써 그 비극을 견뎌내었던 것처럼 감독은 <지슬>을 통해 그날의 기억을 제주사람들과 자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과 나누길 희망했을 것이다.

이제 영화 <지슬>이 자신 안에 갈무리한 아픈 기억들을 모든 사람과 나누기 위해 찾아온다. 이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제주만의 토속적인 언어와, 그 사건에서만큼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이해도와 성취동기를 가진 제주사람들을 배우로 하고 제주의 풍광을 병풍 삼아 진혼제를 올리기 위해 반드시 올 것이다, <지슬>.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