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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30 건축에 관한 무언가5. 서울의 궁궐들 5궁 (中) 9


안녕하세요 te verde입니다. 제가 요즘 게을러터져서 정말 글 쓰기가 힘드네요(...)

    저의 교양을 뽐내기 위해서 시작된 조선의 5궁. 하 편을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하려고 했는데 분량조절 실패로 이번 편은 중으로 갑니다. 다음편에 마무리할게요. 분량조절에 실패하는 이말년작가가 떠오르면서 이해가 가네요 ㅠㅠㅠㅠ  근데 5궁사는 제가 쓰면서도 정말 재미가 없는듯. 다음부턴 그냥 어그로 끄는 저질글이나 쓰려구요. 

1.조선 전기의 5궁

<수선전도 김정호作 1840년>

    저번 시간에 조선의 5궁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이라고 것을 기억하심미까. 기억 못하시더라도 한국의 현대 교양인이면 대충 알아두세요. (교양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런데 이 5궁이 모두 같이 있던 시기는 역사상 별로 없습니다.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춘 채로 5궁이 모두 존재했던 적은 고종 이후 40년 정도...?[각주:1]

Q. '구라치지마. 어디서 약을팔아'

A. '아...아닙니다 ㅠㅠㅠ 뻥 아니라구요'

     그러면 한번 쭊쭊쭊 살펴보세요, 뻥인지 아닌지 ㅠ.

2. 조선 건국초기 (태조~ 세조까지)

14세기

<조선의 아빠. 태조 이성계>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새 나라를 세웁니다. 근데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그대로 ‘고려’로 하고 수도도 개경으로 삼았지요. 그런데 왕씨 고려출신의 귀족들이 떽떽(응..? 떽떽?////) 거려서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한양을 새 수도로 정하고, 왕궁터를 골라 1394년 12월 착공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10개월 뒤 1395년 9월에 경복궁이 1차 개관을 합니다. (1395년 경북궁 준공) 1차 개관이라고 쓴 이유는 창건 당시 경복궁의 전각은 390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조 시절부터 꾸준히 증축을 거듭해 임진왜란 이전에는 수 천 칸에 이르게 되지요.)


15세기

    태조-정종-태종, 즉 세종 이전까지 이 세 왕들은 한양과 개경을 자꾸 스위칭하면서 수도로 사용했습니다. 천도할 때마다 짐싸느라 등골빠졌을 신하들이 너무 불쌍하네요... 먼저 정종이 1398년 즉위하면서 개경으로 다시 환도합니다. 덕분에 경복궁은 근정전에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을 정도로 황량해짐. ㄱ-.... [각주:2] 

    이후, 형인 정종한테서 왕위를 물려받는 태종이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를 합니다.  그런데 태종은 경복궁으로 환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1398년 ‘1차 왕자의 난'때 자신이 직접 동생들과 신하들을 쳐 죽인 곳이 경복궁이거든요. 지가 칼부림해서 피뿌린 곳에서 살면 찝찝하겠어요? 안 찝찝하겠어요?  그래서 1404년에 미리 신하를 보내서 이궁을 짓게 하고 한양으로 옮깁니다. 이 이궁이 창덕궁이지요. (1405년 창덕궁 준공)

    경복궁이 찝찝해서 창덕궁 짓고 살기는 하지만, 경복궁에도 꾸준히 건물을 지어올립니다. 월세로 경복궁 빌려줄 것도 아니고, 뭐하러 꾸역꾸역 건물 채워넣었는지는 모르지만... -실은 아들한테 물려주려고 그랬지요♡ 상속 재테크 쩌는 태종님- 당시 황량했던 한양성을 생각하면 궁궐이라도 지어서 채워나야 간지가 나고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들인 세종한테 양위를 합니다.(1418년, 이 해 2월 태종은 미리 경복궁으로 이사를 옵니다.) 세종은 근정전에서 즉위를 하고 그곳에서 사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 해 9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아빠인 태종을 위해 새로 지은 수강궁(현재의 창경궁)옆에서 아빠랑 같이 살고 싶어서염 뿌우- ‘충녕이의 막내근성'  아버지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수강궁-창경궁의 전신- 1418년 준공) 하지만 상왕 태종은 수강궁에만 살지 않고, 나중에 연화방 신궁(연화방이란 종로1동, 서초2동 과 같은 구역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종묘 근처임) 을 또 지어서 나중에 거기서 임종을 맞이하지요.

     태종이 사망한 후, 세종은 경복궁으로 다시 거처를 옮기고 국사를 살핍니다. 그리고 세종 이후 단종까지 조선 정치의 주 무대는 경복궁이 되지요. 세종 때가 되서야 경복궁에서 임금이 제대로 거주했기 때문에, 세종시절에 많은 전각과 회랑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근데 단종이 숙부인 세조한테 왕위를 뜯기죠. 세조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단종한테 양위 받은 후 근정전으로 이동해서 바로 즉위식을 거행합니다. (참고로 경회루와 근정전의 거리는 보도 1분...) 이후 단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저 멀리 강원도 영월까지 쫓겨갔다가 사약먹고 사망 ㅠㅠㅠ. 하지만 세조는 경복궁에서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런데 죄의식 때문인지 노년에는 각종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수강궁(창경궁)에서 사망.  아들 예종은 수강궁에서 대충 아빠인 세조한테 양위받고 비실비실 살다가 2년 뒤에 경복궁에서 죽습니다.

3. 미소년 연산군찡의 파라다이스

     그리고 우리 마초임금 성종 즉위. (1469년) 성종은 연산군의 아빠죠. 훌륭한 임금이지만 사치스러운거 꽤나 좋아했던 임금입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경복궁 경회루를 청자기와로 덮으려다가, 신하들의 강력 반발로 포기하고 경회루 기둥에 용조각만 새겼슴(응?) 

    성종은 즉위 이후에 왕실의 여러 할머니, 아줌마들 어른들을 모시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러나 국가의 주요행사는 꼬박꼬박 경복궁에서 실시했고, 나중에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지요. 성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세 명의 할머니들 왕실 어른들을 수강궁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1483년 수강궁을 증축하면서 이름을 창경궁으로 고쳐 짓습니다. (1483년 수강궁이 창경궁으로 개칭) 

    이후 조선 환락의 아이콘 연산군이 등극합니다. 연산군의 묘사는 허리 가늘고, 키 크고, 피부 하얗고... 여리여리 미소년이네요 핡...[각주:3] [각주:4] 

<왕의남자에서 연산군이었던 정진영씨. 잘생기셨지만... 아.. 아냐 이런 얼굴이 아니라구!! ㅠㅠㅠ>


<이런 용안이셨겠지....♡>

     연산군은 경복궁을 자신의 즐거운 할렘으로 만드는데 주저함이 없었죠. 특히 경회루에서 사치를 즐겼는데요, 잠시 옆길로 새서 연산군 당시 경회루의 모습을 한 번 읊어보겠습니다.

     경회루 위에서 보이는 위치에 인공섬인 만세산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위에 위에 봉래, 벽운궁, 일궁, 월궁 등의 신선 세계를 표현한 여러 건물을 지어 각종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을 하죠. 그 안에서는 흥청(기생)[각주:5]들이 음악을 연주하게 해, BGM을 깔도록 했습니다.  경회루의 못 위에는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고 등을 띄웁니다. 그리고 화려한 용주(龍舟)를  연못에 띄워서 그 사이를 오가며 뱃놀이를 즐기구요.  

     동시에 경회루 주변에다가는 기러기와 같은 각종 새들을 길러 새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도록합니다.각종 물자절약을 하면서도 새 먹이는 줄이지 말라 지시를 내렸지요. [각주:6]

    경회루 아래 층에서는 전국에서 엄선한 천과흥청(天科興靑 - 최고 등급의 기생)들과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합니다. 위층인 경회루 본전에는 당연히 비단과 구슬장식으로 도배를 해 놓았고, 연극을 할 수 있는 무대인 채봉이 있으며, 연산군은 즐거운 Party time. 


아아아... 이것이야 말로 임금만이 할 수 있는 돈 지랄... 부럽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후, 경복궁은 경회루와 강녕전 등에 있던 화려한 설치물들이 모두 철거되고 다시 성종 때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4. 연산군 이후. 효자돋는 인종 

    중종 38년 (1543년)에 경복궁에 큰 불이 나서 동궁(세자궁)이 다 탑니다. 이 화재는 중종의 부인인 문정왕후(The bitch)가 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당시 세자였던 인종은 문정왕후의 소생이 아닌 전 부인 장경왕후 윤씨(사망했습니다.)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어린 아들(훗날 명종)이 왕위를 차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세자(인종)를 없애기 위해서 세자궁에 불을 지른 것이지요. 근데 이 인종이 엄청난 효자ㄱ-..... 

    인종은 생모인 장경왕후 윤씨가 죽은 후, 새 왕비가 된 문정왕후를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셨습니다. 세자궁 화재 당시 문정왕후가 이미 자신을 죽이기 위해 꾸민 일인 것을 알고는 ‘어머니가 나를 이토록 싫어하시니 자식으로서 죽는게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 라는 심정으로 불난 동궁에서 타죽으려고 그냥 버팀ㅠㅠㅠㅠ 그런데 그 때, 밖에서 자신을 찾는 아버지(중종)의 목소리를 듣고는 ‘이렇게 죽으면 아버지께 불효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뛰어나가 목숨을 건졌다고 전해지지요.  

    암튼 그렇게 경복궁의 세자궁은 한 번 홀라당 탑니다. 이후 중종 사망후 인종이 즉위합니다만, 계모인 문정왕후의 등쌀에 못이겨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고(문정왕후는 참 독한년인듯...), 문정왕후의 친자인 명종이 즉위합니다. 근데 명종 8년(1553년) 경복궁에 대화재가 발생해 근정전, 경회루만을 남기고 주요 침전, 업무공간들이 다 타립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조선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국가 (뻥 아님)

 

   거의 전소되버린 경복궁을 1년 만인 1554년에 대부분 복구합니다. 19세기 후반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하고서 나라 뿌리가 흔들렸던거 생각하면 16세기 임진왜란 전 조선은 정말 잘 살았던 나라 같다능... 아무튼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양에는 5궁 중에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존재하는 상태였습니다. 고로 경희궁과 경운궁(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진 궁궐이죠.

 헉헉....... 조선의 5궁 중편 여기서 마칩니다. 잘 읽었으면 뷰온 좀 눌러주시긔

세줄요약

1. 창경궁은 원래 실버타운(...)

2. 연산군의 주색잡기, 환락의 페스티발 장소는 경복궁 경회루였슴.

3.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만 있었슴

전편 건축에 관한 무언가4. 서울의 궁궐들 5궁 (上)  읽고 싶지 않으십니까. 않으면 말고, 쳇.


참고문헌


조선왕조 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1. 1592년 임진왜란때 타버린 경복궁은 1872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기까지 약 300년 간 빈 터로 남아있었습니다. [본문으로]
  2. 정종 1권 1년 2월 23일 (갑자) 1번째기사 / 까치가 근정전 망새에 집을 지다 정종 1권 1년 3월 4일 (을해) 1번째기사 / 까치가 근정전 취두에 깃들다 정종 2권 1년 8월 8일 (을사) 1번째기사 / 부엉이가 신도의 근정전과 태묘 옆에서 울다 정종 2권 1년 8월 10일 (정미) 1번째기사 / 산올빼미가 신도의 근정전 위에서 울다 정종 2권 1년 8월 15일 (임자) 1번째기사 / 부엉이가 솔개에 쫓겨 근정전 위에 와서 모이자 중들을 모아서 기양하다 [본문으로]
  3. : 이덕형의 문집 ‘죽창한화'에는 연산군을 본 노인의 증언이 있습니다. ‘연산군은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었으며, 수염은 적고, 눈이 충혈되어 붉은기가 돌았다.’ [본문으로]
  4. 연산 52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2월 7일(기해) 의금부(義禁府)의 종 팽손(彭孫)이 고하기를, “전라도 부안현(扶安縣) 기병(騎兵) 최중손(崔仲孫)의 이웃집 사람 김수명(金守明)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번 번(番)들러 올라왔을 때 인정전(仁政殿)에서 시위(侍衛)하며, 위에서 명(明)나라 사신 접견하는 예절을 보니, 명나라 사신은 우뚝 서서 잠시 읍만 하고 주상께서는 몸을 굽혀 예하는데, 허리와 몸이 매우 가늘어 그다지 웅장하고 위대하지 못하더라. [본문으로]
  5. 흥청망청의 유래가 연산군의 엄선한 기생들을 이르는 말인 '흥청'입니다. [본문으로]
  6. 연산 33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4월 18일(정미) 장원서 제조(掌苑署提調) 풍원위(豊原尉) 임숭재(任崇載)가 아뢰기를, “경회루 못에 기르던 야안(野雁)을 일찍이 모화관 못으로 옮겨서 기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요곡(料穀)을 주어야 하나, 지금 모든 물품을 절감할 때에 아울러 절감하여 야안들이 날로 야위어져서 번식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감히 취품(取稟)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마땅히 구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본문으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