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랜만에 쓰는 글이네요.
제가 요새 정신사나운일이 좀 많이 있었어서요. 그간 블로그에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도 못 정하고 공부도 못해서...그냥 멤버들 눈치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이런 상황이 여전할 것 같아서, 일단 그냥 개인적인 글을 쓰려고 합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한 생각일 뿐이고, 특정 종교를 비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들어오는 싸움 거절하진 않ㅇ(읍읍).
지금에야 신앙심이라고 할만한 것이 흔적기관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지만, 여렸을 적에는 꽤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을 믿으시는 두 분 부모님에 의해 영아세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토요일마다 미사를 다니던 꼬맹이였으니 말이다. 어릴 적, 가장 선명히 기억 남는 기억 중 하나가 헌금하라고 주신 천원 중 500원은 삥땅치고 나머지 500원만 헌금 낸걸 걸려서 죽어라 맞았던 기억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그 당시에는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 따라 들어간 성가대 때문에 매주 성당을 나가기도 했고, 꽤나 열심이었던 기억도 난다. 물론 지금 다시 돌아보면 어쩜 그렇게 맹목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지 의아하기만 하지만…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신앙과는 조금씩 동떨어진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어릴 적의 나에게 신앙이란 숨쉬듯 당연한 어떤 것이었고, 오랫동안 주기도문, 사도신경, 성모송으로 이어지는 기도3종세트는 어려운 일이 있거나 또는 공포영화를 보고 잠 못 이루는 밤에 위안을 주던 것들이었다. 지금이야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처럼 긴 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전히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로 시작하는 성모송은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나에게 있어 종교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와 분명 맞물려 있을 테다. 언젠가부터 기독교의 그 공격적인 마케팅 기법이 어린 마음에 반발심이 들기 시작했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그 당시의 나에게 ‘신’이라는 존재는 어떤 형태로든지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었고, 여전히 세계를 설명하는 한 부분으로서의 신앙이라는 것을 깨뜨리는 일은 요원한 일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증가하던 것과는 달리, 종교와 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활발했던 편이었었고, 일원론적인 기독교의 신앙을 벗어나 오히려 범신론적인 무언가를 믿기도 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무신론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해졌다. 무신론자로써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이 한 권 있는데,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이다. 서점에서 무슨 책이 있나 구경 다니다가 뒷걸음에 채인 책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반발심과도 비슷한 마음으로 구입했던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영향만큼은 어쩌면 인생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바꿔버린 터닝포인트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한 가지 이유 주 하나가, 그들의 무식한 진화론 딴지 걸기 때문이기도 한데, 생물학전공자인 도킨스 답게, ‘만들어진 신’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진화론에 입각한 무신론이었다. 한국 대학의 생물학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진화론이 현대생물학의 근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학문적 탐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나 역시, 학부에서의 전공은 생물학이었지만 사실 진화론이라는 학문에 대해 아는 바는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이러한 실정과 맞물려 진화론에 대한 궁금증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개인적인 공부과정은 나를 과학적 무신론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진화론을 공부하면서 궁극적인 의문으로 떠오른 질문은 “만약, 최초의 생명 (혹은 생명과 비슷한 어떤 형태)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면 우주에서 신이라는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있을까?”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내릴 수 있었던 답은, “없다” 였다.
물론 나는 과학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줄 수 있으리라는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학은 증거에 기반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수 많은 현상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으며, 지금까지 잘 작동하여 왔고 그 결과 우리가 세상을 과거와는 달리 더 많은 부분에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증거와 반증에 기반한 과학적 방법론은 과학이라는 학문을 지난 수백 년 동안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 주지 않았던가.
수십 년간 이러한 과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때때로 과학적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미혹되기도 하지만, 그건 그저 내가 아직 모르는 것들이 많아서 이지 어떤 초현실적인 존재의 개입에 대한 가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과학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며, 과학이라는 틀 안에서 증거와 반증에 닫혀있는 신이라는 존재는 그 정당성을 잃고 만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러한 태도는 게이로써의 내 성정체성과 맞물려, 기독교와 기독게이에 대한 내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한때 교류가 있었던 일부 게이들 중에 주말마다 열성적으로 종로 어딘가의 교회를 다니던 분들이 있었다. 종로의 모처에 성소수자를 위한 교회가 있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그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곳의 목사님이 게이 프렌들리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나 추측해볼 따름이다. 하지만, 비록 방금의 예처럼 일부 기독교 단체는 성소수자에게 관대하고 그리고 세계적으로 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하지만, 여전히 주류 기독교 단체 에서 성소수자는 차별과 박해의 대상일 뿐이다.
여기서 나는 의문점이 하나 들게 된다. 기본적으로 종교를 믿는 이유가 마음의 위안을 찾고 어떤 식으로든 구원을 바라는 것이라면, 나를 부정하는 종교에 이처럼 맹목적인 믿음을 쏟을 수 있는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나에게 물리적인 목소리로 “나는 너희들을 차별 없이 사랑한다” 라는 계시를 내려주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신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아!” 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오류와 모순이 그렇게도 많은 성경에서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구글링으로 ‘성경의 모순’을 검색해보세요), 예수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 ‘우리를 차별하는 너희가 예수님의 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예수님이라면 우리를 차별하라고 하지 않으셨을거야!’ 라고 정신승리 하면 내 마음이 편해지는가.
나는 굳이 이 글에서 기독교를 믿는 기독게이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종교라는 것이 개인의 선택이 아닌 집안의 내력으로 믿는 경우가 대다수임을 비춰보았을 때 (물론 누군가는 신앙은 나의 개인적 선택이다 라고 말하고 싶을는지 모르겠으나, 과연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환경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땠을까 라고 반문하고 싶다), 어려서부터 고착화된 어떤 믿음을 탈피하는 것은 고난한 과정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주류과학을 공부하고 과학적 무신론의 세계관에 경도되어 있는 나에게 ‘차라리 믿지 않으면 편할 텐데’ 라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다.
무신론자이자 게이인 나에게 있어서, 비록 종교의 사회적 순기능이 존재함을 부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의 거대한 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를 ‘악’이고 ‘죄’로 단정해 버리고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를 어떻게 ‘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인간의 동정심, 도덕본능 과 같은 것이 분자적 수준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 이 시대에서, 나는 종교가 없다고 하여 갑자기 세상이 아마겟돈의 수렁텅이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굳이 종교적이어야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는 아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종교란 없어져야 할 무언가 이며, 그를 통해 게이로써 나의 권리와 행복이 더욱 증대될 것이라고 생각함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지 모른다. 물론, 비종교인의 호모포빅한 기질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또한, 종교라고 하기 애매한 유교적 가치관이 뿌리깊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만이 성소수자의 차별에 앞장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종교세력의 약화는 우리의 사회적인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한 노력에 분명 큰 일조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바로 얼마 전 대선에서도 우리는 목격하지 않았는가? 두 거대 정당이 기독교계의 입김에 의해 성소수자의 권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 법안의 입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을.
그렇기에 나는 무신론적 사고방식의 확산을 바란다. 단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스스로도 근거를 댈 수 없는 믿음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성적 취향에 정조대를 채우거나 정신승리를 일궈내는 것 보다는, 나 자신의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여 좀 더 명확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좋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언젠가 메코가 이 글에서 언급했던 ‘아웃팅의 낙폭’을 줄이고 우리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것에 일조하리란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도킨스가 말했다.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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