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은 언제나 불안정한 숫자이다. 둘로 나누었을 때 그 꼬리에 나머지를 달고 다니거나 대충 타협을 봐서 15라는 숫자 사이에 있는 좁은 틈을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는 소수점을 견뎌내야 한다. 둘과 하나 또는 하나와 둘. 좀처럼 가시지 않는 비균질적인 덩어리들. 셋이 가지고 있는 찝찝함은 이보다 얼마든지 분명해질 수 있다. 서로에 대해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일대일 관계만을 뜻하게 된 연애와 사랑의 의미, 서사구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선과 악의 대립, 남자와 여자, 테이블에 놓인 마주보는 의자 두 개로 대표되는, 두 사람에 최적화된 삶의 공간들 등의 조합은 우리가 어느새 2에 포위된 채로 살고 있다는 현실을 일깨워 줄 뿐이다. 둘로만 견고하게 조립되어 있는 세계 속에서 셋은 그저 둘이 직조하는 무게균형을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지만 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에너지가 둘을 능가하는 강력함을 가질 시기가 오기도 한다.

 

 

양아체 감독, 계륜미 주연의 <여친남친 Gf*Bf> (2012)은 그 어느 영화보다도 3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그 안에 녹여낸 영화이다.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복잡성은 셋에서 기인한다. 영화 <여친남친>의 외부액자에 해당하는 현재시점에서 리암은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두 딸과 함께 셋이서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는 사회의 정상가족이 아닌 3명으로 구성된 가족들. 두 딸이 학교에서 복장과 관련해서 시위를 일으킨 뒤 학교와 경찰을 내세운 사회가 가정환경과 집안문제를 지적하는 그 손가락 끝에는 그 불안정한 조합이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리암은 공식서류로는 그들의 오빠로 기재되어 있지만 스스로 그들의 아빠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는 기묘한 위치에 있다. 그는 두 딸이,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가정이 비정상이고 문제적이라는 지적을 거부하며 기억을 저 아래로부터 길어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영화 <여친남친>은 전반부부터 셋에서 또 다른 셋으로 선을 그어나간다.

2012년의 세 점으로부터 뻗어나간 선은 1980년대 중반의 세 점으로 내려간다. 대만이 40여 년 동안 군사계엄에 기초하여 사회의 국민당화를 강력하게 시도했던 그 시대의 가운데서 반짝이는 학창시절을 보내는 세 남녀, 리암과 아론, 메이바오가 바로 그 점들이었다. 메이바오는 리암을, 리암은 아론을, 아론은 메이바오를. 세 점은 제각기 다른 한 점과 연결되기 위해 수없이 선을 긋고 있었다. 서로의 빈 곳을 채우는 완벽한 단짝처럼 보였던 메이바오와 리암의 관계가 메이바오는 내 여자친구가 아니야.”라는 말로 그 비어있는 곳이 드러나면서 셋 사이의 기묘한 삼각관계가 맞물려 돌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개인적 욕망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때로는 팽팽한 긴장감을 빚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던 풋풋하고 밀도 높은 청춘의 에너지는 이를 땜질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원하는 대로 욕망이 충족되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땜질은 일시적이다. 메이바오가 리암을 간절히 원하지만 리암이 동성애자이고 그의 마음이 아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상, 리암이 아론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지만 아론의 마음은 이미 메이바오에게 가 있는 한 그들의 이야기는 밝게 명멸하던 과거를 바라기하다가 점차 시들어가는 성년으로 끝나게 될 운명을 피할 수 없는 비극성을 내포하고 있다.

연결되어 직선이 된 두 점과 이에 포함되지 못한 한 점의 관계를 양 감독은 다양한 미장센을 통해 그들의 거리감을 강조함으로서 가시화시킨다. 메이바오는 계곡에서 짖궂은 장난으로 아론을 떼어버리고 리암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만 리암은 이를 부담스러워 하며 밀어낸다. 리암이 떠나고 화면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메이바오를 근거리에서 잡은 다음 다시 롱쇼트로 제시하는 방식은 메이바오와 리암의 심리적 거리를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체험시킨다. 또한 타이페이로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며 메이바오가 연인 아론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 뒤로 지나가는 리암은 마치 생명이 없는 정물처럼 화면에서 배치, 처리된다. 카메라가 메이바오와 아론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앞으로 당김으로써 후경에 있던 리암은 그 형체를 잃고 마치 처음부터 그 공간에 없었던 것처럼 무화된다. 미처 그 둘에 연결되지 못한 하나가 불청객으로서 이질감을 조성하고 있는 장면은 영화 <여친남친> 내내 수없이 반복되는 것 중 하나이다. 아무도 없는 교내에서 아론이 메이바오에게 고백을 하고 꼭 껴안는 그 순간에도 리암은 멀리 떨어져 있는 저 건너편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다. 또는 술자리에서 만취한 채로 리암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간 아론이 리암에게 장난스레 키스를 하는 상황에서는 메이바오가 그 둘로부터 거리를 두고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는 관찰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감독은 그러한 미장센 속에서 단단해지고 두터워지는 관계와 결속 바깥으로 작용하는 배타적인 상황과 그로 인해 소외당하는 한 사람을 거듭 스케치하는 듯이 보인다.

 

 

온통 흰빛으로 가득한 가운데 아론과 메이바오가 사랑을 속삭이며 성애를 나누는 장면은 리암이 그의 동성 연인과 수없이 몸을 겹치는 장면과 뒤섞인 채로 편집된다. 이는 아론과 메이바오, 메이바오와 리암, 리암과 아론이 마치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살짝 열어보인다. 하지만 끝내 이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현실과 충돌하게 되면서 그 이면에 품고 있는 절망을 포함하고 있다. 거듭 되풀이되는 이대로 계속 꼭 껴안고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대사와 너를 강뚝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서라는 노래가 그 대사를 나누는 인물들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 마모되어 가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되는 것도 꽤나 흥미롭다. 그 대사와 노래가 환기될 때마다 그들이 처음 의미하던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현재의 마모되고 연소된 모습과 부딪치며 빚어내는 안타까움을 더한다. 다행히도 영화 <여친남친>은 그 비극적인 결말 속에서 힘없이 주저앉지 않고 출구를 마련해 그쪽으로 걸어나간다. 영화의 외부액자이자 현재시점에서 또다른 셋으로서 쌍둥이 딸들과 리암이 쌓아가는 일상의 밝고 행복한 나날들은 과거의 감옥에서 걸어나오는 희망적인 대답이기도 하다.

영화 <여친남친>의 주요 서사주조는 아니지만 동성애자로 등장하는 리암의 이야기는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아론과 메이바오, 리암 세 인물의 불안정한 관계를 부각시키는 도구 정도로 활용된 것 같아 아쉽다. 침대 밑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아론에게 줄 선물상자에서 집약되어 구체화되는가 싶다가도 이내 메이바오와 아론으로 연결되는 순간 어린 시절의 미로에 갇힌 청춘남녀의 불안정한 사랑이야기를 강화하는 데서 멈춘다. 영화의 외부액자에 해당하는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 역시 동성애자로서의 리암을 부각시키기보단 다른 기능에 치중하고 있다. 물론 다양한 형태를 가진 사랑을 결국 긍정하고야 마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반갑긴 하지만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진 않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도 리암이 물에 입수해서 헤엄치는 씬에서 전환, 감각적으로 연결된 게이 결혼식 장면이 훨씬 사랑스러웠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