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北)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날아가는 새도 지향하였을 북의 하늘 아래서 커리어를 얻었고, 사랑을 하였다. 쌍(雙)이란 것은 좋았다. 한날 한 시에 숨을 멈출 순 없을지라도. 그를 조금 더 가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기에 기록은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의 영원이었다. 그 영원은 누군가에 의해 가필되어, 혹은 윤색되어 전해질 것이다. 기왕 그럴 거라면 재현이 당연한 형태로 기록하자. 그래서 그의 작품은 모두 규격서의 형태로 존재한다. 관객은 재현된 기록을 훼손하길 권유 받는다. 자고 일어나게 되면 마법처럼 복구되어 있을 그 기록.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의 이야기다.
Félix González-Torres: Double展을 다녀와서
MECO
당신은 시청역 근처, 플라토 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의 개인전 ‘Double’을 방문한다. 꽤나 충동적이다. 고원(Plateau)이라는 낯선 이름이 로댕 갤러리의 바뀐 이름이란 것도 막상 입장하여,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을 목견하고서야 깨닫는다. 사전에 어떤 준비를 하고 가지도 않았다. 곤살레스-토레스와 이번 전시에 대해 미리 알았던 것은, 소수인종(쿠바인)/동성애자/HIV감염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전시된 채 누구나 가져갈 수 있는 그의 사탕 작품을 어느 미술대학에서인가 작당하여 모두 퍼 왔고, 그걸 비디오로 기록했고, 미술관은 비디오 반출을 허가하는 대신 사탕을 돌려 받았다는 초현실적인 어떤 교섭의 이야기 정도.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
그의 연인, 로스 레이콕(Ross Laycock)
잘 생긴 남자다. 라티노의 선을 지니기도 했지만, 매력 있는 남자다. 괜한 아쉬움에 전시를 보고서야 찾아본 위키피디아에서 말한 그의 궤적에 이 남자의 얼굴을 대입해 본다. 소호의 한 갤러리에서 88년 자신의 첫 전시를 디렉팅하며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 남자. 그의 옆에는 연인 로스 레이콕이 자리한다. 혹은 작품활동과 강의를 병행하였던 뉴욕대의 어느 강의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강의 또한 성격파. 의도적이진 않지만 학생들에게 화도 벌컥 내고, 수업을 마치는 시간 따윈 물론 아오안. 물론 이는 모두 심지어 엄밀하지조차 않은 상상이다. 1
무제 - 북녘(North)
전시는 충실하다기보다 모범적이다. 당신은 표를 사고 ‘고원 2’에 입장한다. 그러면 천정에서 늘어뜨려진 전구뭉치가 로댕의 두 오리지널 에디션 사이를 가르고 있다. 이 작품은 – 다른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이 – 이름이 없다. 다만 이 버전의 부제는 북녘(North). 리움에 있는 버전은 스톡홀름을 향하여(For Stockholm).
무제 - 시작(Beginning)
방송과 함께 정시에 설명을 시작하는 도슨트는 늘어진 비즈 발 너머로 당신을 인도한다. 비즈는 꽤나 무겁다. 당신은 이 또한 작품이 아닌지 의심해본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관객과의 신체적 접촉을 유도하는 이 작품에 대해 신나게 설명한다. 초록색으로 된 비즈로 이루어진 이 발의 부제는 비기닝(Beginning). 규격서는 이 작품을 전시의 시작 혹은 마지막에만 자리해야 한다고 규정했단다. 도슨트는 같은 작품이지만, 붉은 비즈로 만들어진 바리에이션의 부제는 피(Blood)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AIDS와의 석연찮은 연관관계를 암시하는 데 가까스로 성공한다. 비로소 당신은 AIDS 시대 이후, 0.5mm를 넘어설 수 없는 어떠한 접촉을 그리움과 함께 떠올린다.
무제 - 완벽한 연인(Perfect Lovers)
무제 - 오르페우스들(Orpheus)
무제 - 러버보이(Loverboy)
동질한 것이 두 개 나란히 서 있는 메타 이미지는 곤살레스-토레스가 즐겨 썼던 것이라고 한다. 완벽한 연인(Perfect Lovers)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초침까지 모두 맞아 떨어진 이미지가 주로 떠오른다. 그러나 오늘의 시계는 서로 미묘한 차이가 났으며, 멈추는 시간 또한 다를 것이다. 레이콕 또한 91년에 곤살레스-토레스를 남기고 먼저 AIDS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보아선 안 될 뒤를 비추는 거울은 그런 그를 쫓아가는 오르페우스(Orpheus), 곤살레스-토레스의 영혼이다. 역시 동일한 것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당신은 오르페우스의 복수형이 어떤 어미변화를 불러올지 생각하기도 하고, 그 앞에서 머리를 고치는 여인네들을 신경쓰지 않은 채 셔터를 누르지만, 그런 당신의 모습이 거울을 통해 사진에 드러날 거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척 한다. 답답하다. 이는 아마도 바람에 흔들리기로 예정된 한 쌍의 커튼(Loverboy)이 흔들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제 - 환영(Aparicion)
무제 - 로스모어 II(Rossmore II)
종이와 사탕은 배치되어 있다. 당신은 이를 집어감으로써 작품을 <훼손>한다. 그러나 이는 예정된 바이다. 곤살레스-토레스는 미니멀을 파괴하였다, 고 도슨트는 한 마디 더한다. 그렇지만 사탕과 종이 자체가 아닌, 집어가는 예정된 훼손에 각인된 그의 기록을 ‘파괴’하려면 웬만한 룰 위반으로는 힘들다. 적어도 저 파인애플 맛 은색 사탕을 모두 집어간 천둥벌거숭이 같은 학생들에게 사탕을 돌려달라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나의 로스를 더 많이’, 혹은 로스와 차린 살림집 앞의 길 이름이었던 로스모어(Rossmore II)의 사탕은 사과 맛 연두색 사탕으로 지정되어 있다.
무제 - 플라시보(Placebo) / 문두의 사진과 동일하나 무보정
당신은 사탕을 하나 주워 입에 물어본다. 마치 사랑의 이름처럼 달콤하다. 연두색 잔디길을 걷는 기분으로 가장 압도적인 은색 사탕뭉치, 450킬로그램의 대작 플라시보(Placebo)를 일견한다. 가짜 약, 혹은 가톨릭의 추모. 설령 곤살레스-토레스는 이로서 로스 레이콕을 추모했을지라도 아직 살아야 하는 당신에게 이 플라시보는, 그리고 사탕을 빨아먹는 행위는, 에로티시즘의 은유일 수밖에 없다. 가장 내밀한 행위는 그렇게 공적 공간에서 무의식 중에 재현된다. 곤살레스-토레스는 그럴 줄 알았다며, 시내 여섯 개의 빌보드에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공간인 침실을 짠 하고 공개해 두었다. 버스를 타고 오며 그 중 하나를 지나쳤던 당신은 허를 찔린 기분이다.
무제 -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 / 무제 - 고고댄싱 플랫폼(Gogo-Dancing Platform)
실제 고고댄싱 플랫폼에서 춤을 추는 고고보이의 사진 4
전시의 처음부터 곤살레스-토레스가 게이였으며 열렬한 사랑을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그럼에도 석연치 않은 것도 있다. 이 전시 내내 곤살레스-토레스가 그려낸 쌍(double)은 “동-성-애”를 상징하는 것이란 정보가 귓바퀴를 반복적으로 울린다. 그리고 “어떤 동성애 작가들은” “동성애자들은” “그들은”으로 표현된다. 물론 2012년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의 열두 사진이 찬양하는 덕목을 소유한 집단인 “백인 이성애자”가 그리 익숙한 발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걸로 공평해졌다(we're even)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자연사 박물관의 가치를 모독하기 위해 고고보이가 춤을 추는 무대(Gogo-Dancing Platform)가 한가운데 설치되어 있다. 오늘 당신은 고고보이가 홀로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춘다는 5분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미술관의 이벤트 사진 속 고고보이는 웃는 응모자들 뒤에서 잉여롭고 생뚱맞다. AIDS는 동성애 암이라는 ‘오해’를 받았다고 발화되나 전시의 종국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에 대한 어떤 오해, 혹은 오독은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에게 남는 것은 어떤 공허함. 이 공허함 앞에서, 로스모어 II의 사탕 무게는 사망 직전 로스 레이콕의 몸무게인 37kg이란 정보가 여전히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일까.
무제 - 데이트라인(Dateline)
무제 - 데이트라인(Dateline) (계속)
역시 또 하나의 획을 긋는다는 데이트라인(Dateline) 이란 작품으로 안내된다. 그의 인생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단어와 연도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1991년, 나의 세상이 끝났다’는 기록이 당신의 눈을 끈다. 서울의 이 바리에이션은 데이트라인의 스물 두 번째 에디션이다. 길이가 가장 비슷하였던 여섯 번째 에디션에서 큐레이터가 다섯 단어를 바꾸었다. 그 중 하나를 당신은 싫어도 알 수 있게 된다. 도슨트는 별도의 방으로 이어지는 데이트라인에서 사뭇 감격적으로 ‘Seoul, 2012’를 지목한다. 같은 목소리가 전시 말미에 곤살레스-토레스의 전시는 아시아 최초임을, 그것도 일본보다 앞선 것임을 지적하고야 말 것이다. 데자뤼, 데자뷔가 엄습한다. 당신은 중학교 시절, 미술 시간에 보았던 로댕 갤러리 홍보 비디오가 얼마나 웅장한 목소리로 청동상의 오리지날리티를 설명하며, 로댕 작품의 열두 번째와 일곱 번째 에디션이 특히나 빼어난 이유를 설명했던 걸 기억할지도 모른다. 5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밖으로 나와, 왠지 모를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아서도 기시감은 계속된다. 당신은 곤살레스-토레스가 말하고자 했던 ‘double’이 같은 것의 한 쌍인지, 아니면 반대되는 것들의 거울상인지 헷갈리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블록 옆에서 곤살레스-토레스의 침실사진을 한 번 더 볼 수 있지만 회의감에 지레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당신은 무거운 가방을 지고 사진을 찍어가며 충분히 걸었다. 충실한 모범생이 나도 힙스터처럼 놀 줄 안다며 재구성해둔 못다-퀴어한 듯한 서사에 피로감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의 탓은 아닐 것이다. 비록 오로지 누구 한 사람의 탓은 아닐지라도 당신의 뇌는 충분한 노동을 했다. 그 증거로 슬슬 전시 내용이 엉키기 시작한다.
이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당신은 사탕을, 그 연두색 사랑을 한 움큼 쥐고 나왔다. 도슨트의 설명이 끝나자 관리자들은, 지난 번 쓰레받기를 든 잠탈자들로부터 사탕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듯 사탕을 지키려는 듯이 나뉘어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버티어 가며 한 움큼 쥐고 나온 사탕은 몰이해도 국가주의도 탈각하지 못할 사랑의 정수(精髓)일 것이다. 누군가는 예정된 방식의 창조적 파괴이고, 누군가에겐 채워 넣어야 할 결손이겠지만, 오늘 나에겐 이 파편이 사랑 그 자체이다. 다시 이로부터 나의 서사를 기록하게 될 그런 나만의 사랑. 이렇게라도 사랑은 해야만 한다.
Félix González-Torres: Double展은 2호선 시청역 8번 출구, 로댕 갤러리-플라토에서 이번 주 금요일까지 합니다. 일부 작품은 리움과 삼성생명 서초타워 및 서울 시내 6개 광고판에서 동시에 전시되고 있어요. 플라토 입장료는 3천원,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고, 2시, 3시, 4시, 5시에 도슨트가 설명해 줍니다. 고고보이는 미술관 관계자들도 언제 오는지 모른다고 하네요. 고고보이들 자신이 알아서 하루 5분 춤을 추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행운을 빌어요)
- 아웃 오브 안중. [본문으로]
- 삼성이 건설한 이 ‘고원’이 들뢰즈/가타리가 선택한 어휘와 동일하다는 것은 아마도 한국미술사상 가장 전위적인 거울상 아닐는지. [본문으로]
- 사진 출처: 영삼성 블로그. http://www.youngsamsung.com/mysamsung.do?cmd=view&seq=2201&tid=355 [본문으로]
- 사진출처: http://blog.ohmynews.com/seulsong/tag/%ED%8E%A0%EB%A6%AD%EC%8A%A4%20%EA%B3%A4%EC%9E%98%EB%A0%88%EC%8A%A4-%ED%86%A0%EB%A0%88%EC%8A%A4 [본문으로]
- Deja Lu, Deja Vu: 어딘가에서 읽은, 어딘가에서 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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