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O
Gay Manifesto 2. 퀴어는 어떻게 법을 탐지하는가 (1)에서 이어집니다.
2004스42 결정(과 관련 판례)의 어떤 진보성
성소수자 성정치의 입장이 아닌 법리적으로 볼 때도 2004스42 결정은 엄밀하고 우수하며 깔끔하지 못하다. 당초의 호적법이, 그리고 가족관계등록법이 예정한 호적/등록부 정정의 원인에 포함되지 않은 성전환 수술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포섭하기 위해, 법적으로 근거가 없는 새로운 제도를 하나 만들어버린 것이다. 현대 법치주의 국가에서 이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는 입법권을 사법이 재량으로 침투한 현상으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소위 ‘판례 입법’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이러한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사실 이 사건이다.
기왕의 호적법과,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개정된 가족관계등록법은 두 가지 형태의 호적 수정방법을 예정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원시적인 오류를 바로잡는 정정이며(가족관계등록법 제18조), 후발적으로 행정구역 등의 명칭이 변경되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생긴 경우를 바로잡는 변경 경정이다(동법 제19조). 그런데 이 중 후자, 후발적인 변경에 따른 경정은 법에 그 사유가 행정구역 명칭의 변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성전환자의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대법원의 관점은, 전 항에서 보았듯이 출생시에는 생물학적 성을 타고 났으나 후발적으로 정신적, 심리학적, 사회적인 요인으로 인해 성별이 바뀐다는 쪽에 가깝다. 그러므로 후발적인 변경에 따른 경정이 이 사례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나, 법조문이 후발적 변경 경정에 대해 그 요인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적용하는 것은 유추해석의 범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대법원은 요인이 특별히 법문에 규정되지 않은 원시적 오류를 바로잡는 정정(제18조)을 유추해석하여 적용하고 있다. 후발적인 섹슈얼리티의 변경으로 보면서도 호적 정정 과정은 원시적 오류를 바로잡는 과정을 택하는 논리적 모순이 있는 셈이다.
2004스42 결정이 대법관 전원이 함께 판단하는 전원합의체로 심의되었고, 당시 대법원 분위기상 드물었던 반대의견과 별개의견이 존재하는 치열한 결정례로 남은 것 또한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대법원 반대의견은 그러므로 법적으로 성전환자가 반대의 성으로 호적을 정정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손지열, 박재윤 대법관의 논리는 관련 조문을 아무리 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형태의 변경은 예정된 바 없었으므로, 행복추구권 등의 헌법적 권리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제도를 법관이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입법자의 정책적 디자인이 필요한 사안에 법관이 개입하는 건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반대의견의 법리적으로 옳아 보이는 지적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독수리 오형제’의 일원이자, 이 사건의 주심 대법관이기도 하였던 김지형 대법관은 이것이 소위 말하는 ‘헌법합치적 해석’의 일환이라는 주장까지도 펴고 있지만, 제도가 예정한 바가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할 때 그 중 헌법에 맞는 것을 골라야 한다는 헌법합치적 해석의 정의상 이는 적절하지 않은 논리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대법원의 다수의견은 별다른 논거 없이 법관에 의한 입법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대법원의 과감한 판례 입법은, 주로 가치의 문제인 가족법의 영역에서, 사실상 입법적으로 이 부분이 근시일 내에 개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인식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와 사법구조가 비슷한 독일과 일본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독일의 경우 대한민국 대법원 반대의견과 같은 판결을 내린 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을 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가 ‘윽박질러’ 다수의견과 같은 방향으로 판례를 변경토록 지시한 바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 입법은 그러한 개선의 가능성이 희박하였음을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해 내었다. 2006년 6월 이 사건 결정이 최초로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 신청을 허용하였는데, 그 전인 2005년 2월 이미 헌법재판소에 의해 호적법은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 있었다. 이에 대한 대체입법은 이 사건 결정이 있은 뒤 2008년에 시행된 가족관계등록법이지만, 가족관계등록법에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대한 입법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입법 과정에서 성별정정 신청이 반영될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17대 국회에서 노회찬 의원이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하였으나 이 또한 통과되지 않았고, 현재 19대 국회가 개원하였지만 여전히 관련 입법은 요원하여 보인다.
이는 관련하여 보아야 할 다른 중요한 판례가 있다. 바로 위의 결정에서 별 논란 없이 받아들여진 부분, 즉 ‘사람의 성은 성염색체의 구성을 기본적인 요소로 하여 내부 생식기와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의 외관은 물론이고 심리적•정신적인 성과 이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나 태도 등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한 최초의 판결인 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791 판결이다.
성전환 수술을 받아 여성으로 살고 있는 50대의 트랜스젠더가 강간을 당하였다. 그러나 형법은 강간죄의 대상을 ‘부녀’로 한정하며, 이는 호적상 여성으로 한정되어 해석되어 왔다. 만일 이 트랜스젠더가 남성이라면 이는 강간죄가 아닌 강제추행으로 처벌해야 한다. 형량도 낮아지고, 피해자가 납득할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피고인이 저지른 범죄의 인식과 다르다.
이 상황에서 대법원은 위와 같은 논리로 트랜스젠더 여성을 ‘부녀’의 범위에 포함하는 해석을 시행하였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서 트랜스젠더의 성별이 변경되는 것은 사실상 호적 내지는 가족관계등록부상의 변경절차가 완료되었을 때가 아니라, 성전환 수술을 받아 외성기의 변경이 일어난 시점인 것이다. 1
이 또한 사실 형법에서 ‘강간’을 부녀를 대상으로 한 것을 입법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해당 입법이 일어날 가능성은, 96년에는 더더욱 요원하였다. 지금까지도 형법 개정에 있어 강간죄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 구성요건에서 부녀를 빼야 한다는 주장은 강력하지만 관철될지 여부는 여전히 안개 속인 이유이다.
대법원이 유독 가족법 영역에서 강력하게 취하곤 하는 사법적극주의, 혹은 판례 입법은 흥미롭게도 국민을 대리하는 입법가들의 수단보다도 더욱 즉각적인 보호를 제공한다. 비록 판결 내부를 관통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법원의 전제는 여전히 한심하기 그지 없을지라도, 대법원이 “그래도 이건 정말 심하지 않냐”고 느끼는, 혹은 변호인단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사안에서 보호에 망설임이 없다는 건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일정한 정도의 진보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진보성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만, 대한민국 퀴어 신에는 아직까지 ‘이것은 저것보다 낫다’고, 심지어 산술적으로 나누어 말할 만한, 기본적인 정의와 진보의 문제가 많이도 산적하여 있기 때문에, 이런 게으른 서술이 용납될 여지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 이는, 어떻게 보면, 서류상 변경이 있는 시점을 성별이 변경된 시점으로 보는 관점보다는 훨씬 트랜스젠더-친화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법이 강간죄라는 영역에서는 그 사이의 사실상 여성인 상태 또한 보호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 없으므로. 그럼에도 수술 중심으로 트랜스젠더의 성별변경 시점을 판단하겠다는 외성기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어 각주로 뺀다. [본문으로]
- 실제 영국에서는 입법연도별로 꽤 여러 개의 인권법이 있으며, 이들을 통합하여 통일된 권리장전을 제정하려는 노력도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본문으로]
- 가령 강간죄의 보호 대상을 부녀에서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는 과정은 모욕적이기 그지 없는 군형법의 ‘계간’ 조항을 폐지하는 데 진일보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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