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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1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주디스/잭 할버스탐(Judith "Jack" Halberstam) 교수의 강연을 다녀왔습니다.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 여담이지만, 알비노 호랑이와 대화하다가 제가 그간 ‘남가주’를 South Carolina로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서 멘붕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네, 이 곳이 바로 그 남가주 대학입니다)의 페미니즘/영문학 교수입니다. 위키에서는 톰보이(남성적 매력을 지닌 털털한 여성)와 여성의 남성성(female masculinity)을 주로 연구한 사람이라고 하는군요.
사생활 측면에서 할버스탐은 레즈비언이며, 본인을 가리킬 때 Jack이라는 남성적 이름을 사용합니다.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떠있는 키노트에는 "Jack Halberstam, 2012"라고 적혀 있었지요. 그/녀의 연구는 아마도 다분히 자기경험적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겠죠. 실제 소위 말하는 ‘부치’ 상이기도 하고요. 잘 생기셨더라고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이 아마도 물어보실 질문일, 할버스탐은 누구인가: 사실 여기에 답하기에 제가 적합한 사람은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로 이해되고, 퀴어 이론(Queer Theory) 하시는 분들도 이 분의 글을 읽기는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녀의 글을 한 번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으니까요. 예전에 한 번 2005년 Social Text 紙의 서문을 읽었던 것 같긴 한데 제대로 기억나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글을 적는 이유는, 할버스탐 교수의 강연에 대해 국내에서 적힌 글이 이 정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링크를 눌러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한심할 정도의 독해이지요. 마돈나가 여성성의 극화 강조라면 레이디 가가가 여성성의 해체를 반영한다는 것까진 그렇다고 하겠습니다만, ‘심지어 동성애 지지’라던가, 남성을 찬미하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인식 등에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우주를 느낍니다.
그러므로 강연을 들은 사람의 의무감에 정리를 합니다만, 제가 페미니즘을 공부해본 적이 있는 게 아니라서 깊은 이해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저 강연 내용을 최대한 성실하게 전달하는 정도의 노력이 한계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입니다.
금번 할버스탐 교수 등의 소위 ‘핫한 페미니스트’들을 한국에 불러모은 것은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의 2012년 컨퍼런스였습니다.
할버스탐에 한정하여 들은 바에 따르면 이 김에 연대와 이대에서도 강연을 하였다는데, 신촌에서는 애초에 강연 제목이 곧 나올 그녀의 신간인 <Gaga Feminism>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서울대 강연의 제목인 ‘Queer Art of Failure’는 2011년 책의 이름이었죠. (하지만 강연 내용은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강연 초반부에 failure에 대한 언급이 조금 있었습니다. 시험으로 채점하는 전통적 대학교육은 시험을 잘 보는 학생을 만들 뿐이며, 결국 조직화(Organization)는 그 자체가 목적달성에 저해되는 요소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은 이런 전통적 제도/대학에 포섭되지 못한 소위 ‘실패’들이며, 고위 추상화를 거치지 않고 의미의 더 낮은 층위를 다루는 것(lower register of meaning)이 Low Theory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듯 합니다만, 저는 여전히 Low Theory와 Queer Art of Failure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Low Theory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은 영국의 문화연구이론가 Stewart Paul을 참조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고차원적이고 추상화된 ‘high theory’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High와 Low 둘 다 하지만, Low Theory라 함은 복잡한 것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할버스탐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라캉, 데리다와는 다르게 이건 여전히 이론이며, 자신은 이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그래서 그게 뭐야?!라는 질문을 던지는 즉물적인 저에겐 충분한 답이 되지는 못하더라고요.
랑시에의 “Ignorant Schoolmaster”를 인용하여 (지식의 주입이 아닌 함께 연구하고 공부한다는 지평을 연 18세기의 가상적인 교수와 교수법을 통해 학문 연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 책) 지적 해방을 위한 3가지 요건을 설명하던 중 1. 모든 사람은 똑같이 지적이다(All individuals are equally intellectual)는 부분에서, “not really…?” 로 모두를 터뜨리긴 했습니다만, 강연 제목과 아예 벗어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살짝 언급한 <Queer Art of Failure>에 관한 부분에서는 기억나는 것이 이 정도 밖엔 없네요.
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초반에 잠깐 하고서 이야기는 결국 신간 <가가 페미니즘(Gaga Feminism)>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요. 여기에서 결국 할버스탐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상성의 종말(the end of normal)과 가족의 해체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도입하는 사례 – 그리고 누가 보아도, 할버스탐의 취향에 들어맞는 사례 – 가 몇 개 있습니다. 우선 자궁을 제거하지 않은 FTM 트랜스젠더 남성(여성 성염색체를 지녔으나 남성으로 성전환)이 출산한 것. 이것은 결국 전통적인 가정 형태와는 지독하게도 이질적인 ‘남성의 출산’이 되지요.
어느새 정상상태가 되어버린 ‘이혼’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실 겁니다. 할버스탐은 심지어 ‘국제적’ 트렌드라고까지 표현합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51%의 가정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비율은 올라가고 있고요. 할버스탐은 이를 지적하면서 “결혼의 성공률이 50%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이제는 이혼이 새로운 정상이 되는 거죠(as soon as the success rate of the marriage hits 50% and less, divorce is the new norm)”라고 합니다. 이제 한 명의 상대와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오히려 더 흔하지 않게 된 것이고, 정상적이지 않게 된 것이지요.
예전에는 ‘평생을 함께 한’다고 한다면 20여년 정도의 결혼생활을 상정하였지만, 이제 25세 젊은이들이 평생을 약속한다면 이는 평균수명의 상승으로 최소 60년 정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 할버스탐은 다시 한 번 숫자를 지적합니다. 이미 절반 이상이 이혼을 하지 않냐고 말이지요. 그리고 이 비율은 올라가고 있고요.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의 맥락에서 결혼제도의 위기는 게이/퀴어 인구가 결혼을 요구하는 등으로부터 온다기보단, 오히려 이성애자들이 가장 크게 겪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은 줄고만 있으며, 남자들은 정액을 팔고, 여자들은 결혼 대신 스스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심지어 할버스탐은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너무 다른 것을 원하고, 남성잡지와 여성잡지를 보면 이게 정말 같은 사람이기나 한가 싶고, 그러다 보니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류의 책이 횡행하며,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통역이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어떻게 보면 서로 너무도 다른 종이라서 처음부터 맞지 않은(incompatible) 것이란 결론을 낼 수도 있잖아요? 라고도 합니다. ㅋㅋㅋㅋ
요즘 젊은 여자들이 보는 책을 보면 어떻게 남자를 찾는지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면서, 게이들만 어떻게 사랑하는 상대를 찾는지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도 하지요. “게이들이 보기에 이성애자들은 상대를 다들 잘만 찾는 것 같지만, 사실 이성애자들도 엄청 어려움을 겪고 있는 셈이지요. 심지어 이성애자들에겐 쉽게 상대를 낚을 수 있는 게이바도 없어요!”
일단 이런 식으로 ‘정상’이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이성애정상성(Heteronormativity)이 버팀목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쇼킹한 사실은, 이성애자들이 결혼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고 있을 때야 동성애자들에게 결혼이 하나의 선택지로 제시된다는 점입니다. 할버스탐은 “잊어버리세요. 결혼 그거, 얼마나 비싼데요. 그리고 이혼이라도 할라치면 더 비싸요.” 라고 합니다만.
실제 많은 이성애자들이 이런 사고 끝에 단순 동거를 택하고, 이런 결혼제도의 취약성이 드러난 시점에 뜬금없이 미국은 게이/레즈비언들에게 결혼제도를 제시하지요. 샌프란시스코가 잠깐 동성결혼을 허용했을 때 이는 엄청난 경제적인 붐을 불러왔다고 합니다. 할버스탐의 분석은 결혼이 법적, 종교적인 문제라기보단 경제적인 문제라는 것인데, 결국 이러한 동성결혼 이야기는 결국 국가가 동성애자들에게 ‘결혼을 파는(selling the marriage)’ 과정이란 점입니다. “그리고 게이/레즈비언들은 '네 제발요. 우리도 이 대단한 제도의 혜택을 보고 싶어요.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다는 게 너무 슬퍼요'라고 하는데, 정작 10년 뒤에, 제 말을 믿으세요, 게이 이혼이 새로운 문제가 될 겁니다.”
그리고 다시 아까 이야기했던 트랜스젠더 아버지의 임신 이야기로 돌아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가족들에게 ‘정상’적으로 아이를 제공하기 위한 생식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이러한 ‘비정상’이 가능해졌다는 것부터 우선 할버스탐의 구미를 당겼고, 이는 다른 사례들과 더불어 정상성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증을 주게 됩니다.
레즈비언 엄마들의 사례가 있죠. 결혼을 통해서만 아이가 만들어지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 남자들은 인터넷에서 정액을 팔고 여자들은 남자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고 그 정액을 사서 수정을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나니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물화되었네요. 그리고 한 남자의 정액으로 수정된 아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로 twibling=twins+siblings이 있다고 합니다. 좀 찾아보니 이들이 서로를 찾아다니는 과정이 리얼리티 쇼 등으로 새롭게 조명을 받는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레즈비언 가정에서도 아이를 가지고 싶은 경우 이런 일들이 있고, 그렇게 생긴 가정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런 레즈비언 엄마들의 가정은 상당히 긍정적이지요. 할버스탐은 우선 보통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데, 심지어 엄마가 둘이니 얼마나 좋을까? 라고 농담처럼 제시하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이나 정서적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가정이 레즈비언 엄마들의 가정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대중의 정서에도 상당히 잘 들어맞아 쉽게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죠. (그럼에도 모유 수유를 하는 부치 엄마의 사진은 발칙하다고들 합니다)
이런 사례들은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결론을 내릴 시점에서 할버스탐은 살짝 서두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신간 Gaga Feminism의 한 챕터로 강의를 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이와 같은 정상성의 붕괴 시대에 대안은 무엇인가? 아니, 대안이라는 것이 존재는 하나?
물론 이토록 거대한 사회적 격변에 있어 한 레즈비언 학자에게 답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라는 관점도 있겠습니다만. 결국 사회적 성역할로부터 자유로운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Children born and raised under Gender-queer parenting)에게 미래가 있다는 정도의 원론적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Cisgendered”라는 신조어도 언급합니다. 이제 아무도 ‘정상’적이지 못하며, 당신의 몸과 사회적 성별이 일치한다면 당신은 성동일적(cisgendered)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다변적(gender-variant)이란 것이지요. 요즘의 미국 퀴어 커뮤니티에서는 이와 같은 언급이 횡행한다고들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 퀴어 커뮤니티에 흔한 ‘일반(一般)’과 ‘이반(離般)’ 용어의 정제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지 않나, 혹은 저 용어들의 탈맥락화가 이루어질 시점이 되었다 정도로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가가' 페미니즘인가? 버클리에서 강연할 때 나붙은 팜플렛에서는 할버스탐이 2008년 레이디 가가가 MTV에서 드랙을 하고 레이디 가가의 가상 남자친구인 것처럼 연기한 것에 충격을 받아 이론을 정립한 것처럼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레이디 가가와의 연결지점은 여전히 분명하지 않죠. 할버스탐 교수 자신도 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레이디 가가가 기괴한 모습으로 영감을 주었지만, 그녀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할 뿐이라고. 결국은 이러한 정상성의 종말과 가족 체제의 붕괴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정말로 똑똑하신 서리 님은 “할버스탐은 참 학문을 쉽게 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물론 전 그런 할버스탐도 잘 못 읽겠긔 ㅠㅠㅠ) 이는 질문과 답변에서 현장에 자리한 많은 변두리-전통적-페미니즘 학자들이 미국의 티 파티 등의 보수적이고 기독교적인 기치를 들고 가족제도를 ‘수호’하려 드는 움직임에 대해 코멘트를 요구했을 때, 할버스탐 교수의 답변에서 드러납니다.
“티 파티는 자극적이지만 그렇게 미국 사회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지는 못해요. 사실 가족제도의 위기는 벌써 왔고, 티 파티는 그 마지막 발악 정도일 뿐이지요.”
캘리포니아에 한정하여서는 그것이 실체적인 진실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통령 선거판만 챙겨 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지요. Homo Surplus의 필진 알비노 호랑이가 이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
아무튼 커밍아웃한 외국 퀴어 이론 학자(?)가 한국에서 강연을 하였고, 저는 다른 많은 퀴어 꿈나무들과 함께 가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왔다는 것으로도 참 의미 있다고 박수치고 싶은 경험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야매와 달리 제대로 칼을 갈아 학문을 하는 친구들이 하였던 한탄에 공감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 초청료라면 할버스탐의 저작을 세 권은 번역할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무엇이 더 필요한지에 대해 제가 감히 판단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할버스탐의 초청이 게이/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크게 회자되지도 못하고 이번과 같이 ‘영문학자들만의 리그’로 끝나고 만 것이 아쉽다면 저는 그 한탄에 조금은 더 공감을 하는 쪽일까요.
물론 한편으로는 지적 허영의 발로로, 백날 읽기만 하였던 저자들이 직접 와서 자기 저작을 해명하는 것을 보고 듣는 체험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굳이 옹호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겐 그런 시각화와 동기부여가 여실히 필요하죠. 그리고 저는 이런 글을 결국에 써내고 있으니, 조금이나마 죄질이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ㅠㅠ
그리고 정말로 재미있었어요. 그/녀의 글을 읽는 것과는 별개로, 강연을 듣는 것은 말이지요. 시험도 덜 끝난 퀴어 꿈나무들을 동아리방에서 선동하여 갔을 때는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조금 떨었는데, 정작 강연이 시작하자 빵빵 터지며 정신 없이 몰입할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흔치 않게도, 제가 이성애자가 아니었기에 조금 더 즐길 수 있었던 경험이기도 합니다. 저는 고정관념을 넘어 생각하는 걸 잘 하지 못해서, 저에게 가상의 것일지라도 이성애정상성이 당연한 것이었다면 웃고 있으면서도 이 강연이 불편했을 것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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