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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27 Gay Manifesto #1.: 제국 이태원(帝國 梨泰院) 6


MECO


Disclaimer

Homo Surplus 일부 필진의 글은 Team Chatterbox의 공식 입장 내지는 일치된 견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해당 글을 쓴 필진의 개인적 견해일 뿐이므로 문제제기는 그 필진에 대하여 해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나른한 어제 오후였다. 적어도 한가로운 나의 트위터 타임라인에 그 글이 올라온 것은. 그리 길지 않은 글이므로 (기억나는) 그대로 옮겨보자면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가 HIV 감염에 취약한 건 사실”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불어닥친 토론의 소용돌이는 그야말로 광풍과도 같았다. 아, 그 토론의 맥락을 정리하고 내 의견 한 줄을 덧붙여 넣기 위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믿고 싶다). 자신이 논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꽉 막힌 벽과도 같은 다수의 의견을 다시금 누군가의 언어로 번역하여 옮기는 행위란, 그 얼마나 많은 결락과 왜곡을 불러올 것이며, 또한 누군가에게 답답한 벽으로 다가갈 것인가. 그 이전에 정리를 하는 과정이 내 혈압을 보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에서 등장한 전제 몇 가지를, 일반론이라는 당의정을 입혀 그 근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한다.






제국 이태원(Itaewon Empire)이라 하는 건 물론, 식민군(Colonial Army)의 진주를 전제로 한 표현이다. 지금까지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나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조금 젊잖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표현을 하기도 한다. 식별가능한 퀴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동성애자, 혹은 그 중에서도 게이들이 전체 퀴어 인구의 어젠다를 선점하였노라고. 그리고 그건 퀴어 인권운동마저 잠식하여 마치 게이들의 문제가 퀴어 전체의 문제로 둔갑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고. 어제의 토론은 나에게 전형적으로, 이런 경향성이 도드라진 사례로 다가왔다.


게이, 퀴어, 혹은 퀴어-프렌들리한 이성애자이고자 하는 독자들은 인터넷 세계의 변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심 궁금해할 것이다. 그래서 준비한, 개인 블로그에 쓰려 했던 글 두 개 정도를 갈아 넣은, MECO 식의 순도 높은 정황 설명.



토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전제를 잘 정리하는 것일 터다.


우선 문제가 된 트윗은,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가 HIV 감염에 취약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본 문제제기는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남성 동성애자’와 ‘성적 왕성함’의 결부에 대한 불편함의 제기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논한다.



그런데 사태가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 인터넷 상에서 호모포비아와 게이들의(편의상, 이렇게 정의) 오랜 전쟁의 양상 때문인데, 호모포비아들은 “게이는 HIV에 취약하다, 그러므로 게이들은 더럽다/금지되어야 한다/바람직하지 않다/권장할 수 없다”와 같은 일련의 논리구조를 채택하고, 게이들은 이 전제를 흔들기 위해 많은 수단을 택한다.


논리적으로 저 짜증나는 명제를 분석해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될 것이다.



1. 게이들은 애널섹스를 많이 한다. 사실 애널섹스를 하는 사람들 중 절대다수는 게이이다.


2. 애널섹스는 HIV 감염에 취약한 섹스 방식이다.


3. HIV 감염에 취약한 섹스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4. 그 이후의 여러 소모적인 매도들. 게이는 더럽다. 모두 감방에 가둬야 한다. 여자 맛을 못 봐서 그런다 등등.



4번 이후의 매도는 사실 사람 취급해 주기 힘든 애들이나 하는 소리일 것이다. 정작 문제는 3번에 있다. HIV 감염에 취약한 섹스 방식과, 그런 섹스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HIV에 취약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다운그레이드해 보는 왜곡된 관점.


이 관점의 왜곡성을 지적하는 글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게이들의 반박은 1+2번에 치중해 있다. ‘게이는 HIV 감염에 취약하다’는 명제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고,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 이를테면 이런 방식이다.


2번 명제에 관해, 애널섹스를 하는 사람만이 HIV에 감염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한에이즈예방협회는 보통의 성관계에 0.1-1% 정도의 HIV 감염률을, 그리고 애널섹스에 0.3-5% 정도의 감염률을 상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포비아들의 논지는 약간 수정하여, HIV 감염률이 더 높은 섹스 방식과 그 섹스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은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논의의 방향은 자연스레 1번 명제로 가게 된다.


소위 말하는 “나는 게이지만 애널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바로 그런 것. 어떠한 형태를 띠든 결국은 게이=애널섹스의 도식을 파괴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어제 또한 그랬다. 원래의 트윗은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가 HIV 감염에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였으나, 여기서의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 부분에 생략된, 그들이 애널섹스를 더욱 자주 한다는, 그리고 섹스 과정에서 HIV 양성의 파트너를 만날 확률이 높다는 부분에 대한 반론이 있었다.


나 또한 게이=애널섹스의 도식을 100% 인정하지는 않는 편이지만[각주:1], 그와는 별개로 이 파괴에는 어떤 불순한 목적성이 존재한다. 1, 2번 명제와 3번 명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바로 1, 2번 명제는 HIV 감염 취약성을 논증하기 위한 중간다리에 가깝고, 3번 명제는 남성 동성애자가 HIV에 취약하기 때문에, 그들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잘못된 가치판단과 논리비약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의 결락과, 그를 지적하는 공격의 움직임은 당연히 3번 명제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1, 2번 명제에서 근본적인 불편함을 느끼는 일부 게이 및 ‘자칭’ 인권운동가들의 직관은 결국 게이와 HIV가 어떤 식으로든 결부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각주:2]


굳이 HIV 감염인과 게이의 상관계수를 논하지 않더라도 – 그 와중에 ‘변인통제’와 같은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지만, 이는 넘어가고 – 개념적으로도 그렇다. 더 쉽고 취약한 논리적 맹점 대신, 통계의 맹점과 오류를 만들어가며 굳이 1, 2번 명제를 공격하는 것은 결국 1, 2번 명제 자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바로, 동성애와 HIV의 연결고리.


이걸 깨려고 하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결국 이들에겐 HIV가 남의 문제,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 논의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HIV와 동성애자를 결부 짓지 말아야 할 어색한 논거의 각종 변주가. 그런데, 왜 HIV와 동성애자를 결부 짓는 것이 불편한가?[각주:3]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없었고, 당연히 답도 없었다. 아니, 없지는 않았는데 꼰대들의 오독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에이즈포비아인 건 아니에요”라는 말도 많이 보았다. 그런데, 그게 에이즈포비아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게이는 싫지만, 그렇다고 제가 호모포비아인 건 아니에요.”




첨언하자면, 사회적 소수자가 모든 면에서 바람직하며 다른 소수자 인권에 민감해야 한다는 규범적 요청은 어떤 의미의 이중 잣대라고 생각한다.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선해서가 아니라는 나의 옛 주장들과 같은 취지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소수자가 자신의 인권보장을 요구하며 했던 주장과 논리모순, 자가당착에 빠지는 일은 적어도 없어야 한다. 소수자 사회의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s) 현상과도 같을 것이다. 자신들은 같은 취지의 주장으로 어느 정도의 입지를 확보한 후,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신들이 당했던 억압논거로 찍어 누르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또한 AIDS/HIV 문제가 게이의 문제가 아닐까? HIV 양성 감염인은, 게이와 전혀 다른 사람들일까? 심지어 이는 HIV 감염인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인식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게이가 HIV에 감염되었다고 하여 게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HIV에 감염된 게이가 될 뿐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인권을 박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민권이 면탈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조금 더 특수한 형태의 사회적 보호가 필요해질 뿐이다.








많이 돌아왔다. 그래서 이는 제국 이태원 현상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동성애자/퀴어 인권운동 신(scene) 내부에 깊숙이 밀착되지 않은 내 입장에서,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구호는 매우 즉물적이고 직관적이다. 즉물적이고 직관적인 구호는 정서적 공감을 통해 전파되고, 이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문제가 된다.[각주:4]


퀴어, 조금 더 대중적인 용어로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확보한 입지는 게이가 이뻐서, 레즈의 사고방식이 올바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결국은 사회가 소수자를 어떻게 포용하고, 그들이 상처받지 않고 사회 구성원으로 공존할 수 있을지 고민 끝에 찾은 타협점에 가깝다. 그 타협점이 보이는 협상력과 정치력이 결국은 다수를 차지하는 게이들에게 독점되는 현상이 분명 발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부 게이들의 설익은 사고방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류 퀴어 운동의 목소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소위 말하는 퀴어-프렌들리한, ‘인권감수성’[각주:5]을 갖춘 이성애자들 또한 저 목소리를 전사하게 된다. 아웃팅 방지가 퀴어 인권운동의 알파요 오메가며, 거의 제1가치로 평가 받는 이런 현상, 혹은 게이들의 즉물적인 HIV와의 비결부 요구가 마치 인권적으로 선진적인 주장이기라도 한 양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과 공감을 얻어 전파되는 이런 현상들.


이 현상은 결국 즉물적인 게이 어젠다의 한계를 그대로 퀴어 커뮤니티의 문제로 전사한다. 게이 커뮤니티에서 존재할 수 있는 HIV 감염인에 대한 색안경은 그대로 퀴어들의 자가당착이 되며, 나이브하게도 통계자료와 해석방법에 대해 던진 엇나간 문제제기는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너무도 크고 반복적이어서, 내부의 자정작용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혹은 다른 소수자들의 또한 시급한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내부의 자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항상 계도적이고 도덕적으로 완벽할 수는 없다. 평소 운동 신에 훈수를 두는 꼬장한 “올드 스쿨 게이”들이 아니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이기는 수단은 결국 더 철저한 논리가 되어야 한다. 말꼬리를 잡는 건 부끄럽고, 솔직히 뭘 말하는지 이해도 못하는 건 더 부끄러운 일이다. ‘위트’ ‘버튼’과 같은 기믹에 휘둘리지 좀 말고.


상대의 도덕적 미결이 나의 논리적 흠결을 감추어주지는 않는다는 것. 특히나, 들어야 할 사람이 상대방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일 때는 더더욱 말이다.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결국 다른 퀴어들의 합리적이고 심층적인 문제제기를 묻어버리는 이런 답습이 업스트림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사태에 있어 개구리밥 님이 제시했던 여성의 성적 욕망과 같은 부분들.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라는 발언이 이를 위배했다고는 보지 않지만, 확실히 평소 배려가 결여된 부분이란 지적도 피할 수는 없다. 더욱 적극적으로 개구리밥 님이 제시하는 논거들을 보면 레즈비언 섹스에 대한 안내 지침의 부재와 같은 것이 있다.


또한 STD(Sexually Transmitted Disease: 성병)에 있어 어젠다가 나뉘어 설정되어 버렸다는 사실 또한 큰 문제다. HIV는 그야말로 남성 동성애자의 문제가 될 뿐이고, 같은 의미에서 HPV(Human Papilloma Virus, 여성의 자궁경부암을 유발)는 중년 여성, 혹은 고작해야 예방접종의 대상이 되는 젊은 여성들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HIV 감염인 절대 수는 이성애자가 더 많으며(당연한 일이지만, 그리고 비율상 동성애자 HIV 감염인의 비율이 넘사벽이겠지만), HPV 예방 백신인 가다실이 콘딜로마(HIV와 함께 STD계의 양대 공포, 곤지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질병을 하나의 성정체성과 결부하게 되는 방식은 효율적인 방식도 아니며, 위험하기까지 한 결락을 불러오게 된다. 이 또한 업스트림의 목소리에 묻혀, 지적과 개선의 움직임은 요원하기만 하다.




정리하자면, 인권운동의 현장 구호가 즉물적 호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그런데 그 호오는 결국 퀴어 운동현장의 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결정한다는 것. 그러다 보니, 게이 사회 내부에서 정제되지 않은 단순 호오가 표면에 대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이런 어젠다의 잠식을 나는, 퀴어 사회 지분을 다수-소수자가 독점하는 현상을 현현한 ‘제국 이태원’의 전형적인 일례로 본다.


그렇다면 단순히 퀴어 사회의 새로운 독재자로 군림한 게이, 혹은 그에 편승하는 일부 알파-레즈비언들을 척결하면 되는 문제일까? 사태를 그렇게 바라보고 싶어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게이-마초성을 가정하고 죽창으로 이를 해결하려 드는 방식을 우리 모두가 바라지는 않는다고 가정하고,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한다.


누군가를 마초-비마초로 나뉘어 판단하여, 마초를 배격한다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현재의 독점체제를 문제시하는 방법은 너무 단순하다. 그런 판단의 결과로 게이가 퀴어 사회 지분을 잠식하였다는 문제인식에 공감할 마음도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자성에 가까운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해결 또한 그 방향에서 나와야 한다. 게이라면, 그리고 더군다나 메인스트림이라면, 의식적으로 성정체성-성지향의 모든 조합이 가능하다는 가정적인 시뮬레이션을 계속적으로 시도하는 수 밖엔. 그것이 게이에게만 강요되는 것은 물론 아닐진대, 이러한 조합을 당연히 숨쉬듯 할 수밖에 없는 성정체성-성지향의 사람들도 존재하므로, 결국은 그 곳까지 상상력을 뻗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나마, 우리에겐 이러한 상상력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는 점을 새겨보는 것도 좋을 법하다. 누군가에게 이 세상은, 혹은 대한민국은, 게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어야만 하는 청정구역이기도 하다. 그들이 얼마나 무지몽매해 보이는지 다시 한 번 새기면서, 더욱 정진을.






첨언 1. llello 님의 이 글, 그리고 이 글은 지금껏 이 사태에 관해 쓰인 가장 좋은 글이다.


첨언 2. 위와 같은 의미에서 동인련 HIV/AIDS 팀의 인권교육은 좀 가자. 나부터도, 내가 이런 걸 잘 모르고 있다는 판단이 선다면.

  1. 그럼에도 나는 애널섹스를 하는 게이이고, 저러한 형태의 주장이 일종의 선긋기로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배제의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런 나의 주장을 오히려 헉하며 받아들인 사람은 전혀 다른 층위의 주장을 하고 있었던 - 그러므로 애널섹스를 하지 않는 게이들의 주장에 대해 심정적 동조를 하는 것에 가까웠던 - 게이가 아닌 퀴어들이었다. [본문으로]
  2. 또한 나는 일군의 이런 주장에 관해 성엄숙주의에 젖어 있다고 비판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관련성이 덜하여 굳이 논하지 않는다. 하지만, 애널섹스를 하지 않는 게이의 존재를 들어서까지 HIV와의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자신들이 탈출하고 남은 애널섹스를 하는 게이들은 HIV와의 연관성을 그대로 인정하며, 그들에 대한 색안경을 끼게 되는 것인지 조금 더 자아성찰을 요구하게는 된다. [본문으로]
  3. 어느 모로 생각해보나 AIDS/HIV는 악이 아니다. 걸린 사람들의 불행을 연만하고, 나에게 걸릴 가능성이 있음을, 그리고 그 가능성이 항문성교를 상대적으로 덜 하는 듯한 이성애자에 비해 높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러면 어떻냐는 당당한 태도로 임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관리가능한 질병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 [본문으로]
  4. 참고로, 여기서의 인권운동 신이라는 것은 본격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공감공감을 얻기 위해 트위터에 트윗을 하여 그것이 RT를 통해 전파되는 층위까지도 포섭한 개념이다. [본문으로]
  5. 인권+감수성이라는 이 단어는 상당히 웃기다. 인권이 언제부터 감성의 문제였을까? 물론 인권 지표와 관련 토픽에 민감하게 반응하여야 한다는 취지는 이해를 한다만, 이 단어의 사용례는 사실상 인권을 감성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일군의 주류 이데올로기를 놀랍도록 탁월하게 묘사해준다. [본문으로]
Posted by M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