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O
Disclaimer
이번 글은 퀴어, 성소수자와 관련된 오래된 논의에 대한 배경을 일부 무시합니다. 현실 세계의 맥락에서 이번 글에 한정해 퀴어=성소수자, 그리고 이 개념은 게이인 저를 완벽히 포괄합니다. 별로라고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안 그래도 분량 오바.
무지는 경외의 근원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던 기독교도의 신은 – 실존한다면 – 이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무지는 한계를 베일 속에 가두고 권능은 넓게 펼쳐 혜량할 수 없게 한다. 언제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눈은 언제나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부른다. 그리고 이는 판옵티콘의 숨겨진 전제이기도 하다.
현대의 우리에게 법(法)과 같은 무지의 대상이 또 남아 있을까? 자연과학이 무지의 영역을 극소의 영역으로, 혹은 극대의 영역으로 한정하여 점차 줄여가는 동안 법은 자신들이 이해한 것을, 자신들만 이해하는 방식으로 울타리를 둘러쳤다. 다행이라면 법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굴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법 또한 결국은 군림하고자 한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재작년부터 지난해까지 이어진 차별금지법 제정 국면에서 퀴어 세상 또한 크게 요동쳤던 것은. 불가해한 괴물, 우리 머리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지배자, 그리고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지상 최강의 키보드 워리어 진중권의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는 ‘법’이라는 걸 길들일 필요성을, 세상의 일부로서, 퀴어들 또한 강하게 느꼈다는 반증이었을 테니까.
법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한다. 그러나 정작 퀴어와 법의 교차점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법의 감지는 그 역치가 꽤 높기에, 법에 포착되기 위해서는 퀴어가 충분히 가시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퀴어로서 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또한 생활을 영위하고, 그 생활은, 결국 법의 규율을 폭넓게 받는다. 나를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가 꾸준히 의식하는 과정은 자칫 잘못하면 병적일 수 있다.
대한민국 사법체계가 등장한 이래, 법이 포착한 퀴어 관련 이슈라면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생각난다. 우선, 서두에 언급한 차별금지법. 이는 입법의 영역으로, 어떻게 보면 퀴어 인권 운동의 관점에서는 고전적인 주제가 된다. 그리고, 남성 동성애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모멸감에 시달리게 되는 용어, ‘계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군형법 제92조. 헌법적 문제가 되어 왔다. 마지막으로, MTF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다루고 있는 가족법과 이와 관련된 형법적 문제다. 물론 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역시나 이 정도랄까. 검색을 통해 보아도 여기에 더할 수 있는 것은 인접한 페미니즘의 성폭력과 성적 자기결정권 논의, 그리고 HIV/AIDS의 기본권적 논의 정도이다.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QIS 일각에서 발간하는 자치언론 ‘퀴어 플라이’는 제10호에서 ‘퀴어와 법’을 기획의 일부로 다룬 바 있고, 해당 기획과 관련된 4개의 글 중에서 둘은 차별금지법과 인권조례, 나머지 둘은 군형법에 할애되었다. 굳이 그럴 당위성은 없는 것이지만, 나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대해 퀴어의 관점에서 말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드문 사례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뿐더러 이 사례 자체가 말해주는 바가 다른 두 개의 사례와는 다르면서도 심도 있기에. 1
사법은 퀴어 이슈를 얼마나 탐지하는가
섹슈얼리티의 형성에 관한 미셸 푸코의 설명으로 돌아가자면, 19세기 서구의 사법은 동성애적 행위를 규제하던 것에서 벗어나 동성애 관계와 해당 성향을 규제하기 시작한다. 입법의 차원에서 동성애자를 처벌하고 규제하는 법이 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법을 적용하고 시행하는 사법 차원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사형 등의 무거운 법정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상 적용되지 않는 죽은 법이었던 동성애 행위 처벌 법규가 강력한 실효성을 가지고 적용되는 사례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튼 블룸즈베리 클럽이 존재했던 영국에서조차 20세기 중반 앨런 튜링의 비극을 막지 못하는 분위기에 이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20세기 초반의 서구 법질서를 일본 민사법을 통해 한 번, 그리고 해방 직후 해외법의 계수를 통해 또 한 번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던 대한민국 법질서는 변방의 것은 중앙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언어학의 어떤 법칙을 따르기라도 한 것인지, 여전히 20세기 초중반 서구 법질서의 모순을 많이도 배태하고 있다. 3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모순이라면 역시나 혼인의 관념을 전통적인 남-녀의 가족적 결합으로 한정하여 규정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여전히 서구 사회에서도 법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는 마무리단계에 있는 본 논쟁이 결국은 (시민결합의 형태가 아닌) 동성커플의 결혼에 관한 시민사회적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실제 그러한 형태의 입법이 된 사례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논쟁 지점에서는 유독 서구에 이러한 입법형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지 않았다는, 자의적으로 선택된 사실이 동성 커플의 결혼 개념 포섭에 반대하는 측의 하나의 논거로 사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4
법학과 연계되어 이루어지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각종 진보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법조계는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라는 대중적 인식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는 퀴어 전반 이슈를 대하는 법조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한 법학 교수는 말한다. 법조계에서 이슈로서의 동성애를 언급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호적상 성별 정정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급은 아닐 수도 있지만, 여타의 퀴어 이슈 전반에서 동성애에 비해 훨씬 ‘가시적이지 못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굳이 찾아준 판례법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멈추어진 시계가 하루 두 번은 맞아 떨어지듯, 진보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맞아 떨어지긴 했지만 이는 대한민국 법조계의 실상에 부합하는 설명은 일단 아니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관한 판례 문언을 검토한다면 더욱 명확해진다.
- ‘퀴어와 법’에 대해 보자는 국내의 거의 유일한 시도였기에 인용하였지만, 이 ‘기획 의도’ 글은 꽤 심각한 곡해의 지점을 가진다.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 차별금지법을 포섭한다 할지라도 군형법 제92조는 그와 동일한 정도의 역사를, 사실상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도 차별금지 입법보다 더욱 오래된 역사를 가진다. 초반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 신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제기는 모욕적이기까지 한 용어가 사용된 해당 법문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갑자기 빵 터진’ 것으로 묘사한 점은 자의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 이를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반동을 배제함으로써 강고한 헤테로섹슈얼리티의 지배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본문으로]
- 적당히 번역하고 살짝 고쳐 적용한다는 말을 법학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더라. [본문으로]
- 물론 MECO는 동성결혼에 대해 대략 지난 강연 후기에 인용한 Halberstam과 비슷한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할 수조차 없다는 점을 비교형량할 때 동성결혼권을 인정받는 게 옳다고 보는 쪽일 뿐. [본문으로]
- 애초에 국가가 개인의 신상기록을 전면적으로 기록하는 시스템이 야경국가적인 후진성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이 점은 논의하지 않기로 하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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