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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9.19 Gay Manifesto 2. 퀴어는 어떻게 법을 탐지하는가 (1)


MECO


Disclaimer

이번 글은 퀴어, 성소수자와 관련된 오래된 논의에 대한 배경을 일부 무시합니다. 현실 세계의 맥락에서 이번 글에 한정해 퀴어=성소수자, 그리고 이 개념은 게이인 저를 완벽히 포괄합니다. 별로라고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안 그래도 분량 오바.




무지는 경외의 근원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던 기독교도의 신은 – 실존한다면 – 이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무지는 한계를 베일 속에 가두고 권능은 넓게 펼쳐 혜량할 수 없게 한다. 언제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눈은 언제나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부른다. 그리고 이는 판옵티콘의 숨겨진 전제이기도 하다.


현대의 우리에게 법(法)과 같은 무지의 대상이 또 남아 있을까? 자연과학이 무지의 영역을 극소의 영역으로, 혹은 극대의 영역으로 한정하여 점차 줄여가는 동안 법은 자신들이 이해한 것을, 자신들만 이해하는 방식으로 울타리를 둘러쳤다. 다행이라면 법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굴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법 또한 결국은 군림하고자 한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재작년부터 지난해까지 이어진 차별금지법 제정 국면에서 퀴어 세상 또한 크게 요동쳤던 것은. 불가해한 괴물, 우리 머리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지배자, 그리고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지상 최강의 키보드 워리어 진중권의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는 ‘법’이라는 걸 길들일 필요성을, 세상의 일부로서, 퀴어들 또한 강하게 느꼈다는 반증이었을 테니까.




법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한다. 그러나 정작 퀴어와 법의 교차점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법의 감지는 그 역치가 꽤 높기에, 법에 포착되기 위해서는 퀴어가 충분히 가시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퀴어로서 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또한 생활을 영위하고, 그 생활은, 결국 법의 규율을 폭넓게 받는다. 나를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가 꾸준히 의식하는 과정은 자칫 잘못하면 병적일 수 있다.


대한민국 사법체계가 등장한 이래, 법이 포착한 퀴어 관련 이슈라면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생각난다. 우선, 서두에 언급한 차별금지법. 이는 입법의 영역으로, 어떻게 보면 퀴어 인권 운동의 관점에서는 고전적인 주제가 된다. 그리고, 남성 동성애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모멸감에 시달리게 되는 용어, ‘계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군형법 제92조. 헌법적 문제가 되어 왔다. 마지막으로, MTF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다루고 있는 가족법과 이와 관련된 형법적 문제다. 물론 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역시나 이 정도랄까. 검색을 통해 보아도 여기에 더할 수 있는 것은 인접한 페미니즘의 성폭력과 성적 자기결정권 논의, 그리고 HIV/AIDS의 기본권적 논의 정도이다.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QIS 일각에서 발간하는 자치언론 ‘퀴어 플라이’는 제10호에서 ‘퀴어와 법’을 기획의 일부로 다룬 바[각주:1] 있고, 해당 기획과 관련된 4개의 글 중에서 둘은 차별금지법과 인권조례, 나머지 둘은 군형법에 할애되었다. 굳이 그럴 당위성은 없는 것이지만, 나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대해 퀴어의 관점에서 말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드문 사례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뿐더러 이 사례 자체가 말해주는 바가 다른 두 개의 사례와는 다르면서도 심도 있기에.





사법은 퀴어 이슈를 얼마나 탐지하는가



섹슈얼리티의 형성에 관한 미셸 푸코의 설명으로 돌아가자면, 19세기 서구의 사법은 동성애적 행위를 규제하던 것에서 벗어나 동성애 관계와 해당 성향을 규제하기 시작한다. 입법의 차원에서 동성애자를 처벌하고 규제하는 법이 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법을 적용하고 시행하는 사법 차원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사형 등의 무거운 법정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상 적용되지 않는 죽은 법이었던 동성애 행위 처벌 법규가 강력한 실효성을 가지고 적용되는 사례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각주:2]. 아무튼 블룸즈베리 클럽이 존재했던 영국에서조차 20세기 중반 앨런 튜링의 비극을 막지 못하는 분위기에 이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20세기 초반의 서구 법질서를 일본 민사법을 통해 한 번, 그리고 해방 직후 해외법의 계수[각주:3]를 통해 또 한 번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던 대한민국 법질서는 변방의 것은 중앙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언어학의 어떤 법칙을 따르기라도 한 것인지, 여전히 20세기 초중반 서구 법질서의 모순을 많이도 배태하고 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모순이라면 역시나 혼인의 관념을 전통적인 남-녀의 가족적 결합으로 한정하여 규정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여전히 서구 사회에서도 법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는 마무리단계에 있는 본 논쟁이 결국은 (시민결합의 형태가 아닌) 동성커플의 결혼에 관한 시민사회적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실제 그러한 형태의 입법이 된 사례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논쟁 지점에서는 유독 서구에 이러한 입법형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지 않았다는, 자의적으로 선택된 사실이 동성 커플의 결혼 개념 포섭에 반대하는 측의 하나의 논거로 사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각주:4]




법학과 연계되어 이루어지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각종 진보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법조계는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라는 대중적 인식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는 퀴어 전반 이슈를 대하는 법조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한 법학 교수는 말한다. 법조계에서 이슈로서의 동성애를 언급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호적상 성별 정정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급은 아닐 수도 있지만, 여타의 퀴어 이슈 전반에서 동성애에 비해 훨씬 ‘가시적이지 못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굳이 찾아준 판례법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멈추어진 시계가 하루 두 번은 맞아 떨어지듯, 진보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맞아 떨어지긴 했지만 이는 대한민국 법조계의 실상에 부합하는 설명은 일단 아니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관한 판례 문언을 검토한다면 더욱 명확해진다.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결정례 검토: 대법원의 성전환 인식에 관하여


소위 ‘생물학적’ 성과 심리적, 사회학적, 정신적 의미의 성이 일치하지 않는 트랜스젠더 중에서, 대한민국의 사법이 지금까지 가족관계등록부(옛 호적)의 변경을 허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수술을 통해 외성기의 변형을 이룬 수술 트랜스젠더 뿐이다. 그 중에서도 판례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MTF 수술 트랜스젠더)에 집중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MTF 트랜스젠더의 호적상 성별표기 정정이 처음으로 허용된 사안은 2006년에 있었던 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이다. 이후 호주제가 폐지되어 가족관계등록부가 도입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나 법리의 변화가 있지는 않았으므로 이 결정을 그대로 본다.



당시 성별정정을 인정하는 대법원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1. 기존에 대법원은, ‘사람의 성은 성염색체의 구성을 기본적인 요소로 하여 내부 생식기와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의 외관은 물론이고 심리적•정신적인 성과 이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나 태도 등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었다. (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791 판결 참조)

2. 성별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WHO에서 분류한 국제질병기호상에도 분류가 있는 내용이다. 이를 대법원은 성동일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의 일환인 성전환증(Transexualism)이라는 용어로 포섭한다.

3. 그리고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성별을 호적에 무엇으로 기재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과 설명이 있다. 이 부분은 중요하기에 한 문단을 옮긴다.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도, 남성 또는 여성 중 어느 한쪽의 성염색체를 보유하고 있고 그 염색체와 일치하는 생식기와 성기가 형성•발달되어 출생하지만 출생 당시에는 아직 그 사람의 정신적•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성을 인지할 수 없으므로, 사회통념상 그 출생 당시에는 생물학적인 신체적 성징에 따라 법률적인 성이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출생 후의 성장에 따라 일관되게 출생 당시의 생물학적인 성에 대한 불일치감 및 위화감•혐오감을 갖고 반대의 성에 귀속감을 느끼면서 반대의 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 역시 반대의 성으로서 형성하기를 강력히 원하여, 정신과적으로 성전환증의 진단을 받고 상당기간 정신과적 치료나 호르몬 치료 등을 실시하여도 여전히 위 증세가 치유되지 않고 반대의 성에 대한 정신적•사회적 적응이 이루어짐에 따라 일반적인 의학적 기준에 의하여 성전환수술을 받고 반대 성으로서의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를 갖추고, 나아가 전환된 신체에 따른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만족감을 느끼고 공고한 성정체성의 인식 아래 그 성에 맞춘 의복, 두발 등의 외관을 하고 성관계 등 개인적인 영역 및 직업 등 사회적인 영역에서 모두 전환된 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그 성으로서 인식되고 있으며, 전환된 성을 그 사람의 성이라고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과의 신분관계에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거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아니하여 사회적으로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면, 이러한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앞서 본 사람의 성에 대한 평가 기준에 비추어 사회통념상 신체적으로 전환된 성을 갖추고 있다고 인정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할 것이며, 이와 같은 성전환자(아래에서 말하는 성전환자는 이러한 성전환자를 뜻한다)는 출생시와는 달리 전환된 성이 법률적으로도 그 성전환자의 성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위 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결정문 中

이상에서 보다시피, 대법원의 판단은 일관되게 성전환수술을 받은 사람을 성별정정의 적법한 청구 주체로 파악하고 있고, 그 이외의 부분에는 침묵한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우선 외성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힌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논의는 반대의 경우, 즉 FTM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 FTM 트랜스젠더가 법원에 성별정정을 요청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보이고, 우리와 비슷한 사법체계를 가진 일본에서 – 그러나 일본의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은 입법적 보완이 이루어져 이미 행정적 절차가 구비되어 있다 –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환한 경우 실무적으로 성기 성형 없이 성별 변경을 허가해주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FTM 트랜스젠더의 경우 인공성기와 성기성형의 안전성에 의문이 있다는 점이 반영되었겠지만, 여성기를 남성기의 부재로 보는 전통적 관념을 비판하는 페미니즘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식능력의 완전한 상실을 요건으로 요구하는 점 또한 상당히 후진적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준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남성(FTM)이 불임인 파트너를 대신하여 임신하는 미국과 같은 사례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각주:5]

‘사회통념에 의해’라는 부분에 의해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으로 제한된다는 점 또한 문제 중 하나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관련하여 실제 결정례가 남은 사안인 대법원 2011. 9. 2. 자 2009스117 전원합의체 결정은 자녀과 그 부모 간의 관계가 상당히 극단적인 사안이었으므로 일반화가 어렵지만, 실제 이후 대법원 내규는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전반적으로 위와 같은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판례를 보여주면 심지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하더라도 단박에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위 판결에서 성별을 감지하는 부분이 ‘학계’의 최신 연구결과를 반영했다고는 하나 이는 소위 생물학적, 의학적인 부분에 한정되어 있으며, 인권의 영역에서, 혹은 여타의 인문학적, 사회학적 연구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어휘와 새로운 시도들은 그 존재 자체를 무시당했다는 점이 여실하게 보이는 결정례이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현실에 절망하거나 저항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살아있는 것은 싸우는 것이란 어떤 비문도 있다만, 그래도 품위 있고 조금 더 나은 저항을 택하기 위해서라도 위 판결이 가지는 어떤 외적인 진보성에 대한 분석은 필요해 보인다.

그래,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해보자. 트랜스젠더의/퀴어의 입장에서 분명 모욕적이나, 법원이 퀴어 이슈를 다루는 태도에 있어 저 판결은 보이는 만큼 나쁜 판결은 아니다.





  1. ‘퀴어와 법’에 대해 보자는 국내의 거의 유일한 시도였기에 인용하였지만, 이 ‘기획 의도’ 글은 꽤 심각한 곡해의 지점을 가진다.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 차별금지법을 포섭한다 할지라도 군형법 제92조는 그와 동일한 정도의 역사를, 사실상 인권 운동의 측면에서도 차별금지 입법보다 더욱 오래된 역사를 가진다. 초반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 신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제기는 모욕적이기까지 한 용어가 사용된 해당 법문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갑자기 빵 터진’ 것으로 묘사한 점은 자의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2. 이를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반동을 배제함으로써 강고한 헤테로섹슈얼리티의 지배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본문으로]
  3. 적당히 번역하고 살짝 고쳐 적용한다는 말을 법학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더라. [본문으로]
  4. 물론 MECO는 동성결혼에 대해 대략 지난 강연 후기에 인용한 Halberstam과 비슷한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할 수조차 없다는 점을 비교형량할 때 동성결혼권을 인정받는 게 옳다고 보는 쪽일 뿐. [본문으로]
  5. 애초에 국가가 개인의 신상기록을 전면적으로 기록하는 시스템이 야경국가적인 후진성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이 점은 논의하지 않기로 하자. [본문으로]
Posted by M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