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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말, 고종석 씨가 절필을 선언했다.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 달포 전쯤, 술자리에서 친구 차병직이 자조적으로 “책은 안철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 우린 아니지!”라고 말했을 때, 나는 진지하게 절필을 생각했다.” 라는 말이 그의 심경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 글은, 그의 말대로 무력해 보인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 했다면 구백구십구 가지 이상의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세상을 바꾸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비효율적인 선택이었는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뿐이다.


퀴어 인구 비율이 높은 편인 서울시 마포구의 LGBTQ 모임인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가(이하 '마레연') 지난 11월 소위 ‘퀴어 현수막 대작전’을 시도하였다. 현수막을 거는 형태의 퀴어인권운동은 버스 및 대중일간지 광고와 더불어 최근 등장한 ‘핫’한 방법이다. 사회운동가 이계덕 씨가 올해 한 가장 큰 기여 중 하나는 종로구에 최초로 현수막을 내건 것일 테다. 주목을 받고 싶어 했다는 비난도 있고, 굳이 이렇게 일반대중을 향해야 하느냐는 방법론적 회의도 있었다. 하지만 이 현수막이 꽤 큰 호응을 얻었고, 나름의 버즈를 형성하였으며, 마레연이 꼭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비슷한 방식을 택했다는 것은 나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계덕 씨가 종로구에 게시한 현수막의 문구는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 서울시민중 누군가는 성 소수자입니다. 모든 국민은 성적지향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갖습니다” 였다. 마레연은 “지금 이 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입니다”와,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라는 두 개의 현수막을 1월 초까지 게시하려고 하였다.


"옥외광고법령에 해당 내용을 금지하는 내용이 없고, 국가인권위원법 제2조 3항에 '성적지향에 의한 차별'을 할 수 없다고 담고 있어 광고물 게첨을 반려할 법적 근거가 없어 게첨을 허용했다"는 종로구청과는 달리, 마포구청은 난색을 표했다. ‘난색’이라는 구어를 차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마포구청이 공식적으로 반려처분을 내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수정을 요구해왔을 뿐이다. 1번 현수막의 사람들이 옷을 입지 않고 있는 묘사(해당 ‘사람들’은 2등신 캐리커쳐였다)와 해당 문구의 어미가 반말인 점, 손가락으로 ‘여기’를 가리킨다는 점 등에서 혐오감을 조성할 수 있으며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제5조에 의거해 마포구청 도시경관과는 이 문구와 그림의 수정을 요구했다.


마레연은 해당 수정요구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규정하고 민원과 여론 조성을 통한 대응을 선포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여 행동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퀴어 인권운동에도 분명 이와 같이, 이익단체적 성격을 확실히 하여 행정에 과부하를 주어 자신들의 존재를 확고히 인지시키고 원하는 처분을 받아내는 방식이 기여할 여지가 있다고 믿는다.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나는 마레연을 지지한다. “감히 날 없는 사람 취급해?”라는 분노 때문일 것이다. 민원글 하나 정도 쓰기는 쉬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당연히 분노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그것에 왜 분노하는지 설명을 하는 것조차 모욕적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기실 나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역시나 이로서 괜찮은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최근 어떤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퀴어 사회의 ‘선두주자’들이 앞서 나가고 있을 때, 납득하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뒤떨어진 채로 ‘저것은 뭘까’ 하는,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황 말이다. 나는 인권운동이 –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지금 인권운동이 그러한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소위 ‘일반 대중’을, 최소한 설득할 시도는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런 설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뱀다리에 발가락 무좀까지도 그려보고 싶어진다.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마포구청의 수정요구가 불러오는 모욕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양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걷어내고 보아도 이것이 얼마나 어이 없는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들은 지금껏 너무도 당연하여 말하지 않은 것들이다. 왜 여기에 분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 당연하지 않은 어감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단지, 그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길고 긴 유폐



당신을 (어디까지나 글쓴이 MECO가 게이이기 때문에) 게이라고 해보자. 학창시절 구기종목은 별로였지만 같은 반 활발한 그 아이를 좋아했다. 그 마음은 품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귄 여자친구와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으면 가슴은 멍이 들면서도 어찌 되었든 그와의 연은 이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를 보지 않는 것은 더 큰 고통이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만나는 친구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다 그는 묻기도 한다. “그런데 너는 요즘 별 것 없냐?” 뼛속 깊은 호모포비아인 그를 아는 당신은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요즘 사는 게 바빠서…” 그는 바빠서 연애를 안 한다기 보다는 눈이 x나게 높은 거라며 당신을 잠시 타박한 후, 자기 이야기로 돌아간다.


당신은 드러나는 존재일 수 없다. 물론 어려서부터 커밍아웃을 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으며 행복한 삶을 사는 성소수자가 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여, 타자화되는 것을 피하며 대등한 교류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었던 이들에게 ‘왜 그러지 않느냐’며 각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 누구든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요구 받을 수는 없다.


자신을 지칭할 말을 찾지 못한 부유하는 영혼과 몸은, 각자 시차를 달리하여 도시의 게토로 흘러 들어온다. 종로 모처의 바에 기대어 ‘내가 열 살만 어렸더라면’을 읊조리는 ‘언니’들이 있다. ‘그 땐 다 그랬어’라며 뒤늦게 찾지 못한 삶을 없었던 셈친다. 심지어 서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일부만을 서술하게 되는 이 두려움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많고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설령 성소수자란 사실은 나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다른 많은 것들이 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자부하였더라도, 결국은 쫓아와 나를 붙잡고야 마는 이 오래된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앞에서 나는 드라마틱해질 수조차 없다.


집단서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새겨진 정서가 존재한다. 혹자는 피해의식이라 부른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롯이 내가 못났기 때문은 아니다. 이야기를 하는 순간 받게 될 욕설 가득한 문자가 존재한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같이 밥을 먹었던 내가, 더러운 것인양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당신이 존재한다. ‘난 그런 거 이해 못해’라며, 적어도 나에겐 본질적이었던 이 문제를 한 때의 방황인 양 치부해버리는 취급이 존재한다.


직장에서의 눈에 띄는 차등이 존재한다. “차별하면 안 되지만, 솔직히”로 시작하는 수많은 차별이 존재한다. 결혼을 하지 않는 당신에 대한 수군거림과 일종의 강압이 존재한다. 단지 당신이 스스로 느끼는 성별불편감을 바루기로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직종이 극히 제한되는 경험이 존재한다. 회사는 고용인의 의료보험을 책임지지만 어떤 병에는 해고와 사회적 멸실에 이르는 낙인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나 자신의 존재보다도 선명해 보인다.


이 모든 것을 숨김으로써 유예할 수 있다. 벽장은 그나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안전한 쉘터, 아니, 이동식 요새이다. 숨어있을 공간이란 걸론 하루하루 수행하는 이 전투를 오롯이 설명할 수 없다. 어느 날 벗어 던질 생각만 하는 이라 할지라도 자동으로 주어져 있는 이 요새를 당장 버리고 나가는 일이야 할 수가 있을 리가 없다. 안전은 할지라도 벽장은 무겁다. 이걸 지고 생활하는 것은 어떤 말로도 대체할 수 없는 큰 불편이다. 그것은 자발적인 듯 자발적이지 않은 유폐이다.


이것이 자발적이지 않은 유폐라는 점은, 마레연과 같이 존재를 드러낼 때 주변에서 보이는 반응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잠시 엿보았던 벽장 바깥의 세계는 역시나 차갑기 그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소리 높여 주장하기로 하였을 때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이중의 탄압이다. 그 때 당신에게 모를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지의 상태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 있다는 이야기부터 하여야 한다. 당장 ‘내’가 이 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인정한다. 그것은 내가 겁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우리 주변에 있다는 이야길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누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당연해졌을 때, 성소수자는 비로소 보일 것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의심한다. 열 명 중 한 명이라는 것이 정말인지, 그냥 하는 소리인지. 너무 나간 이야기가 아닌지 의심할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지금 여기 있다는 이야기는, 할 수밖에 없다. 당장 네 앞의 내가 바로 그 게이라는 말을 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래서 가슴을 내리치다 못해 답답해서 익명의 보호를 받아 허공에다 겨우 작게 소리 낼지라도, 어쨌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이야기를 막는 것은, 혐오감을 줄 수 있으므로 수정하라는 것은 모욕이다. 지금까지 숨겨왔으니 계속 숨기고 있으라는 결탁에 다름 아니다. 사실상 숨길 수 밖에 없으니 숨겨야 한다는, 잘못된 사실의 왜곡된 규범화다. 왜 굳이 지금이어야 하냐는 말을 한다. 굳이 그런 방식으로 말을 해야 하냐는 도움 안 되는 걱정도 해준다. 지금이어야 한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쩔 텐가?




왜 굳이 ‘여기’인가



마레연이 처음 사태를 공개하였을 때 일각에서는 마포구청이 ‘부동산 값’이 떨어질까 우려하였다는 시각을 공유하였다. 마포구청이 반려한 사유인 ‘혐오감을 줄 수 있는 그림과 손가락질, 무례한 반말투’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마레연이 게시하고자 한 현수막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을 종로구에 성공적으로 게시한 이계덕 씨의 사례를 보면 조금 더 분명해진다. 동일한 옥외광고법령에 따른 심사를 수행한 종로구와 마포구의 도시경관과는 서로 다른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마포구 도시경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반복적으로 ‘미풍양속, 청소년 보호’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실질적으로 마포구가 난색을 표하는 이유는 현수막의 성소수자 친화적인 내용일 것이다. ‘미풍양속’과 ‘청소년 보호’를 위해, 성소수자가 바로 지금 여기 있다는 표현을 허용하기가 힘들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공격적 어투로 쓰여져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 마포구청의 솔직한 입장이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종로구는 해당 현수막을 게시할 때,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검토하여 차별금지에 관한 조항이 있으므로, 옥외광고법 제5조의 ‘음란하거나 퇴폐적인 내용 등으로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것, 청소년의 보호ㆍ선도를 방해할 우려가 있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지를 펼쳤다. 마포구청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갔다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마포구청은 오히려 현수막의 본지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한 검토를 하는 대신 그에 대한 불편감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수막에 표현된 그림과 손가락 표시 등을 문제 삼는 쪽을 택했다.


이는 뿌리 깊은 논쟁과도 맥이 닿아 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 양상에서 ‘현명한 전략’을 주문하는 어떤 의견이 있다. 미국의 인권운동 맥락에서, 시간적으로 앞선 동성애자 옹호 운동은 사회적 인정과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인정을 목표로 삼았다면, 후에 등장한 게이 해방운동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고자 훨씬 더 원색적인 방법을 취했다. 이 두 방법론은 여전히 공존하면서 인권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한다.


전자의 의견에 심리적으로 동조하면서, 성소수자가 사회제도를 흔드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적극 개진하자는 주장이 있다. 왜 굳이, 안 그래도 예민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일반 대중을 자극하여 뒤흔드냐는 것이다. 마포구청은 그러한 ‘자제’를 주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전략은 대한민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공존할 수 없을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략을 당사자 아닌 다른 이들이 요구할 수 있는가? 이는 결국 당사자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운동’의 ‘자제’를 요청하는 행정편의적인 발상이요, 복잡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행동이다. 그렇기에 여기여야 한다. 그럴 이유가 달리 어디 있겠는가. 지금 마레연이, 성소수자 본인이 이 곳에 보이기를 원했기에, 여기에 그 의사가 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의사가 정해진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자제’를 요청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실정법’에 관해. 국민의 권한을 위임 받은 의회가 만든 법을 행정기관이 적용할 때 일정한 재량을 부여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재량은 무한대의 재량이 아니며, 입법에 의해 적절히 기율된다. 이미 종로구청이 한 번 보여준 바와 같이 옥외광고법과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해 사실상 현수막 게시를 허락하는 방향이 요구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마포구청이 이와는 다른 방향의 결정을 그대로 밀고 가고자 한다면, 행정심판과 소송 내지는 손해배상청구 등에서 자신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부담은 마포구청의 것이 될 것이다.


왜 굳이, 난색을 표하는 마포구여야 하는가. 잘못된 질문이다. 왜 마포구는 안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굳이 본심과 달리 그림 표현을 문제 삼아 가면서까지 타협해야 하는 이유를 물어야 한다. 엄밀하지 않은 표현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하고자 한 말을 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자유이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사용되기로 한 공공의 권한이 이 자유를 사실상 저해하는 것은, 분노의 이유로 이미 차고 넘쳐 보이지 않는가.


아직도 분노의 이유가, 궁금한가.




‘슬픔과 분노’에 관해



2012년, 눈 내리는 서울엔 현수막 두 장에 분노하기엔 너무도 큰 사안들이 많아 보인다. 누군가는 송전탑 위에서 목숨을 걸고 떨고 있고, 다음 대 대통령에 독재자의 딸이 당선되어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로 방향타를 돌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혹자는 말한다. “왜 너는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라고.


그것이 작은 일이었는지 다시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다. 당장의 목숨이, 수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종국적으로 결정되는 일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는가? 다시 생각한다. 작년의 종로 ‘묻지마 폭행’을 다시 생각한다. 역시나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무게를 재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똑같이 중한 일일 것이다. 그럼 다시 한 번 묻는다. 왜 그렇게 이 일에만 분노하는가.


솔직히 고백한다. 이 글을 쓰는 시간의 십분지 일이라도 다른 중한 일에 써본 적 없다. 나를 움직인 것은 즉각적인 분노이다. 그리고 그 분노를 추동한 것은 아마도 슬픔일 것이다. 혹은, 자기 연민. ‘마레연’의, 그리고 ‘당신’의 일에 대해 쓴 것처럼 보이는 이 글은 사실상 나의 일이다. 나를 드러내고 싶어도 드러낼 수 없기에, 그렇게라도 내가 있음을 증명하는 일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걸 막으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에서 존재의 위기마저 느낀다. 그렇기에 익명의 아이덴티티가 선사한 가면을 뒤집어 쓰고서, 무엇이라도 말하고저 끊임 없이 시간을 태우고 있다. 말이 이어지지 않아 패퇴에 가까운 심정마저 느낀다.


그럼에도 계속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글로써 풀어내길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근절할 수 없는 이 열패감을 이기기 위해서는 지지 않고 지껄이는 수밖에 없다. 숨은 의도, 옥외광고법령, 국가인권위원회법, 수익적 처분 혹은 그 어떤 말이라도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해불가능한 분노라 예정되어 있을지라도 이해를 구할 수밖에 없다. 예정된 실패의 반복이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을지라도 가능성을 꾸준히 이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마레연을 지지한다. 고작 현수막 두 장 때문이 아니다. 나의 슬픔과 그로 인한 분노 때문이다. 이걸 이해 받을 수 있는, 꾸준히 실패할 바로 그 가능성 때문이다.



2012.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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